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84
제184화
44. 본색 (1)
“미안합니다. 제 오판이었어요.”
드물게도 창백한 낯을 한 최권영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평소라면 진귀한 장면이라며 이 장면을 똑똑히 담아 두려 노력했을 텐데. 오히려 지금은 속이 뒤집혔다.
“아.”
“이런. 저희는 몸이 곧 재산인데 조심하셔야죠.”
무의식적으로 세게 짓씹은 입술에서 비릿한 향이 났다. 입가로 손을 뻗으려던 최권영이 흐릿해진 제 팔을 보곤 행동을 멈췄다. 정체 모를 디버프는 어느새 그의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런 주제에 날 챙겨?’
알다가도 모를 사람. 피 맺힌 입술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러고도 난장이 된 마음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빠르게 기억을 되감았으나,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 눈을 접어 웃은 최권영이 슬며시 운을 띄웠다. 알고 있지만, 차마 나 혼자서는 결단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죠? 뭘 하셔야 하는지.”
“……싫습니다.”
“설마 절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영광인데.”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지금 그쪽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본인 일임에도 그는 전혀 심각한 일이 아니란 식의 태도였다.
“그걸 말이라고!”
울컥하는 심정이 목소리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게 퍽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상황에 맞지 않게 여유로운 낯을 한 최권영이 내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와중에도 그의 형상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필드, ‘산산조각(A~)’에 입장합니다.– 현재 입장 인원 : 2
※ 필드효과, ‘너와 나의 랑데부(A)’가 상시 발동 중입니다.]
처음 입장할 때 보았던 메시지를 흘려보낸 탓일까. 아니, 하지만 미지의 필드 효과는 필드 내부에서 파훼하는 게 정석이잖아. 다시 생각해 보아도 우린 최선을 택했다.
‘뭔가 잘못했다면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거야.’
얼기설기 불안하게 쌓인 자재 사이의 게이트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출입구가 분리된 필드라는 걸 알았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리는 폐허가 된 유원지를 빠져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도 각자의 능력과 경험을 백분 살려 어떻게든 길을 찾았고.
그러나 그사이, 은밀히 찾아온 디버프가 최권영의 목을 조였으니.
유난스러울 정도로 예민한 최권영의 육감조차 속인 디버프는 출구에 다다랐을 무렵, 이빨을 드러냈다. 멀쩡히 손에 들려 있던 권총이 바닥을 텅텅 나뒹굴던 때 얼마나 놀랐는지.
디버프, ‘꿈과 희망이 샘솟아’의 효과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통증은, 여전합니까?”
“유감스럽게도 네, 그래요. 버틸 만하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센 척하기는…….”
이 디버프는 존재를 지우는 과정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최권영도 내색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격통을 수반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거인이 몸을 구기는 듯한 느낌이라지. 간헐적으로 시야가 빙글빙글 돌기도 한단다. 여러모로 말랑말랑한 이름과는 전혀 다른 작태였다.
하지만 가장 악질적인 점은 따로 있었다.
보통 필드 내에서 발현한 디버프는 현실로 나가면 해제된다. 마침 출구도 코앞에 있으니, 우리는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필드 효과도 아니고, 디버프 주제에 너무하잖아.’
A급 필드란 점을 감안해도 과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파훼법이 뚜렷한데 이 디버프는 온통 불명, 불명, 불명뿐이니 속이 끓었다.
아마도 시전자는 이곳의 보스일 텐데. 등장도 전에 최권영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다니. 여간 까다로운 놈일 거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다시금 입술을 물려던 순간, 최권영이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있지 않은가. 체념하기엔 일렀다.
“아까 말씀하신 그건, 정말이죠? 필드가 공략되면 모든 게 되돌아간다는 그 조건이요.”
최권영은 디버프에 걸리며, 물음표투성이였던 필드 효과의 일부가 보이게 되었다고 말했다. 개중 우리에게 희소식이 될 만한 것도 있었고. 그러나 나는 그를 순순히 믿지 못했다.
“네, 제가 왜 그런 걸 가지고 거짓말하겠어요.”
그는 태연히 긍정했으나,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최권영은 저를 두고 나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거짓을 말할 사내였으니까. 그는 필요할 때 그 누구보다도 냉혹한 모습을 보였다. 그 대상이 설령 자기라 할지라도.
남의 눈치는 손톱만큼도 보지 않는 주제에, 눈치는 빠른 최권영은 기민하게 무표정 아래 숨은 망설임을 발견한 듯했다. 그는 우리가 데면데면했던 예전처럼 냉엄한 상사의 얼굴을 한 채 명령했다.
“가세요, 더 늦기 전에.”
“…….”
“윤가호 헌터.”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죠.”
결심한 뒤에도, 총도 쥐지 못하는 그에게 마수라도 접근한다면? 이 모든 게 필드 보스의 함정이라면? 따위의 나쁜 상상들은 떠날 줄 몰랐다.
