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11
제111화
28. 호가호위 (1)
“아이참, 답답해 돌아가시겠네! 그 주머니 말이야!”
친히 정답을 알려 준 도깨비는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부산을 떨며 자리를 떴다. 안개가 사라지기 전에 향로를 모두 치우려면 바쁘다나 뭐라나.
“이걸 잊어버리다니. 내가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네.”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바로 인벤토리에서 복주머니를 꺼냈다. 이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지만, 과연 지금이 공주가 말한 그때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단 이쪽은 보류해 두자.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검은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를 열어젖히며 공주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온을 위해 싸워 준 무장들을 빈손으로 보낼 순 없지.”
퀘스트 ‘여명 수호’의 보상은 공주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상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섯째 공주는 우리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부연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주섬주섬 옷 속에서 주머니들을 꺼냈다.
‘포션을 주는 게 아닌가?’
먼저 꺼내 놓은 주머니는 공주의 신분에 걸맞은 화려한 공예품이었다. 금실과 은실을 아낌없이 써 자칫하면 산만하게 보일 수 있었으나, 먹색 비단이 바탕을 이루니 되려 절제미가 느껴졌다.
“용을 탄 인간……. 궐 앞의 종에 이런 문양이 있었습니다.”
“바로 보았다.”
주머니 위의 수를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공주는 놓치지 않았다.
이 용은 상제를, 그리고 그 위의 인간은 왕족들의 선조를 뜻하니. 오로지 약조의 핏줄, 온의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양이란다.
“신과 뜻을 함께한다는 의미라지만…….”
공주는 그러곤 말을 삼갔으나 그의 속내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왕실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있을 뿐, 인간이 신 위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내보였다. 직선적인 성격의 공주로서는 이 모든 게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맵시 좋은 차림새와는 잘 어울리는 주머니였으나, 뜯어보면 볼수록 여섯째 공주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오히려 그보단…….’
공주가 좀 더 나중에 꺼낸 주머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명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는 얼핏 보기엔 소박하다 못해 초라했다. 하지만 흰색 천 귀퉁이, 삐뚤빼뚤 놓인 정체불명의 자수 때문일까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기왕 볼 거면 가까이서 보라며 공주는 내게 시원스럽게 주머니를 건넸다.
“이 끝에 이건 뭡니까?”
“그리 가까이서 보고도 모르나? 유등이라네.”
이 자수가 유등이라고? 자세히 보니 못생긴 핫도그 같은 게 청재가 만든 유등과 닮은 듯도 했다.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내 반응을 오해했는지 공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참으로 곱지? 그 아이가 내게 주겠다며 밤을 꼬박 새워 만든 것이라네.”
“아, 예. 정말 귀엽습니다.”
공주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함부로 말을 얹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공주가 ‘그 아이’라고 칭할 만한 건 백아밖에 없다. 각별하게 생각하는 동생이 준 선물을 헐뜯었다면 아마 세상 호쾌한 이 여자도 쉽게 넘어가진 않았으리라.
“그런데 왜 하필 유등이랍니까?”
잊을 만하면 이야기가 나오니 관심을 가지지 않기가 오히려 더 힘들었다. 보아하니 자수 솜씨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이걸 골랐다는 점이 의문스럽기도 하고.
내가 주머니를 살피는 동안 무언가를 적기 바쁘던 공주가 누각 아래 연못을 보며 답했다.
“삭월 밤 띄우는 유등은 단순한 등이 아니니까.”
“소중한 이의 이름을 적어 띄운다는 이야기는 사감영께 들었습니다.”
“호, 세월이 많이 지나기는 한 모양이군. 그 말재간 없는 치가 부러 그런 설명까지 해 주다니.”
오랜 인연의 이름을 들었으니 회한에 사로잡힐 법도 하건만 공주의 말투는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따라 웃었던 내 표정은 이내 이어서 들려오는 공주의 말에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무엇이나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요괴들마저도 삭월의 유등만큼은 꺼린다네.”
“특별한 장치는 없어 보였는데. 제가 본 것이 미완성품이라 그런 것이었던 걸까요?”
“완성품이라 해도 크게 다를 것 없었을 게야. 그 유등이 저것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이름 적힌 종이가 전부이니.”
공주가 눈짓으로 이 근방을 밝히는 초롱불을 가리켰다. 때마침 불어온 작은 바람에 손톱만 한 불꽃들이 일순 휘청거렸고, 그를 따라 공주의 얼굴을 밝히던 빛 역시 일렁였다.
“올곧은 기원은 힘이 강한 법이지.”
“…….”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네. 요괴들이 이런 바람들을 달갑게 여길 리 없지 않은가.”
하기야. 공주의 말은 사로뫼와 성벽 앞 관리의 말과 일맥상통했다. 요괴들에게 가장 힘을 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부정적인 감정 역시 못잖은 양식이 된다고 했더랬지.
“그렇게 들으니 정말로 그 유등은 요괴들과 대척점에 있는 듯하군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낡은 풍습일 뿐이지.”
