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oved to the SSS-class production industry RAW novel - Chapter 295
제295화
68. 희붐 (3)
“네가 헤쳐 온 이야기들을 엮어 보았다.”
뒷장의 글씨들은 평범한 잉크로 적혀 있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칼로스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나는 천천히 종이 아랫단에 적힌 어귀들을 읽었다.
“겁이 나고, 도망가고 싶을 수도 있어. 이해한다. 나 역시도 처음 모루 앞에 설 때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괜찮을 거다.”
나의 제자는 부러지지 않을 테니까.
차마 마지막 문장은 소리 내어 발음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속으로 되뇌며 닿지 못할 인사를 남겼을 뿐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용기가 생겼어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비로소 선명해졌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일단 설명부터 해 줘야겠다. 완성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나조차도 쉽게 짐작이 가지 않으니까. 또 모두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내내 조용히 기다려 준 한차현에게도 보이게끔 편지를 이불 위에 내려놓았다. 한차현은 의문을 표하면서 얌전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동자가 옅게 떨리며 동요를 드러냈다.
그도 그럴 만하지. 그에게 보여 준 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빈 종이네요?”
“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잖아요. 여기 두 줄을 제외하고요. 이번에도 그 눈을 사용하신 건가요?”
“……눈? 아, 그래서인가.”
쓰러지기 직전 발동하고 있었던 ‘탐색자의 눈’이 아직도 그대로 켜져 있었구나.
‘하기야. 그러니 마력으로 쓰인 글씨가 보였겠지.’
반대로 말하자면, 마력을 보지 못하는 한차현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나는 공연히 멋쩍어져 뺨을 긁적이며 그에게 사과를 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깜박했네요. 당연히 한차현 헌터께도 보이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사과하실 것까지 있나요. 막 일어나셨으니 경황이 없으셨겠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그러면 보여 드리는 대신 그냥 말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무언가 있다는 건 아시겠나요?”
이런 방면에서 감각이 예민한 이답게 한차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나는 간단히 한차현에게 잉크 대신 마력을 사용한 편지라고 알려 주며 두 번째 장의 윗단을 가리켰다.
“제게 육성으로 전하고 싶은 말도 있으셨겠지만……, 마력으로 편지를 남기신 것은 무엇보다 이 부분을 위한 안배 같습니다.”
“그 부분에는 뭔가 다른 점이 있나 보죠?”
“예, 완전히.”
얼른 알려 달라는 듯 한차현이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있을 때만 그가 보이곤 하는 달뜬 표정 역시 함께였다. 왜인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제76계층의 열쇠. 여기 그려진 것은 그 열쇠의 설계도입니다.”
뜬금없이 주제가 널뛰니 한차현은 드물게도 곧바로 말뜻을 잡아내지 못했다. 잠시간 눈만 깜박이던 그가 훅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열쇠라 하심은 L급 아이템의……?”
“네, 맞습니다. 저희의 원래 목적이었던 그 물건이요.”
“맙소사. 이런 대단한 물건을 코앞에 두고 제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군요.”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의 표정이며 눈빛에 시무룩한 기색이 가득했다. 점잖은 사람이 얼마나 아쉬웠으면 그럴까 싶어 손끝으로 칼로스의 식을 더듬으며 구조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애당초 스승님께서 다섯 개의 재료가 필요하다고 하신 만큼 제작에는 총 다섯 곳의 중심축이 있습니다. 외곽을 따라가면, 이런 형태요.”
“좀 의외네요. 다섯이래서 오각형일 줄로만 알았는데 정방형이라니.”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힘을 균일하게 분산하려면, 한차현이 말한 대로 오각형 구조가 나은데. 칼로스는 굳이 마름모꼴의 가운데에 축 하나가 박힌 특이한 형태로 회로를 구성했다.
‘뭐, 스승님이 괜히 이랬겠냐만.’
나보다 훨씬 아는 것도, 경험한 것도 많은 장인이 아닌가. 꼼꼼하긴 또 얼마나 꼼꼼한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의 계산이 들어간 설계임이 분명했다.
“아마도 스승님은 제가 당신의 뒤를 이어, 이 아이템을 완성하길 바라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76층에 가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세계는 아마도 이 괴상한 탑을 일컫는 표현이리라. 그리고 이 탑의 끝으로 가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높이, 더 높이 오르는 것. 나는 언젠가부터 그를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만큼은 이것이 합당한 방법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제77계층, ‘종말과 시작.’ 그곳이 과연 우리에게도 종말이, 그리고 시작이 될지는 문을 열어 봐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스승님의 설계도를 구현해야 하고.’
