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icked up a black panther and became a duchess RAW novel - chapter 55
그렇게 영애들의 담소를 들으며 별 탈 없이 시간을 보내는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들 여기에 모여 계셨군요?”
원수와도 같은 헤더 영애가 등장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어딨다고.’
그녀의 뒤로는 시녀처럼 따라붙은 세 명의 영애가 더 있었다.
그날 모임에 있던 영애들하고는 사이가 틀어졌는지 빌헤름 영애를 제외하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때 무리에서 가장 말이 많았던 영애가 헤더 영애한테 아는 척했다.
“안녕하세요. 헤더 영애. 오늘은 드웨인 영식과 함께하는 것 아니었나요?”
“이곳에 꽃같이 아름다운 분이 있다고 해서요. 그런데…… 반가운 얼굴이 있네요?”
영애들의 안면을 살피던 헤더 영애가 에밀리나를 발견하곤 그렇게 말했다.
눈빛엔 노골적인 불쾌가 가득 담겨 있는 게 그녀가 함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에밀리나도 피차 같은 생각이라 비꼼을 담아 말을 건넸다.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헤더 영애. 그날 이후로 처음 보던가요?”
“영애가 워낙 공사다망해야지요.”
부채로 입가를 가린 헤더 영애가 에밀리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평소와 다르게 분에 넘친 차림새는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약혼자와 영식들이 나눈 대화가 신경 쓰였다.
“이거, 보기 드문 미인이 참석했네요.”
“영식도 보셨습니까? 저렇게 꾸미니 봐줄 만하군요.”
“딱히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니 관심 갖는 거 아니겠습니까. 가문도 적당하고요.”
“작업 걸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걸요. 험한 꼴 보게 될 겁니다.”
“그건 드웨인 영식의 경험에서 나온 충고입니까?”
“그 일만 아니었다면 제 아내로 맞았을 테니까요. 아쉬운 일이죠.”
미련이 남는 듯한 약혼자의 발언에 헤더 영애는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클라인 영애를 말하는 걸까 싶어.
그리고 예상대로 클라인 영애가 맞았다.
그것도 형편상 마련할 수 없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서.
‘돈이 대체 어디서 난 거지?’
헤더 영애가 알기론 클라인 남작가는 여전히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는 아버지인 헤더 자작이 알려 준 정보였다.
하지만 클라인 영애는 보란 듯이 모임이 있던 날 헤더 상단의 빚을 해결했다.
더구나 오늘은 그간 입어 왔던 기성품 드레스가 아닌, 디자이너의 손을 탄 것처럼 세련된 드레스를 입고서 무도회에 참석하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야?’
돈 나올 구석 따윈 없는 집안이었다.
가진 것을 전부 팔지 않고서야 저럴 수 있을까.
재력을 과시하듯 여유로운 차림새는 헤더 영애를 짜증 나게 만들었다.
그나마 찍어 누를 수 있던 명분이 사라진 셈이므로.
‘그사이 돈줄이라도 잡은 모양인데.’
헤더 영애가 입술 끝을 당기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좋은 소식도 있는 모양이고요.”
“글쎄요. 좋은 소식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죠?”
에밀리나가 귀찮음에 아무렇게나 말을 던졌다.
“그 드레스, 영애의 새로운 구혼자가 보내 준 거잖아요?”
헤더 영애가 그렇게 말하며 고상하게 웃어 보였다.
에밀리나는 그 말에 숨은 의미를 깨닫곤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저한테 구혼자가 없으면 이런 드레스는 못 입을 거란 말처럼 들리네요?”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제가 클라인 영애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데.”
역시나. 헤더 영애는 자신의 예상을 한 치도 비껴가지 않았다.
속이 보일 정도로 뻔한 시비였으니까.
부러 구혼자를 언급해 집안 사정을 들먹이는 것이다.
여기서 에밀리나가 긍정하면 가문 꼴이 우습게 되는 거고, 부정하면 혼인 관련으로 말을 꺼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에밀리나가 조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참 아쉽게 됐네요. 전 구혼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이만 물러가 주는 게 어때요?”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에밀리나가 뒷말을 삼키며 그렇게 말했다.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으니 이만 떨어져 달라는 뜻으로.
하지만 헤더 영애가 말귀를 알아듣는 일은 없었다.
“이런. 안타깝네요. 전 또 상대분이 생긴 줄 알았잖아요. 어쩐지 드레스 안목이 좀 모자라다 싶더라니…….”
클라인 영애가 고른 것이었어요?
헤더 영애가 이때다 싶었는지 말을 덧붙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를 따라온 세 명의 영애 또한 별반 다르지 않게 웃어 보였다.
