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Obtained a Mythic Item RAW novel - Chapter 303
303화 눈 속에서 피는 꽃(3)
“왔냐?”
김유정의 두 뺨에 걸린 홍조가 달빛에 도드라졌다.
그녀 본인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아마 다른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김유정이 재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현은 괜히 짓궂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가 물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 나 기다리기라도 했어?”
“어. 기다렸는데?”
김유정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마치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연습한 것처럼.
참고로, 그녀는 재현과 마찬가지로 병원복을 입고 있었다.
시그룬과의 전투 당시.
그녀는 소울 링크라는 고유 스킬을 발동해 스스로를 희생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그녀의 심장은 어떤 경위에서든 한 번은 멈췄던 것이었다. 가장 큰 상처를 입었고, 가장 많이 아팠을 테지.
재현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 속, 그녀의 희생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김유정은 여느 때처럼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훈련 갔다 오는 길이야? 완전 부지런하네. 회복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해야 할 게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너도 그렇게 있지 말고 들어가서 일찍 자. 겨울 밤공기 차가워.”
재현은 적당히 답한 뒤, 그녀를 지나쳐 그대로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뒤편의 김유정이 장난기 있는 얼굴로 재현의 허리를 감싸 안은 것은.
“야, 간만에 봤는데. 그러고 가는 게 어딨어? 매정하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이곳 병원은 남녀병동이 확실히 구분돼 있으니까.
서로 가끔 얼굴을 본 적은 있긴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화한 적은 거의 없었지 아마.
재현이 김유정을 떼어놓으려,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목을 잡았다.
사실 재현은 꽤 지쳐 있었기에, 어서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야위었어.’
김유정의 야윈 손목을 만져보았을 때. 그는 이번만큼은 그녀의 장난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다 이렇게 된 아이였다.
그것도 정신적으로 열 살이나 덜 성숙한, 열일곱의 아이가.
그래서.
“…뭐가?”
재현은 억지로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자아내며 그렇게 물었다.
김유정이 투명하게 웃으며 답했다.
“잠깐 앉았다가 가자. 저쪽에 벤치 있더라. 별도 잘 보인다던데.”
“…알았어. 가자.”
재현은 그녀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정이 은근히 옆에 붙어오며 생글 웃었다. 재현은 프리지아 꽃향기가 풍기는 그녀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역시 이 꽃을 좋아하는 거구나.
실없이 재현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잠시 떠돌다 사라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병원의 고적한 벤치에 앉아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도 없구만.”
먼저 산통을 깬 것은 재현이었다. 김유정이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 어라? 이럴 리가 없는데….”
김유정이 말끝을 흐리자, 재현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하기는. 알고 있었어. 별 하나도 안 보이는 거. 이런 도시에 무슨 별이냐.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김유정이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병원 슬리퍼를 신은 발 안쪽과 발 안쪽을 부딪치게 하거나, 가지런히 모은 손에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가 하거나, 고개를 좌우로 젖히는 것 등이었다.
재현은 그녀의 버릇을 모두 알고 있었다.
참고로, 저건 긴장했다는 의미였다.
허나, 재현은 처음과 같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네가 나한테 왜 미안해.”
“내가 너한테 또 상처를 줄 뻔했잖아. 두 번이나 친구를 잃을 뻔하게 해서 미안해. 그… 혼날 각오도 이미 하고 왔으니까. 최대한 살살 좀 해줘라.”
김유정은 진심으로 재현에게 미움받는 게 싫다는 듯, 그렇게 말해왔다. 그녀의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재현은 그녀의 시선을 잠시 피해 벤치에 등을 기댔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그가 손을 얼굴에 얹은 채 잠시 머리를 쓸어올렸다.
“꼭 지키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 해서 미안해.”
“넌 최선을 다했잖아. 물론 처음에는 우릴 속인 게 좀 속상하긴 했지만… 내 미래가 없다는 걸 내가 알게 됐을 때, 네가 나한테 말해 줬잖아. 제발, 살아 달라고.”
“그랬…지.”
재현은 괜히 감정이 북받쳤던 그때가 생각나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때, 김유정이 헤실거리며 웃으며 재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느긋이.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온 것처럼 보였다.
