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187
제187화
44. 본색 (4)
두 사람이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재이에게 듣긴 했지만 영 찝찝했다. 나를 추궁하던 중에 왜, 하필 임구영을 봤던 거지?
“설마…….”
이 모든 게 최권영을 궁지에 몰기 위해 세운 계략이었다면?
명분은 충분했다. 헌터계에 뛰어들며, 가업에 손을 뗐다고 하나 임구영에게 최권영은 눈엣가시였겠지. 최권영 때문에 톡톡히 망신을 당했던 오해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이유에서라면 오해일의 난폭한 행동도 설명된다. 경쟁 길드 중 하나인 황야를 치워 버릴 수 있다면 평판쯤이야 감수할 만했다. 시선을 주목시키며 알리바이까지 확보했으니 그에겐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으리라.
‘더군다나 임구영은 주최 측과 깊은 연관이 있어.’
알아볼 필요가 있었지만, 위치가 수시로 변하는 게이트의 존재를 알게 된 임구영이 이 저택에서 경매가 열리게끔 유도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파를 얻은 뒤로 최권영이 퍼펙트핸즈의 경매에 개근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말도 안 되는 가정의 연속이었으나 곱씹을수록 스스로에게 설득되었다. 이런 것도 헌터의 직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답이 어떻든 이대로 그냥 넘겨선 안 되는 일이란 건 분명했다.
‘정말이라면 그야말로 인간 말종들이잖아.’
일부러 범람 직전까지 게이트를 방치하다니. 무고한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현상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을 수없이 보아 온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자들이었다.
“윤가호 헌터! 그리고 다들 여기 좀 와 보세요!”
스멀스멀 분노가 올라오려던 찰나, 게이트 앞을 지키던 헌터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무슨 일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기랄, 무슨 일이지? 황급히 게이트로 달려갔다.
“이거, 제가 생각하는 그 뜻 맞나요?”
“……!”
믿기 힘든 광경에 두 눈을 비볐으나, 시스템 창은 변하지 않았다. 강설과 노원영이 입장하며 느리게 줄어들었던 잔여 시간이 가파르게 깎이고 있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하나.
“두 사람이 벌써 공략에 실패했다고?”
정체불명의 디버프를 제외하면, 산산조각은 등급에 비해 평이한 수준의 필드였다. 최권영만 해도 C급인 나를 데리고 별 어려움 없이 움직였지 않은가. A급이지만, 범용성이 뛰어난 스킬을 가진 강설이 이렇게 빠르게 실패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다른 헌터들 역시 비슷한 견해인 듯했다. 모두가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는 와중, 두 번째 순서를 자처했던 파티의 일원들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특수한 조건이 있는 것 같은데…….”
“노원영 헌터도 활빈에서 손에 꼽는 귀중한 인력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하고 동반한 파티원들은 적어도 반 등급 이상은 강해진다죠. 본인의 무력도 절대 약하지 않고요.”
“이거,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이 둘의 말대로라면, 앞서 들어간 파티는 S급 2명에는 못 미치더라도 동급의 파티보다는 훨씬 강하다는 건데. 순식간에 바닥을 친 전의를 어떻게 끌어 올려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이내 내게 질문을 던졌던 헌터들이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아, 네. 힘을 보태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저희도 계산 없이 나선 거 아니니까 감사할 거 없어요. 아까 말하는 거 보니까 경력은 좀 되는 것 같던데. 알잖아요, 저희 업계 어떤지.”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다. 어차피 범람이 일어나면, 이 자리에 있는 헌터 전원이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인명이 걸린 문제이니만큼 각성자 관련 법규는 여타 법률보다 가혹하게 적용되니까.
‘좋은 PR 기회이기도 하지.’
그 최권영도 공략하지 못한 필드를 성공적으로 파훼한 파티! 누구든 탐낼 만한 칭호였다. 평판이 곧 수익으로 연결되는 이 업계이기에 더더욱. 개인적으로도 빚을 지울 기회기도 하고.
“그래도요. 선뜻 나서기 힘든 일 아닙니까.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알겠어요. 자진해서 뛰어든 일이니만큼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둘 중 키가 큰 쪽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돌연 내게 성큼 다가섰다. 당황하여 뒤로 물러나려는데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일견 거칠어 보이는 동작이었으나, 가죽 장갑을 낀 손에는 그리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특이점 있으면 연락할게요.”
[플레이어 ‘차시우’님의 연락처를 등록합니다.]가까이서 보니 콧등을 찡그리며 웃는 얼굴이 상당히 앳되었다. 키와 골격이 좋아 가려졌을 뿐, 많아 봤자 스물 언저리로 보였다.
‘그나저나 왠지 낯이 익은데.’
미소를 지우곤 게이트를 향해 돌아서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니 자꾸만 기시감이 들었다. 무표정일 때의 저 얼굴, 분명 누굴 닮았는데…….
“아, 차세나 헌터!”
아흔아홉 갈래 굴에서 처음 만나, 현재는 태양이를 가르치고 있는 차세나. 시큰둥하다 못해 비관적으로 보이는 그와는 너무나 달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A급 필드에 선뜻 자원한 걸 보면, 저 남자도 상당히 등급이 높을 텐데. 그렇다면 분명 타워즈닷컴에 정보가 있을 것이다.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두 사람이 남매라는 기사가 나왔다.
