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183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183화
183
메이린은 납득할 수 없었다.
고가의 귀금속을 취급하는 이권이다.
아세라리온의 본업이 고리의 대부업이라고는 하나, 다른 부분에 손을 뻗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극장의 주인이기도 하고, 유명 레스토랑 체인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여러 이권에 손을 뻗은 상태일 텐데.
‘……대체 왜, 이렇게 좋은 조건을 마다하는 거죠?’
메이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직후,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페리사 선배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당주님과 직접 만나서 얘기하겠어요.”
“가능할 거라 생각하냐뇽?”
“………….”
페리사는 지금, 샤프란의 선배로 그녀의 앞에 선 것이 아니다.
아세라리온의 대리자로, 그녀의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억지를 부려도, 쉽게 당주님과 만나게 해줄 리도 없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쉬이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메이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유가 뭔가요?”
“글쎄다뇽. 그냥?”
페리사는 아쉬울 것 없다는 듯 그리 말했다.
특별히 단서랄 것도 없는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 순간 메이린은 직감했다.
페리사의 태도 자체가 ‘이유’라는 것을.
‘요컨대, 계륵이라는 거군요…….’
아세라리온은 이미 큰돈을 벌어들이는 상인 가문이다.
보석이라는 수입원이 하나 늘어나면 좋은 일이지만, 그리 절박한 일도 아니라는 말이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세라리온에겐 이 제안 자체가 받든 받지 않든 상관없다는 거네요.’
상대가 저런 식이라면, 숫자로 하는 협상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쪽이 마진율을 낮춰도, 저쪽은 배짱 튕기듯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보면 결국 정말로 손해 직전의 아슬아슬한 거래가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쉽지만, 선배가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드레나이나 헤카니아로 갈 수밖에 없네요.”
“뭐?”
상인의 본성(本性)을 건드린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정도가 아니라, 창자가 끊어질 듯 괴로워하는…… 그들의 가장 본능적인 부분을 자극하는 거다.
“상련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게, 아세라리온만인 것도 아니니까요.”
드레나이와 헤카니아.
둘 다 상련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지닌 상인 가문이다.
아세라리온 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연줄도 가진 유력한 세도가(勢道家)들.
‘특히 이 둘은 아세라리온과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가문이죠.’
직접적으로 마찰을 빚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를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상련 안팎에서 유명하다.
“그거 혹시…… 협박이냐뇽?”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냥 아세라리온이 거절하면, 다른 거래처를 알아보겠다고 한 것뿐인데요.”
메이린은 오른손을 제 가슴에 얹으며 말한다.
“물론, 지금 저는 여기 있답니다.”
“………….”
“드레나이도, 헤카니아도 아닌 아세라리온을 가장 먼저 방문했고. 아직도 이곳에서 답을 기다리고 있죠.”
페리사의 눈썹이 휘어지고, 메이린은 빙긋 미소를 띄운다.
“그 점을 기억해주시면서, 선배가 제안을 당주님께 건의해보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 * *
이번 일은 결국 시간 싸움이다.
상련의 다른 누군가가 모르셴코의 이권을 차지하기 전에, 합법적으로 일을 설계해 끝내야 하는 속도전.
아세라리온도 그걸 알기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메이린,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뇽.
방금 전, 그리 단호하게 거절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아세라리온은 가볍게 제안을 승낙했다.
하지만,
—단, 조건이 하나 있다뇽.
—조건이요? 어떤 내용이죠?
—우리가 거래하는 것은, 류리크 아스트레이가 아니라 메이린 아이율라다뇽.
—네? 그게 무슨…….
—우리가 나누는 계약서, 서류, 그 어디에도 류리크의 이름이 없어야 한다뇽.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조건이었다.
아직 이름조차 정하지 않은 상회라곤 하지만, 그 주인이 류리크인데. 어떻게 그의 이름 없는 계약서를 쓴단 말인가?
메이린은 곧장 반박하려 했지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게 아세라리온의 유일한 조건이다뇽. 그리고 타협은 절대 없다뇽.
페리사는 단호했다.
실제 그 뒤로 어떤 타협도 없이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페리사는 결정까지 하루의 말미를 주었다.
메이린은 복잡한 심경으로 아세리온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걸음이 무거웠고, 마음은 조금 더 무거웠다.
‘물론 지금 당장 드레나이, 헤카니아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영향력으로는 아세라리온이 최고란 말이죠.’
잡음이 나지 않게 마무리하려면 역시 아세라리온 뿐일 텐데.
‘왜 하필 그런 조건을…….’
복잡해진 속내가 헝클어지던 중이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실비아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묻는다.