“야. 뭐 해.”
“한 가지만 물어도 돼?”
점점 김유정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재현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김유정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벤치에 등을 기댄 재현의 위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머리가 재현보다 위에 오게 되었다.
재현은 졸지에 자신을 내려다보는 김유정의 두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김유정은 확인받듯 물었다.
“나는 너한테 소중한 친구지?”
“당연하지. 오글거리게 그런 건 또 왜 물어?”
“친구끼리는 보통 장난도 치는 게 당연하고?”
“이때까지 너나 나나 서로 실컷 괴롭히면서 컸잖아. 새삼스럽게 그런 건 왜 묻는 거….”
김유정이 그 순간, 재현의 양팔을 당겨오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단단히 붙잡은 손.
냉병기를 쥐며 굳은살이 박여 굵어진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손에 닿았다.
새하얀 달빛이 김유정의 미소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병원 공원 벤치에 잠시간의 침묵이 머문다.
김유정이 부서질 듯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럼, 이 정도 장난은… 괜찮은 거겠지?”
“…오늘은.”
재현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내민 손을 힘을 주어 더 꽉 잡아주었다.
다시 잃지 않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또 믿음이 담긴 행동이었다.
재현은 다시 한번 확실히 힘주어 이었다.
“오늘은 봐 줄게.”
그 말에도 어째서일까, 헤실거리며 웃는 김유정의 모습. 재현은 이를 지켜보며 괜스레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 * *
전 세계적인 유례없는 폭설은 계속해 이어지고 있다.
라그나로크의 시작 이후, 또 핌불베르트가 시작된 이후.
세계는 완연한 백색으로 물들었다.
유럽에도, 아시아에도, 아프리카에도.
사막지대까지 눈이 내렸다.
그야말로, 재앙의 도래였다.
재현이 헬의 신전을 다녀온 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약 6개월의 시간. 그동안 재현은 재활을 완벽히 마쳤으며, 김유정 역시 부지런히 회복해 병원 신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드디어 서클 나인이 세간에 다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쉬게 하고 싶은데….”
뒷자리에 함께 살을 부대끼며 앉은 성인 여성이 말해왔다.
유성은, 연화의 길드 마스터였다.
재현이 멋쩍게 웃었다.
“아뇨. 괜찮아요. 사실 이 정도도 늦은 거예요. 좀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는데… 금제를 다루는 게 생각보다 익숙지 않아서 시간이 좀 더 걸렸네요.”
재현은 그간 병원에서 많은 연구과 고민의 반복을 거쳤다.
덕분에 병원의 훈련장에 준비돼 있던 마도구들이 죄다 박살이 나버렸다.
모르긴 해도, 피해 추산액은 적어도 수천억이 넘어가겠지.
하지만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이제 세계는 재현의 존재.
즉, 검은 로브와 대적자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속되는 겨울을 비롯한 갖은 이상 현상들이 그의 존재를 긍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등장하는 게이트의 마수 등급이 급작스럽게 상승한다거나. 고대 유적이 등장하거나. 거인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벽화가 발견된다거나.
종말을 상징하는 징조는 수도 없이 등장했다. 지금도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딱 죽기 좋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다.
덕분에 재현에게 전 세계적인 지원이 오기 시작했다.
그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모든 게 박살 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 둔 거니?”
유성은의 물음이었다. 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일단은….”
“하하! 어련히 재현 군이 알아서 잘하시겠죠. 걱정도 많으십니다. 그리고…
사실 따지면 저보다도 형님인 분 아닙니까? 제가 스물여섯인데, 재현 군이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한 거라면… 살아온 날짜로 따지면 제가 동생이니까요.”
운전하던 박성재의 끼어드는 말에, 유성은과 재현이 기겁했다.
그 액면가를 갖고 있으면서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감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
“…….”
“어라?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지….”
한편, 박성재는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되뇌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뒤에 타고 있던 재현의 동료들이 속닥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재현이한테 형이라고는 못 하겠다… 매니저님도 심하시지. 얼굴을 봐. 액면가를 생각하면 절대….”
“그런 말 하면 못쓴다. 너도 빨리 늙고 싶어?”