“……이 역병이 끝나는 날, 모두 돌아올 겁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던졌건만 공주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괜히 감정적으로 굴어선. ‘플레이어’ 주제에 아는 척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뒤늦게 치솟은 민망함에 눈을 내리깔았다.
“다음 삭월을 손꼽아 기다리게 생겼군.”
“소리도, 소리도 그거 보고 싶어! 소리는 기다리는 거 자신 있어. 공주님, 지금부터 같이 기다리자!”
“음, 좋은 동무도 있으니 더욱 기꺼운 기다림이 되겠어.”
공주가 발치를 구르는 도깨비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 앞에 있자니 어쩐지 표정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마른세수하자 뒤편에서 이강토가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죠. 이 주머니들은 뭡니까?”
“연유는 모르겠으나 나쁜 예감이 들어. 그러니 꼭 지니고 있게.”
내내 끄적이던 종이를 흰 주머니에 넣고 다시 여민 공주가 두 주머니를 모두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검은 비단 주머니에서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반면, 흰 주머니는 놀랍도록 가벼웠다.
“김 서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겠어?”
“전혀 모르겠습니다.”
“내 차차 알려 줄 테니 너무 서두르자 말아라. 우선, 검은 주머니 안에는 특별한 약이 들어 있단다.”
공주의 말에 의하면 약함에 든 약은 일흔일곱 개지만, 이는 모두 한 차례 선별된 것들. 정말로 특별한 효능을 가진 약은 왕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창고에 따로 보관된다고 했다.
“그걸 마마께서 어떻게…….”
“내가 이름보다 봄철 망아지로 많이 불리던 시절에 얻은 수확, 이라면 알겠나?”
왕의 창고를 털었단 소리를 저렇게 당당히 하다니. 이 여자 사전에 겁이란 단어가 없는 걸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과거를 말할 때 취한 태도를 보면 그런 건 아닌 듯했다. 다만 타고난 천성이 그보다 앞섰을 뿐이겠지.
어떤 효능을 가진 약인지는 공주도 모른다고 하나, 그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이템 정보를 열람하면 그만 아닌가.
당장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자는 이강토를 말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귀한 걸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
“내 그런 인사치레는 싫어한다지 않았는가. 되었네, 되었어.”
“그래도요.”
어디까지나 넘겨짚는 거지만 이 주머니 속의 약은 여러 가지 의미로 공주에게도 소중했을 것이다.
불안한 밤이나 위기의 순간에는 이것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리라는 안도감을 주었을 테고, 가슴이 답답한 날에는 자유로웠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으리라. 이리 귀한 것을 선뜻 내어주었으니 감사를 표해야 마땅했다.
‘주요 npc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는 편이 이득이기도 하고.’
이런 마음으로 고집스레 고개를 들지 않자 공주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에 귀염성 없기는. 그래, 알았다. 그 감사 받아들일 테니 그만 나를 보아라.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지 않더냐.”
천천히 얼굴을 들자 기다렸다는 듯 공주가 내 모자 위를 톡톡 두들겼다.
“그 검은 주머니는 언제든 열어도 좋다. 하지만 흰색은 지금 내가 일러주는 때가 아니면 절대로 열어선 아니 될 것이야.”
“적절한 때가 있단 말입니까?”
“말귀가 빨라서 좋구나. 본래는 너희에게 주어도 될 물건이 아니지만…….”
일정한 박자로 정수리를 도닥이던 손이 멈추었다. 동시에 나를 곧게 응시하던 공주의 시선이 자리를 옮겨 누각 너머, 궁궐을 두른 영월산으로 향하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말이야.”
“예감이라 하심은?”
“때론 무장의 감은 칼날보다도 예리하단다. 쉬이 무시했다간 탈을 입기 마련이지.”
한때 이 계층 최고의 무인이 되리라 점쳐졌던 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현장에서 갈고 닦은 육감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이미 잘 알고 있기에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내 그대들과 그리 긴 시간 보지 않았지만 이대로 궁을 나갈 위인들이 아니란 것은 알겠구나.”
“그건…….”
“질책하려는 것이 아니란다. 걱정이 되어서 그렇지.”
여태 내 머리 위에 있던 손이 흰색 주머니 위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삭월을 밝히는 등불 모양의 자수가 흉 많은 손 아래 모습을 감췄다.
“혹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주머니를 열어 보아라.”
“예? 위험이라니. 정확히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도 그 아이에게 받은 물건이라 정확히 일러주기가 어렵구나. 만일 정말로 그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면 알게 될 것이라고만 들었단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니 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공주가 더는 묻지 말라 눈빛으로 말했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기껏 호감을 산 npc를 언짢게 했다가 아이템을 도로 뺏기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너희가 무사히 궁을 나가게 된다면…….”
“된다면?”
“연생, 아니 백아의 가족들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했지. 혹 그들에게 이 흰 주머니를 전해 줄 수 있겠느냐? 내용물은 너희가 가져도 좋으니 주머니만큼은 전해 주려무나.”
공주가 제가 가진 유일한 유품이라며 씁쓸한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예, 꼭 그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