“일이 잘 안 됐어?”
“아, 실비아 씨.”
“설마 페리사 선배가 뭐라고 한 거야? 그런 거면 내가 아주 그냥…….”
“그런 건 아녜요. 다만…….”
메이린은 아세라리온의 조건에 관해 설명했다.
10여 분 정도, 그것을 죽 듣고 난 실비아는 흠흠! 헛기침하더니 명료한 결론을 내렸다.
“류리크 씨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네?”
“당연하잖아? 모르는 게 있으면, 상담하면 되는 거지. 그걸 왜 혼자 끙끙 앓아?”
그야 그렇긴 하다.
사실 류리크에게 털어놓듯 얘기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주저하는 거지……?’
류리크한테 큰소리쳤던 게 부끄러워서?
아세라리온의 조건이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할까 봐?
—마치 그 조건이, 류리크를 배제하고 상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말처럼 느껴질까 봐.
“………….”
과장된 생각이다.
류리크는 현명한 사람이니, 그런 오해를 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망설여진다.
‘차라리 그냥 드레나이로가서 거래를 성사해 버리면…….’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차라리 단순하게 생각해. 류리크 씨 대가리가 어디 보통 대가리야? 물어보면 뭔가 뿅! 하고 답이 나올걸?”
“………….”
“그 왜. 류리크 씨가 자주 하는 말 있잖아.”
실비아는 씨익, 멋지게 웃었다.
“자기를 믿으라고.”
나를 믿어라.
너를 믿는 나를 믿어라.
알쏭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던 말.
“한 번, 류리크 씨를 믿어봐.”
* * *
실비아는 휴가의 마지막을 술로 불태우겠다며 여관의 1층에서 맥주를 통으로 들이켜고 있다.
한편 메이린은 먼저 숙소로 올라와 수심 깊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본다.
“………….”
혹시 몰라 챙겨온 와인의 라벨이 달빛에 비친다.
메이린은 무언가를 각오한 듯 와인병을 열었다.
그리고,
—꿀꺽. 꿀꺽.
병째로 거꾸로 들어 크게 세 모금을 들이켰다. 뇌가 땅기면서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그녀는 그대로 품 안에서 통신 구슬을 꺼내 작동시켰다.
—음, 메이린? 무슨 일인가.
남자는 곧장 연락을 받았다.
바쁜 일 없이 여유로운지, 구슬 너머에는 모락모락 김 나는 홍차와 신문 따위가 보였다.
메이린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류리크 씨, 저 할 말이 있는데요…….”
그녀는 그간 있던 일을 죽 나열했다.
자신의 계획이 무엇이었고.
왜 아세라리온을 찾았는지.
그들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까지.
품고 있던 모든 말을 빼놓지 않고, 남김없이 쏟아냈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렇군.
“일단 드레나이로 갈 생각인데, 그 전에 류리크 씨한테 얘기해보는 게 맞을 거 같아서요.”
꼴깍.
별말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목이 마른다.
—예컨대, 메이린. 자네가 보기엔 아세라리온이 가장 최적이라는 게지?
“네. 다른 것보다…… 다른 지역의 반발을 누를 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아세라리온뿐이니까요.”
—드레나이와 거래해도 ‘상련의 이권’이라는 점을 찍을 순 있지만, 제3의 세력과 트러블이 생길 수 있다는 게로군.
역시 류리크.
단번에 핵심을 짚어냈다.
—보석도 보석이지만, 차후 다른 거래나 정치력을 행사할 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터. 확실히 그 부분은 곤란하다.
류리크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상회라는 것은, 돈이라는 것은 그 그림의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할 뿐.
메이린도 어렴풋이나마 그걸 알기에 우려를 표하는 것이었다.
“네, 그래서…… 류리크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고민할 게 뭐 있나. 아세라리온과 거래를 하면 될 일이지.
“네? 하지만, 그쪽에서는…….”
류리크를 배제하라고 했다.
그 어떤 계약이든, 서류이든.
류리크 아스트레이의 이름이 없어야 한다 했다.
그 말인즉, 거래의 주체인 ‘상회’에도 류리크가 개입되어선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메이린, 자네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착각……이요?”
—상회의 주인은 자네라네.”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던 메이린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네?”
—나는 자네에게 상회에 대한 모든 걸 맡겼네. 그건 결코,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야.
류리크는 말한다.
—자네가 상회 운영의 전반을 관리하고, 직원들 한 명 한 명 모두가 자네의 동료 아니던가. 헌데 그게 어찌하여 자네의 상회가 아니겠나.