두 눈을 꾹 감은 채 뒤를 돌았다. 그리고 힘겹게 걸음을 뗀 순간,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최권영이 제대로 설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몸이 반응하려 했으나, 단호한 목소리가 날 멈춰 세웠다.
“돌아보지 마세요.”
“……그렇지만.”
“히어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당신은 정말…….”
“근사한 조수라고요?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믿고 다녀오세요, 레이디.”
이런 순간에도 농이라니. 그답다면 그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덕분에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게이트를 향해 직진했다. 나를 지켜보고 있을 이에게 한 마디를 남기곤 그대로 마지막 한 걸음을 디뎠다.
“본분을 다하죠.”
***
범람이 일어난 다음에는 사실상 공략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무조건 잔여 시간 내에 해결을 봐야 한다.
– 잔여 시간 : 00:26:21
※ 필드에 머무는 시간에 비례하여 잔여 시간이 증가합니다.
※ 최초 입장 이후 게이트 위치가 고정됩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최권영이 내부에 진입했을 때에 비해 잔여 시간은 거의 줄지 않았다. 필드에 따라붙은 조건 덕분이었다.
‘안에서 못해도 20분은 있었던 것 같은데.’
즉, 필드 내부에 누군가가 들어가 있기만 하면 어떻게든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밖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만 않으면, 범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청신호라면 청신호였다.
“서두르자.”
얌전히 계단을 타고 내려갈 여유는 없다. 곧바로 맨몸으로 지상에 뛰어내렸다. 층고가 높은 3층 건물의 지붕이었으니만큼, 무릎 언저리가 시큰거렸으나 개의치 않고 정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화려한 오너먼트로 꾸며진 출입구를 지나치며, 착용했던 아이템을 모두 해제했다. 새까만 테크웨어가 순식간에 드레스 차림으로 변했다. 분하지만 지금은 C급 헌터인 윤가호보다 최권영의 파트너가 유리한 순간이었다.
슬릿이 터져 있음에도 치렁치렁한 드레스는 움직임에 제약을 줬다. 신경질적으로 치맛자락을 잡아 뜯고는 처음 나와 최권영이 입장한 창문 근처로 이동했다.
“이 부근이었지?”
2층과 달리 1층 창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러나 각성자에게 이런 잠금장치는 별다른 장애물이 못 된다. 쾅쾅! 두어 번의 발길질만으로도 창문은 쉽게 열렸다.
마수의 침입이라 생각했는지, 등장과 동시에 안쪽에서 칼날 여러 개가 날아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미리 켜 두었던 탐색자의 눈의 도움을 받아 공격을 피했으나, 가면의 깃털 몇 가닥이 잘려 허공에 흩날렸다.
뒤로 젖혔던 몸을 세웠을 무렵에는 모두가 나를 알아본 듯 노골적으로 떠들어 댔다. 위기감이라곤 모르는 이들이었다.
“어머, 저 사람은…….”
“최 길드장은 어디에 두고 혼자 왔대요?”
“파트너가 생각하기에도 범람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겠죠. 비위 좀 맞춰 주다가 여기로 도망친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뭔가 좀 바뀐 것 같지 않아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회장 내로 발을 딛자, 영양가 없는 쑥덕거림이 멈추었다. 탁, 탁. 단단한 굽 소리만이 울렸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길을 열어 주었다. 마치, 최권영이 등장했던 때 그러했던 것처럼.
길 끝에는 거만히 팔짱을 낀 오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걸친 채 나를 훑어보았다.
“이게 누구야. 최권영이네 아가씨 아닌가.”
“설명할 필요 없어서 좋군요.”
“쯧, 목석같은 아가씨로군. 최권영은 이렇게 애교도 없는 파트너를 왜 데려온 거지? 주제에도 안 맞는 자리에 왔으면 나긋나긋하기라도 해야지 않겠나. 우리 재이 양처럼 말이야.”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많았으나, 사감을 우선시할 때가 아니었다. 목 끝까지 치미는 말들을 애써 밀어 넣고 오해일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범람 직전의 필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최권영 길드장이 위험에 처했고요. 지원이 필요합니다.”
발언과 동시에 회장 내의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럴 만도 하지. S급 중에서도 강자로 칭해지는 최권영이니까. 오해일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는 좀처럼 내 말을 믿을 수 없는지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며 반문했다.
“뭐?”
“필드 유형은 레이드로 추정. 등급은 A급 이상에 제한 인원은 2인입니다. 특수한 디버프를 사용하는 보스가 있는 듯하니 해주 아이템, 혹은 스킬이 있는 헌터들을 우선적으로……. 윽,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예고도 없이 오해일이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나는 그대로 고꾸라질 듯 앞쪽으로 쏠린 자세로 질질 끌려갔다. 관중들은 이를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복병을 만났다. 쉽게 협조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오해일은 내 목걸이를 잡아끌며 무대로 올라갔다.
있는 힘껏 버텨봤지만, 등급 차를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신 나는 궁여지책으로 목걸이를 끊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바닥을 초라하게 나뒹구는 금속 조각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오해일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