회로를 복원하는 작업은 물론이오, 멋대로 수정하는 것까지 이미 여려 차례 해 본 만큼, 구현 자체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한차현에게도 상황을 인지시켜 주기 위해 12시부터 시계 방향으로 세 꼭짓점을 쿡쿡 찔렀다.
“여기부터 차례로 바다꽃, 번옥, 그리고 심연의 염료의 식입니다.”
“축은 총 다섯 개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게 문제입니다.”
“……?”
“나머지 두 군데가 좀 이상해요.”
각각 9시와 가운데 위치한 축의 자리에 양손을 짚었다.
“어찌 됐든 이 회로는 다섯 개의 재료가 모두 있어야 굴러가게끔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무슨 수를 써도 제작에 실패할 거예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모은 재료는 셋뿐. 칼로스 역시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왼손을 짚은 9시 부근에 축을 지탱하는 식이 채워져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전혀 본 적 없는 것이. 보자마자 축의 재료가 짐작 갔던 다른 세 꼭짓점과는 달랐다.
“차라리 양쪽 다 공란이면, 그래서 비워 놓았구나 싶을 텐데.”
“아, 맞다. 전달한다는 것을 그만.”
“네? 뭘요?”
“공란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다른 쪽이라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네요.”
조금 전과는 전세가 역전되어 깜박깜박 눈꺼풀을 팔랑이는 나를 보며 한차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이어 인벤토리에서 처음 보는 아이템을 꺼냈다.
“도깨비들의 왕이 가호 씨에게 선물한 물건이에요.”
“연각이, 제게요?”
“모두를 오랜 세월 지켜 준 가족이니, 소중히 다뤄 달라는 말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곱게 모아 내밀었다. 비단 한차현의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유례를 듣지 못했더라도 그랬으리라. 그가 들고 있는 물건에서는 그만큼 맑고 영험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나무를 깎아 만든 투박한 새 모형이 내 손바닥 위에 얹어짐과 동시에 정보 창이 떠올랐다.
[특수 아이템, 하늘나래(?)“옛날,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 우리를 친히 굽어살피시니.”
– 도깨비들의 터전을 선포하는 신령한 솟대
– ■■으로 온전한 형태를 잃었으나, ‘왕’의 간섭으로 신통력이 보존되었다.]
분명 무생물일 텐데. 신기하게도 양손을 오므려 모형을 감싸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태양이를 끌어안을 때면 맡을 수 있었던 상쾌한 숲의 향기도 은근히 코끝을 스쳤다.
‘오염 때문에 아이템이 된 것인가.’
옛날부터 지니고 있었던 물건이라고 하니, 탑에서 나온 아이템은 아닐 것이다. 다만, 도깨비들이 마수로 변했듯 오염당했을 뿐이다.
그 때문인지 등급이 불명이었지만, 나는 이것이 L급 아이템 제작에 적합한 재료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아이템들에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독보적인 힘이 느껴졌으니까.
“연각에게 감사를 표하러 가야겠군요.”
“분명 기뻐할 겁니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제안이 입 밖으로 나왔다. 뒤늦게 혼자 가면 도깨비들을 상대할 것이 걱정이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냐 등 사족을 덧붙였지만 내가 보기에도 얄팍한 핑계였다.
‘아, 왜 갑자기 저런 말이 나온 거야. 곤란해하시잖아.’
평소라면 말주변 없는 나를 배려해 냉큼 답했을 한차현은 무언가를 유추하듯 가만히 날 응시하기만 했다. 표정 또한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오묘했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괜찮습니다. 아니, 그보다 좋아요. 가호 씨랑 같이 갈 기회를 제가 싫어할 리 없잖아요?”
정말로 후회하기 직전, 한차현이 긍정의 말을 뱉었다. 억지로 부탁을 들어주는 눈치는 아닌데. 둥글게 휜 눈매가 왜인지 날 놀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한차현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 한차현이 이를 타파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보다 못한 내가 원래의 화제로 대화를 돌려놓았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서두에 한차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찌 됐든, 좋습니다. 저도 좋아요.”
“정말요? 저와 같은 의미로?”
“……한차현 헌터.”
“네, 죄송해요. 불편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분명히 열이 올랐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 감췄다. 붉은 기가 가셨겠지 싶을 무렵, 손을 내려 편지 가운데에 얹었다.
“자, 이제 여기 남은 하나가 문제인데.”
S급 재료 아이템을 대체 어디서 구한담? 스승님이 만들어 둔 아이템이라도 분해해 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그리운 음성이 나를 불렀다.
[가호, 그럴 땐 날 불러야지!]“칼리아?”
나의 또 다른 스승은 대답 대신 자신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음, 아니 정정한다. 칼리아는 나와 한차현을 강제로 제 게이트 안으로 쑤셔 넣었다. 다정하나 제멋대로인 강압에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킥킥 웃음 지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