뒤늦게 신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이 터울 나는 동생이 있다더니. 그게 차시우였나. 놀라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 남매라. 거기다 셋이 헌터…….”
별달리 할 일도 없어 기사를 정독하다가 혀를 내둘렀다. 차시우 위에는 여자 형제가 셋 있는데 차세나 말고도 각성자가 있단다. 장녀인 차하나 역시 이현상 관리국 소속의 헌터로 일하고 있다는 문구를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정말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유전자네.”
“아, 그거 차시우 헌터 얘기하시는 거죠? 유명해요, 그 집. 사실 둘째 딸도 각성자인데 아닌 척하고 있단 말까지 있다니까요.”
내 근처에 앉아 있던 헌터가 말을 얹었다. 그의 말을 따르면,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를 바 없는 소문이란다. 하기야 남매 넷이 모두 목숨을 걸고 일하는 건 좀 그렇지. C급 미만이라면 각성자라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등급은 차치하고서라도 정말 대단한 집안이었다. 각성자가 되는 조건에 대해선 아직 밝혀진 게 없었으나 이 집안만 보면 유전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태양도 차 씨라서 그런 건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뭐, 차태양은 도깨비의 보살핌 아래 자랐으니 그 집안과는 관계가 없겠다만.
“……그러고 보니 왜 차 씨인 거지?”
소리의 증언에 따르면, 차태양은 갓난아기일 때부터 도깨비들과 함께 생활했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는 있겠으나 도깨비들의 발상력이라면 차 씨가 아니라 김 씨가 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나? 말끝마다 김 서방 타령인 도깨비답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건가.”
많고 많은 성씨 중 흔치도 않은 차 씨라니.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하다가 이내 모두 그만두었다. 어떤 출생의 비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상황은 긴박한데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생각이 자꾸 괜한 곳으로 튀었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회장이나 둘러보고 오자. 오해일이 이상한 짓을 벌이지 않는지도 좀 살피고. 헌터들에게 대강 설명한 뒤, 지붕을 내려왔다.
뛰는 것과 걷는 것의 중간 속도로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내내 얌전히 있던 녀석이 퐁 튀어나왔다.
– 큐!
“넌 또 왜…….”
환영의 말이 아님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신나게 재주를 넘은 고래는 어딘가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머리를 짚은 채 해랑을 쫓아갔다. 오늘따라 기운이 넘치는 녀석은 낯선 저택을 제집처럼 누볐다.
나름대로 위협적인 표정을 지은 고래가 구석의 액자를 향해 돌진했다. 탐색자의 눈을 켜자, 액자 틀을 느릿하게 걷는 수정뿔벌레가 보였다.
키약! 마수는 나름대로 저항했으나 해랑의 식탐을 이길 순 없었다. 승리를 쟁취한 해랑이 의기양양하게 꼬리를 흔들며 입을 우물댔다.
– 큐우우, 큐!
그래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데. 새삼 녀석이 나보다 등급이 높다는 걸 실감했다. ……나한텐 온순한 놈이라서 다행이야, 정말.
해랑을 놓고 갈 순 없는 노릇이니 천상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왔던 길을 복기했다.
“대충 기억이 나긴 하는데…….”
모퉁이를 몇 개나 돌아 도착한 이 복도는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어설픈 기억에 의존해 저택을 헤매기보단 밖으로 나가 회장을 찾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근처에는 내가 지나갈 만큼 커다란 창문이 없었다.
“뭐, 설마하니 방에도 창문이 없겠냐만.”
해랑과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근처를 살피려던 그때, 갑자기 들린 의문의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조명이 꺼진 복도 저 너머가 발원지였다.
“분명 약속하시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조금 더 자세히 들렸다. 누군가의 대화 소리였다. 추측하건대 남성이었다. 본능과도 같은 이끌림에 기척을 지우고 복도 안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걸음을 내디딜수록 목소리는 점점 선명해졌다. 복도 끝에 걸린 커다란 그림 앞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그 주인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오해일!’
아직 내용 전부가 또렷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그림 뒤에 비밀 공간이 있는 듯했다. 그는 무슨 주장이라도 하는 것인지 잔뜩 흥분하여 연이어 큰 소리를 냈다. 덕분에 내가 여길 알아차렸고.
좀 더 자세히 대화를 듣기 위해 그림에 귀를 가져다 대다, 무언가와 눈이 마주쳐 소스라치게 놀랐다.
“……!”
자칫 소리를 낼 뻔한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그림 속, 목이 잘린 사내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꼭 현실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했다. 저택의 우아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잔혹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 일이었다.
원인은 탐색자의 눈. 무언가 장치가 있는지 사내의 눈언저리가 불그스름하게 번들거렸는데 그것 때문에 꼭 진짜 사람처럼 보였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 언저리를 꾹 눌렀다. 거칠어지려는 숨소리도 애써 다잡았다. 그러고는 다시금 조심스레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징, 징! 무정한 헌터워치가 연달아 진동음을 냈다. 액정에 차시우의 이름이 반짝였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단숨에 인기척을 알아차린 오해일이 고성을 냈기 때문이다.
“어떤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