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22
흔히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정석 플래그를 생각하면 답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모르는 척 얌전히 있어.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남자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말이지. 에밀리나는 울고 싶어졌다.
저게 안심하라고 해 주는 말일까? 아니라는 것에 손목을 걸고 싶을 지경이었다.
의도치 않더라도 겁을 주기 위한 경고라면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안심은커녕 더욱 불안해지기만 했으니까.
에밀리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최후의 도박을 걸어 보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동정심을 자극할 수밖에.
“저기요 아저씨.”
막 걸음을 떼려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에밀리나를 바라봤다.
“저 이제 겨우 14년 살았어요.”
“그래서.”
“그래서라니요! 저처럼 예쁘고 재능 많은 소녀는 장래가 아주 유망하다고요.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에밀리나가 최대한 몸을 낮춰 그렇게 물었다.
올망올망한 눈동자로 남자를 올려다보는 게 포인트였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는지 남자가 무심히 말했다.
“예쁜진 모르겠는데.”
빠직.
에밀리나의 이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가 생겼다.
남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지막 경고다. 얌전히 있어.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불쌍하지 않으면 않는 거지, 그게 그렇게 협박까지 할 일이야?
에밀리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하는 거지?”
낯선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재수 없게 잘생긴 사내가 보였다.
상관인 모양인지 남자는 잔뜩 경직된 채였다.
에밀리나는 눈썰미로 저 사내가 이 납치를 꾸민 주범임을 눈치챘다.
그리고 예상대로 에밀리나를 납치하라 시킨 건 라울 그가 맞았다.
* * *
라울이 팔짱을 풀고서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러자 눈앞의 남자는 빠르게 움직여 그의 뒤에 섰다.
라울이 에밀리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킥 웃었다.
누가 봐도 비웃음 가득한 웃음이었다.
“이야─ 조금 실망인걸. 지금까지 이런 볼품없는 계집이랑 어울렸단 말이야?”
보는 눈이 너무 없는데?
라울이 특유의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그게 굉장히 기분 나쁜 말투여서 에밀리나는 발끈했다.
“지금 말 다 했어요? 전 아직 창창한 성장기라고요! 두고 보세요, 아주 훌륭히 성장할 테니까.”
에밀리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라울을 노려봤다.
라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넌 오늘 여기서 죽을 건데.”
라울이 당연한 얼굴로 죽음을 입에 올렸다.
그 뻔뻔한 태도에 에밀리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이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그는 자신을 납치한 범죄자였고, 에밀리나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라울이 에밀리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흠칫.
시선이 마주치자 에밀리나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라울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걸었다.
“근데 너. 꽤 침착하네. 이런 일 많이 겪었나 봐? 아니면 그놈 때문인가─”
“그놈이 누군데요……?”
“궁금해?”
라울이 그렇게 말하며 싱긋 미소 지었다.
에밀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기분 나쁜 미소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그게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인지 라울이 쭈그려 앉아 정색했다.
“아가씨, 대답해야지?”
“벼, 별로 안 궁금한데요. 알게 되면 죽일 거잖아요.”
“푸핫! 이거 진짜 웃기는 아가씨네. 어차피 내 선택지엔 안 죽인다는 건 없어.”
라울이 정말 웃긴다는 듯 킬킬거렸다.
종잡을 수 없는 태도라 에밀리나는 그를 미친놈처럼 쳐다봤다.
라울이 싱글벙글 웃으며 선심 쓰듯 설명했다.
“좋아. 마음에 들었어. 특별히 알려 줄게. 너랑 같이 사는 놈, 그거 내 사냥감이야. 그리고 넌 그놈이 물러 오는 미끼지.”
라울이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한껏 비틀었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히죽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게 너무 소름 끼쳐 에밀리나는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그리고…… 조금 전 들었던 대화가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납치범의 목적이 키르라니…….’
왜 키르를 노리는 거지? 그 어린애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그것도 번거롭게 자신까지 납치하면서.
에밀리나는 수많은 의문을 떠올렸지만 곧바로 답을 찾을 순 없었다.
그러나 라울의 의도가 불순한 만큼 좋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그 순간 에밀리나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키르가 고양이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반인 반수. 키르는 특별하다 할 수 있는 수인족이었다.
고약한 취미를 가진 귀족 사이에서는 탐낼 만한 상품일 수 있었다.
라울은 그런 인외 종족을 사냥하는 사냥꾼일지 몰랐고.
‘일리가 있어.’
더구나 며칠 전. 키르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불행의 원흉이라며 쫓아오는 사람이 있었거든.”
쫓아오는 사람. 에밀리나는 그게 라울이 아닐까 의심했다.
아니. 라울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이유가 없을 테니까.
에밀리나는 기가 차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모르는 속사정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납치극을 벌인 건 변함없었다.
키르에게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한 그한테 화가 났다.
‘그 작은 몸에 해칠 곳이 어디 있다고!’
에밀리나의 녹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자신이 키르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정말 죽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기에 적의가 치솟았다.
에밀리나는 분노에 차 일갈하듯 내뱉었다.
“쓰레기 자식. 할 짓이 그렇게 없어요?”
“흠?”
라울이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하지만 둥글게 휘어진 눈매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에밀리나는 기죽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힘없는 어린애 하나 잡겠다고 수작질을 벌여요? 수준 참 알 만하네요.”
다 큰 어른이 부끄럽지도 않나.
에밀리나가 빈정거리며 코로 웃었다.
그 건방진 태도에 라울의 부하는 사색이 되었다.
서늘한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윽고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라울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표정은 더없이 싸늘해져 있었다.
“이봐 아가씨. 귀엽게 봐주는 건 거기까지야. 내가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으로 보여?”
피 보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는 거라고.
라울이 말을 끝맺으며 씩 웃었다.
한 손은 언제라도 칼을 뽑겠다는 듯 허리춤에 가 있었다.
그 행동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라 에밀리나는 침을 삼켰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꾹 쥐며 당당히 말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죽일 건가요? 제가 인질이라면 아직 쓸모가 있을 텐데요.”
목적이 있는 납치라면 인질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에밀리나의 큰 착각이었다.
“아하하, 아하하하핫!”
라울이 배를 부여잡은 채 크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치고는 에밀리나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컥!”
“인질이라…… 인질 좋지. 어차피 죽일 거 재미 좀 봐도 괜찮지 않겠어?”
안 그래도 수지가 안 맞는 장사라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라울이 장난기 스민 얼굴로 그녀를 내려 봤다.
그의 잔인한 손짓에 에밀리나는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