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possessed a villain with nothing but a death flag RAW novel - Chapter 61
사망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에 빙의했다 061화
061
북부, 오덴아일름 영주성.
기본적으로 북부의 인간들은 폐쇄성이 짙고, 자신들의 위치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자리에 수많은 북부의 영주, 혹은 그 대리들이 모여 있다.
아스트레이가 소집하는 대회합이나, 가끔 있는 행사가 아니고선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 중심에 슈펜이 있었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북부 동맹의 여러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는 말석에 서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영주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딘가 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여러분 모두 한 통의 편지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 안에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죠. 다름 아닌 류리크 아스트레이의 토지 투기.”
슈펜은 참담하다는 분위기를 내비치며,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모두 사실입니다.”
—허어.
—설마. 그럴 리가.
—저런. 저런.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몇몇은 분통을 터뜨렸고, 몇몇은 긴가민가한 태도. 몇몇은 진중한 눈으로 슈펜의 입을 바라본다.
슈펜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 상련은 북부에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상회를 발족하고, 여러분과 공생하여 북부의 번영을, 더 나아가 제국의 영광을 이룩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편지에 동봉되어 있던 계획서를 보면 충분히 아실 테죠, 슈펜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거기엔 비열한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류리크 아스트레이.
슈펜은 분하다는 듯 콱, 주먹을 쥐며 말한다.
“그자는 저희 상련의 내부 정보를 빼돌려, 북부의 땅을 매입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 대외적인 명분은 아실 겁니다.”
한 호흡.
슈펜은 영주와 그 대리들이 ‘명분’에 대해서 상기할 수 있는 틈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머리에 각인될 즈음, 설명을 재개했다.
“상회의 발족, 그는 이곳에 상회를 만들어 북부를 발전시키겠다고 했지요.”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메이린의 수하들이 말했던 달콤한 얘기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듣기에는 무척이나 달콤하던, 가만히 있어도 북부가 번영할 것 같던 말들.
“하지만 여러분은 이것도 아실 겁니다. 그가 만든다던 상회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지.”
또다시 몇몇은 탄식을 흘렸고, 몇몇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몇몇은 전혀 모르는 눈치.
이 다양한 인간군상을 죽 살피며, 슈펜은 말한다.
“할카데르에 있다는 상회의 건물은 직원 하나 없이 빈 건물로 방치된 지 오래입니다.”
실질적인 증거.
그것이 튀어나오자 영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랬었나?
—나는 처음 듣는데.
—저 말은 사실이야. 말아먹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뭐.
—말아먹어? 그러면 사업을 말아먹고서, 우리 땅으로 한탕 하려고….
그나마 중립적이던 분위기가 슬슬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거기에 슈펜은 연이어 장작을 던졌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회의 기틀도 마련이 안 되어 있는데, 일단 땅부터 산다니요.”
—그러게. 뭔가 이상하긴 해.
—땅 살 돈이 있으면, 할카데르 안에서 뭐라도 했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말이야.
“상회의 건물은 비어 있고, 직원 한 명 제대로 없는데, 일단 교역 거점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교역 거점으로 산다는 땅도 꽤 넓잖아.
—그 넓은 땅을 사면, 거기를 개발할 돈은 있어?
—이런 망할! 아무리 봐도 수상하잖아!
“어떤 건설업체를 이용할지, 물건은 어떻게 유통할지, 누구와 거래를 할지… 무엇 하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땅만 산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아무런 계획이 없었잖아!
—할카데르에 상회랍시고 건물 산 게 언젠데, 물건 하나 제대로 유통하는 게 없으면서 교역 거점?
—역시 우릴 속인 거였어!
아주 소수. 아스트레이에 충성심이 깊은 몇몇 영주들은 무거운 시름을 흘린다.
슈펜은 그를 면밀히 살피며 질문한다.
“여러분은 그가 무엇을 할지, 계획서라도 받으셨습니까? 아니오. 그자는 그저 말만 뻔지르르하게 늘어놓고, 여러분의 땅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슈펜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 된다.
“그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알량한 돈을 조금 더 벌어보자고!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시고, 제국의 번영을 위해 일궈야 할 땅을, 그런 헐값에 빼앗으려 한 겁니다!”
분노를 이끌어내듯.
그 자신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듯.
슈펜은 외친다.
“상회가 들어오면 북부도 발전하겠지! 더 나아지겠지! 영지민을 생각하는 여러분의 그 선한 마음을 기만하고! 속이고! 능욕한 것입니다!”
그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영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 망나니 자식! 내 그럴 줄 알았어!”
“류오넬 각하를 생각해서 그동안 보고만 있었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군!”
“눈에 띄기만 해 봐라. 아주 묵사발을 내버릴 테니!”
북부의 영주와 그 대리들이 탁상을 부술 듯한 기세로 성을 낸다.
슈펜은 그들의 분노가 충분히 무르익도록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이 정점에 다다를 즈음, 흐흠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 상회는 북부 동맹 여러분과 공생하여, 더 나은 내일을. 더 나은 미래를 일궈내고자 합니다.”
그의 차분한 어투에 달아올랐던 영주들이 다소 가라앉는다. 박차고 일어섰던 이들은 도로 자리에 앉으며, 괜히 수염을 매만지고, 괜히 헛기침을 한다.
그렇게 생긴 여유와 혼란 사이로, 슈펜은 달콤한 과실을 밀어넣는다.