“하, 하지만 여기엔 류리크 씨의 돈이…….”
—나는 그저 이익에 따라 배당을 챙기는, 투자자일 뿐이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메이린은 알고 있다.
이 직전까지도, 류리크는 ‘자신의 상회’라는 점을 의식하고 고집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볍게 포기해버리는 건가.
“아니잖아요. 류리크 씨는 자신의 상회를 만들려고 했었잖아요. 저는 단순히 그를 관리하는 관리자일 뿐이고요.”
—내가 직접 그런 말을 했던가?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메이린. 상회라는 건, 애당초 부차적인 요소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진정으로 갖고자 하는 것은 자네라네.
“네, 그렇겠…… 네, 네넷?!”
—지금 만들려는 상회 따위, 무너져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테야. 자네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말이지.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당최 류리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다.
당황한 메이린은 허둥지둥, 대충 떠오른 말을 내뱉는다.
“그, 그러다가 배신당할 수도 있는데요! 제가 막! 류리크 씨의 뒤통수를 치면 어떡…… 흐엑!”
자신이 내뱉고도 아차, 싶었다.
왜 갑자기 저런 소리를 내뱉은 것인가.
설마 ‘너를 믿는다.’는 말이 듣고 싶어, 저런 터무니 없는 소리를 내뱉어버린 것인가.
메이린은 와인 마셨던 자신을 깊게 자책했다.
한편 류리크의 입에서는 그녀의 바람과 조금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는 배신하지 않을 테야.
너를 믿는다가 아니라,
너는 배신하지 않을 거다.
“네…… 에? 그게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네. 자네는 본인을 결코 배신하지 않아. 절대로.
“그걸 어떻게…….”
—나는 안다네.
대충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어조는 바위처럼 단단했고, 두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믿음을 품고 있었다.
—자네는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야.
그건 참 이상한 말이었다.
너를 믿는 나를 믿어라, 그 말처럼 분명 이상한 말이었다.
하지만,
너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 묘한 데서 이상하리만치 강한 믿음이 느껴졌다.
—그러니 상회는 자네 것이야.
“………….”
—내친김에 상회 이름도 정하지.
“사, 상회 이름을요? 지금?”
—그래. 원래 이런 것은 생각났을 때 해버리는 게 좋다네. 자네가 주인이니, 자네가 바라는 대로 이름을 붙여보지.
이대로 되는 건가?
뭔가 확확 지나가 버리는 거 같은데.
—생각해둔 것이 없나?
“하나, 있기는 해요…….”
이내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엘데(Elde)……요.”
* * *
다음 날, 아세라리온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지 않았다.
이로써 당장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류미엘을 통해 북부 영주들에게 관세 15%라는 것을 협조받아야 하고, 중앙의 동향도 살펴야 한다.
‘앞으로 정말 바빠지겠어요!’
류리크의 바람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드높은 정상에 있듯.
메이린 역시 보다 큰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 어디에도 보석을 특산품으로 삼는 도시는 없어요. 하지만 15%의 관세를 바탕으로, 보석상과 보석세공사들을 모아 도시를 하나 만든다면…….’
그게 시작이 될 것이다.
‘보석을 바라는 귀족들과 상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그들이 가져온 부가 문화와 산업을 융성하게 만들겠죠.’
현재 북부에서 가장 크다는 대도시 할카데르조차 상업이 융성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할카데르보다 큰 규모의 상업 도시가 하나 만들어진다면.
‘그곳을 중심으로 북부라는 지역 전체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겠죠.’
북부는 미개척지대라는 높은 잠재성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아주 작은, 어떤 계기로 자본과 사람이 모일 물꼬만 터준다면…… 문자 그대로 북부에 대개척시대가 열릴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손에 닿기엔 아직 먼 무언가이지만, 메이린은 이를 즐겁게 상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크우우우우…….”
어제 술을 진탕 마셨던 실비아는 아직도 잠에 취한 상태였다.
휴가의 마지막 날이라고, 최선을 다해 만취한 모양이었다.
메이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길었던 휴가가 끝났고, 이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갑자기 통신 구슬에서 반응이 왔다.
류리크였다.
“응? 이 시간에 갑자기 왜…….”
메이린은 의아해하면서 통신 구슬을 작동시켰고.
—메이린, 요루아를 데리고 도망쳐라.
류리크는 다짜고짜 그리 말했다.
“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요루아는 지금 로스월드 저택에 있다. 그를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목구멍까지 치솟은 의문은 숨이 막힐 정도로 쌓였지만, 차마 그를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당장.
류리크의 표정은 이제껏 본 적 없을 만큼,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