“왜 그래도 그 나이대로는 보이는….”
“너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냐?”
“크흑….”
거의 동시에 앞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편에서는 제 딴에 조용히 말한다고 했는데, 이야기가 그에게 모두 들렸던 것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암살자 클래스에 속해 있는 무투계 레이더 박성재다.
다른 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그리 고상한 취미가 아니긴 하지만… 상시 스킬 발동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귀에 들려오는 것이다!
어쨌거나.
박성재는 빠르게 운전을 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기자들이 사방으로 쫙 깔려 있어 인원의 통제가 어려웠다.
“밀레스 아카데미… 그때 이후로는 처음이네.”
재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슬 준비를 마쳤다.
여기서 그는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유성은이 차량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그럼, 오늘 잘해. 항상 연화가 네 편이라는 거 잊지 말고.”
“물론이죠.”
재현은 그렇게 말하며 동료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검은 밴을 지나치자, 수많은 플래시가 재현을 잡아먹을 듯 터져 나왔다.
동료들은 한껏 겁을 집어먹은 채였으나, 재현에게 그런 감정 따윈 전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액티브 스킬 《냉혈한》을 발동합니다.
그에게는 치트키가 있었으니까.
* * *
‘약간 부담이 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한 번은 내 모습을 세계에 공개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지금이 그 적기야.’
재현이 숨을 고르며 뒤편의 대기실로 향했다.
지금 참석한 행사.
여기서 몇 가지 중대 사안이 결정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북유럽 신화의 신들이 실재하며, 그들이 인류에 재앙을 몰고 올 거라는 소식이 퍼져나가는 지금은 더더욱 빠른 판단이 필요했다.
또한,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대적자. 재현이 있었다.
덕분에 재현은 퇴원 이후 즉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간에는 지금도 대적자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무수한 소문의 진상은 대체 무엇인가?
당시와 같은 치열한 싸움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인가?
신의 힘은 대체 어디까지이며, 그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대적자 하나뿐인가?
그 모든 것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애초에 세계 레이더 연합과 본부조차도 손을 댈 수 없는 수준의 싸움이 아니었던가.
사실 그 이후, 전투에 관한 조금씩 조사가 이뤄지고 있긴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대체 어떤 S급 레이더가 아크 메탈을 두부 썰 듯 할 수 있을까. 그건 유럽 연합의 수장인 발락이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나, 적은 가능했다. 발키리, 시그룬이라 불리는 여자는 이를 아주 쉽게 해낸 것이다.
또한, 진정한 문제는 그녀가 신조차 아니라는 것에 있다.
더욱 큰 문제가 남아있을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생방송을 시청 중이던 모든 사람이, 포기하고 절망하던 그때.
민재현, 대적자가 등장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발키리들의 군대를 쓸어버리고, 그들에게 닿았다.
다른 S급 레이더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그 소문의 대적자가 모습을 드러낸 거고.
“그럼 지금부터 세계 레이더 연합이 주최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촤촤촤촤촤!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야외 강당의 사방에서 정신없이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이번 기사가 특종이 될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참고로 지금 마이크를 쥔 사람은 세계 레이더 연합의 수장인 리처드였다.
대한민국에서 운영하는 국가 단체와는 또 한차례 규모를 달리하는. 각국 유수의 레이더가 소속된 연합 본부의 수장이, 직접 한국으로 온 것이다.
대적자,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재앙 라그나로크에 관한 이야기를 위해서.
“저와 세계 레이더 연합에 많은 궁금증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그렇게 운을 떼며 이었다.
“지금부터 저희 본부는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알게 된 모든 사실을 차근차근 밝혀낼 것을 확실히 약속드립니다. 허나.”
…하지만 그 앞에.
“그전에, 작은 수여식부터 진행하겠습니다. 저희 세계 레이더 관리 본부에서는 민재현 레이더와 그 동료들이 S급, 그 위의 경지를 개척했다고 판단.
그 위에 새로운 등급을 신설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재현은 리처드의 발표를 지켜보며 팔짱을 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계속 유지되었던 최고 등급 S급.
그 아래로 A, B, C, D…
이번 발표는 레이더계의 등급.
그 근간을 모두 뒤엎는 내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