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56
회장이 소란스러워지고,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디트리오 공작을 찾아 주시하기에 바빴다.
곁에 있던 영애들 또한 그의 등장에 기대에 찬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직 에밀리나만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비디오를 되감듯 의자에 다시 착석하였다.
‘타이밍 진짜…….’
에밀리나가 골치 아픈 낯으로 눈앞에 놓인 샴페인을 들이켰다.
하필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에 키르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헤더 영애와 더는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재로선 영애들 사이에 조용히 묻어가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헤더 영애를 포함한 영애 무리가 키르젠한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쉬운 사람이 참아야지 뭐 어떡해.’
에밀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아 샴페인을 한 잔 더 건네받았다.
적당히 음주를 즐기다 빠져나갈 목적이었다.
저쪽에 관심을 보여 봤자 좋을 일도 없었고.
‘나랑은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기도 하지.’
에밀리나는 그렇게 세뇌하며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유일한 접점인 세리카도 멀리했으니 엮일 가능성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에밀리나는 샴페인을 입 안에 머금고서 부디 그럴 일은 없기를 바랐다.
“세상에. 다들 보셨나요? 저렇게 멋진 신사분이 공작님이라니……!”
“저 조각 같은 얼굴 좀 보세요. 아르민 왕자님 못지않게 잘생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요. 소문처럼 흉흉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제가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지 뭐예요.”
하지만 이어지는 영애들의 호들갑에 에밀리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리고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확실히. 잘생기긴 잘생겼네.’
과연 저 정도는 되어야 남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키르젠의 찬란한 외모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눈에 확 들어오고 있었다.
더구나 흠잡을 곳이 없어 오만할 정도라 주위의 사람들을 못난이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래도 에밀리나의 반응은 꽤 무던한 편이었는데, 살면서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보는 게 이번이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에 없던 의구심이 피어오른 탓에 집중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키르가 나이를 먹으면 딱 저런 얼굴로 자랐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므로.
‘에이…… 설마.’
에밀리나는 설마 하는 기분으로 다시 한번 키르젠을 살폈다.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구른 만큼 키르젠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동글하고 순한 인상을 주었던 키르를 생각하면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게다가 키르는 수인족이란 특징도 가지고 있었으니 두 사람은 별개의 인물로 취급하는 게 맞았다.
그게 맞는 일이었는데…….
‘묘하게 닮았단 말이지.’
에밀리나는 그리 생각하며 좀처럼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키르 본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으니까.
약간의 의구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황금빛 눈동자가 에밀리나를 잡아내듯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것은.
“…….”
“…….”
찰나와 같은 순간에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래가진 못했다.
에밀리나가 먼저 시선을 돌려 버린 탓이다.
그리고 가림막을 세우듯 한 손으로 얼굴을 숨기는 데 급급했다.
‘미친, 제대로 눈이 마주쳤잖아!’
에밀리나는 똑똑히 마주친 시선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키르젠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착각한 걸까 싶어 곁눈질로 다시 키르젠을 보았지만.
‘……망했다.’
그는 여전히 무시무시한 기세로 에밀리나를 향해 시선을 주고 있었다.
‘대체 왜?’
에밀리나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은 오늘 키르젠을 처음 보았다. 그 역시 자신을 보는 게 처음일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키르젠이 저렇게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안광을 번뜩이며 말이다.
에밀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신음을 삼키는데, 문득 시야에 체이스 영애가 들어왔다.
절묘하게도 딱 키르젠이 보는 방향에 서 있었다.
‘착각…… 이었나?’
그래. 착각일 것이다.
하필 체이스 영애와 같은 방향에 있다 보니 얻어걸린 것일지 모른다.
에밀리나는 저 좋을 대로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키르젠에게 몰려드는 틈을 타 한적한 구석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에밀리나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아직 여주는 등장하지도 않았다는 걸.
그러므로 키르젠이 세리카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 * *
한편, 키르젠은 에메랄드 홀에 입장한 순간부터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다.
말은 자신의 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자리라지만, 실상은 아부와 아첨을 위한 자리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일면식조차 없는 이들이 살갑게 다가오며 말을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자신과 연줄을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가소로울 정도였다.
‘부질없는 노력인데도 말이지.’
출전하기 전에 보이던 싸늘한 태도는 어디 가고, 손바닥 뒤집듯 엉겨 붙는 모습이라니.
그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어 키르젠은 실소를 흘렸다.
권력이란 게 이다지도 우스웠다.
필요로 할 땐 관심조차 주지 않던 이들이, 고생해서 위명을 얻고 나니 잘 보이려고 안달이지 않은가.
줏대 없는 그들의 행동에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특히 주제에도 맞지 않는 흑심까지 품는 게 역겹기 그지없었다.
“디트리오 공작. 내 딸을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소? 우리 가문 정도면 공작가의 안주인으로 모자람이 없을 거 같은데.”
“어허. 노이만 백작. 순서를 지키시게.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나?”
“혼사를 추진하는 데 순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결국 공작이 결정하는 일인 것을.”
그들은 가감 없이 제 여식의 가치를 매기며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키르젠은 경멸을 숨기지 않고서 그들을 바라봤다.
사전에 제롬에게 받은 간청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악질적인 소문을 이용해 제멋대로 굴었을 것이다.
그만큼 인내심이 바닥나 있었지만, 키르젠은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았다.
이곳을 찾아온 목적이 따로 있었으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성격을 죽이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키르젠이 목적을 상기시킨 채 회장을 둘러보던 순간이었다.
“…….”
“…….”
녹빛을 머금은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싸늘하게 죽어 있던 키르젠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의 입가엔 미미한 미소까지 맺히고 있었다.
그녀를 몰라보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날 알아보았을까?’
키르젠이 기대에 찬 눈으로 에밀리나의 시선을 집요하게 좇았다.
그토록 고대하던 그녀를 만난 순간이었다.
기쁜 감정과 동시에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가슴속에서 부풀고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나는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피하듯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키르젠은 상처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못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키르젠은 실망감에 우울한 낯을 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그녀에게 가서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키르젠이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이려는데, 지금까지 눈치를 보던 수많은 영애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설상가상 멀리서 분위기를 보던 다른 귀족들도 끼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발이 묶이자 키르젠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들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그들이 짜증 났으므로.
그런 심정으로 진지하게 살기를 피워 올리는데.
“아이고, 주군. 여기 계셨습니까.”
귀신같이 나타난 제롬이 그들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키르젠의 상태를 곧바로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제롬의 등장에 귀족들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불평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 역시 제노바와의 전쟁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기사인 탓이다.
사실 키르젠의 직속 부하라는 점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었다.
그가 아끼는 자라면 함부로 대해 봤자 이득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키르젠은 거리낄 것 없이 제롬에게 그들을 떠넘겼다.
“네가 상대 좀 해.”
키르젠은 그 말을 끝으로 에밀리나가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 * *
에밀리나는 구석진 곳에서 벽과 한 몸이 되어 샴페인 잔을 연거푸 비웠다.
본래는 바람도 쐬고 몸도 숨길 겸 테라스를 찾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