기존에 있던 영애들만 날 선 분위기에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에밀리나가 그 가소로운 도발에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제 안목이 형편없다니. 마담 에클레를 책망해야겠군요. 이 드레스는 그녀가 추천해 준 선물이라서요.”
“뭐, 뭐라고요?”
헤더 영애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녀 역시 마담 에클레의 유명세를 모르지 않기에.
“허세가 너무 지나친 거 아니에요? 마담 에클레가 왜 영애한테 드레스를 줘요?”
“그거야 저도 모르죠. 알다시피 마담 에클레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잖아요?”
에밀리나의 답변에 헤더 영애가 불쾌감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은 그녀의 드레스를 얻기 위해 매번 애원에 가까운 의뢰를 넣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정중한 거절과 함께 예의상의 기약일 뿐이었다.
그런데.
‘클라인 영애는 받아 주었다고?’
헤더 영애는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보다 못한 취급에 기분이 나빴다.
제가 갖지 못한 걸 클라인 영애가 가졌단 생각에 이가 갈렸다.
헤더 영애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이 기회겠군요. 마담 에클레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줬는데 혼인할 상대를 구하지 못하면 너무 가슴 아프잖아요.”
타이밍을 재던 빌헤름 영애도 곁에서 말을 거들었다.
“사실상 마지막 기회 아닌가요? 이번을 놓치면 확실히 주제를 깨닫게 되는 거잖아요.”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분을 가만 내버려 둘 신사분이 있을 리가.”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녀의 소문을 잊었나요?”
“아, 확실히. 그건 좀 흠이겠네요. 그래도 좋은 상대를 만나길 빌어야지요.”
헤더 영애의 무리가 주거니 받거니 말을 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에밀리나는 참 한결같은 그들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꼬투리 잡을 게 없으니 혼인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예상한 일이라지만 열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상황을 만든 게 헤더 영애라는 사실도.
누가 철천지원수 아니랄까 봐 헤더 영애는 자신이 가만있는 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에밀리나는 인내하기로 했다.
그녀가 반박을 입에 올리는 순간 이목이 집중될 게 뻔히 보였으므로.
안 그래도 호기심을 보인 몇몇 영애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특히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 세리카 체이스가 관심 있게 살피는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이쪽으로 합류할 기세라 에밀리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절대 그것만은 안 돼.’
곧 남자 주인공 키르젠 디트리오가 등장할 테니까.
그에게 오해라도 사면 큰일이니 세리카와 함께 있어서 좋을 일은 없었다.
에밀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롱을 감내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존의 영애들이 헤더 영애의 무리에 동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불편한 얼굴로 어서 이 상황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좀 미안해지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리라도 피해 줄걸.
자신 때문에 잘 어울리던 영애들이 어색해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밀리나는 금방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혼자 있었다면 헤더 영애 무리가 더 거침없이 굴었을 것 같기에.
다 대 일로 시달릴 바에야 제 편을 들어주진 않더라도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좀 나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에밀리나의 대단히 큰 착각이었다.
“세상에. 교제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니. 그렇담 연애의 달콤함도 알지 못하겠군요?”
“영애도 참. 당연한 말을 하고 그래요? 영식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으니 파혼을 일삼는 것이지요.”
“오늘도 보세요. 파트너가 없으니까 남작님의 에스코트를 받았잖아요.”
“그게 다 클라인 영애가 부덕한 탓이에요. 여인으로서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여전히 혼자이겠어요?”
그들은 급기야 조롱을 넘어 대놓고 비웃기 시작했다.
에밀리나는 갈수록 가관인 언사에 인내심이 빠르게 바닥나고 있었다.
모솔에 보태 준 것도 없으면서 저러고 있으니 짜증이 났다.
‘제발 좀 닥쳐 줬으면 좋겠는데.’
이러다 참지 못하고 분을 터트릴 기세라 에밀리나는 참을 인을 여러 번 새겨야 했다.
한편으론 저런 모욕을 듣고도 얌전히 있는 제 모습이 참 어색하기만 했다.
평소라면 눈치 따윈 안 보고 일단 지르고 보았을 테니까.
에밀리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조하고 있는데, 고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그러지들 말아요. 얼마나 가여운 일이에요. 여인의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고 늙어 가는 건 정말 비참한 일이잖아요.”
그 말이 방아쇠가 되어 에밀리나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기분을 완전히 잡쳤기 때문이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헤더 영애와 그 무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든 말든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므로.
지금까지 참은 모욕을 생각하면 아까운 일이지만, 여기서 버티다 언성을 높이느니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에밀리나가 테라스를 찾아 발을 움직이려 한 순간이었다.
“제노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키르젠 디트리오 공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무도회장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