“레펜하이르 백작님. 이미 수도 없이 겪으셨을 겁니다. 백작님의 영지가 그나마 남쪽에 있어, 조그마한 농토가 있다는 이유로 매번 식량 지원에서 후순위로 밀려났던 것을요.”
“그, 그걸 어떻게….”
“다른 동맹 여러분들도 사정이 각박하니, 어떻게 말도 못 하시고 얼마나 오랜 시간 마음고생 하셨습니까.”
“………….”
레펜하이르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기근이 오면 추위에 배고픔에 죽어버린 아이들을 봐야만 했다. 영지민은 굶주리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기억이 시큰거렸다.
그의 오래된 상처였고, 영원히 나을 수 없는 흉이었다.
“제가 레펜하이르 백작님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해묵은 감정이 차오른 레펜하이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그에 대꾸할 뿐이었다.
“그래. 상련에서 상회를 만든다면, 식량의 유통이 나아지겠지.”
고개 숙인 노장(老將)의 모습.
슈펜은 그를 위로하듯, 자상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요. 백작님의 영지에 있는 농토를 더욱 넓힐 것입니다.”
농토? 갑작스런 말에 백작이 고개를 든다. 애써 감정을 죽였지마는 그의 눈가엔 불그스름한 색이 어려 있다.
그는 어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농토를 넓힌다고? 하지만 본인의 영지는 대부분이 설원이네.”
“그래도 백작님의 영지는 그나마 남쪽에 있고, 평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원을 농토로 개척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죠. 애초에 백작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슈펜은 그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아는 것처럼, 어딘가 아픈 기억을 쓰다듬듯 말한다.
“매년 아드리아에 설원 개척에 관한 논문이 나왔는지 찾아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3년 전, 그게 가능하다는 논문도 읽으셨겠죠.”
“그, 그래. 나도 읽어보긴 했네만… 그걸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거금이 필요하네.”
얼어붙은 땅을 농토로 바꾸는 것. 이건 단순히 토질을 바꾸는 것뿐 아니라, 기후조작의 묘리를 담은 결계 등 여러 복합적인 준비물이 필요하다.
그렇게 막대한 돈을 들이고도 얻을 수 있는 땅은 무척 좁기에, 누구도 대대적으로 시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슈펜은, 황금과 보석으로 도시를 메울 수 있다는 상련의 인간이었다.
“그 돈, 제가 상련에서 가져오겠습니다.”
“그, 그게… 가능한 건가?”
탕, 슈펜은 탁상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저는 단순히 북부에 상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대적인 투자로 이 북부 전역을 개척하여, 새로운 변혁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제국의 영광까지 언급하며, 조금 허황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논조는 북부에 집중되어 있고, 앞서 언급했던 농토의 개척과 자금을 끌어온다는 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농토를 개척하겠단 말인가?”
“약속드리겠습니다. 레펜하이르 백작님. 3년. 3년 안에 백작님의 영지를 농토로 바꿔, 일 년 내내 비지 않는 곡창(穀倉)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
레펜하이르 백작이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떨리는 손을 보며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을지는 눈에 보일 듯했다.
슈펜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세르베스 자작님. 재작년 아드님께서 크게 열병을 앓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때, 아드님을 치료하고자 눈보라를 해치고 사흘을 달리셨던 것으로 압니다.”
이번엔 세르베스 자작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당시 아들은 늦게나마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하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세르베스의 어두운 악몽으로 남아 있다.
“얼어 죽은 말을 뒤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할카데르까지 달려가셨던 그 이야기… 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북부는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빌어먹을 곳이라… 마차도 다니지 못해서… 그땐 그랬었지.”
그리고 슈펜은 말한다.
“저는 북부에 신전을 유치시킬 것입니다. 길을 뚫어 사람이 다니게 할 것이고, 신전을 유치해 북부의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든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영주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이전의 농토 얘기는 영지가 남쪽에 있는 이들에 한하지만, 신전의 유치는 북부의 모두가 바라던 일이었기에.
“오덴아일름 후작님. 후작님께서는 언제나 북부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북부에 학교를 세우고자 그리 노력하셨지만, 무엇 하나 쉽지 않았죠.”
“………….”
“저는 북부에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겠습니다. 우리의 후손이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슈펜의 말은 이어진다.
“샤크미나 자작님. 언제나 공연 한 번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셔야 했던 것 압니다. 저는 북부에 극장을 건립하겠습니다. 북부의 사람들도 문화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제국 전체에 알리겠습니다.”
“헬리오르 백작님, 저는…”
“겐트리 남작님….”
…
슈펜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깊은 침묵에 잠겼다. 다만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그동안 쌓여 있던 슬픔이 사라져서였다.
이제 북부는 달라질 수 있다.
이제 북부는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의 후손은, 더 나은 미래에서 살 수 있다.
그 애달픈 꿈에 젖어, 모두가 말을 잃고 있었다.
그리고 슈펜이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신들이 바라보는 꿈을, 나도 함께 꾸고 있다는 것처럼.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북부의 내일을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
짝짝.
누군가의 짧은 박수가 나왔고, 그것은 이내 열화(熱火)와 같은 파도처럼 일어난다.
—짝짝짝짝짝!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들으며 슈펜이 외친다.
“북부를 위하여!”
그리고 영주들이 그에 호응한다.
—북부를 위하여!
—북부를 위하여!
—북부를 위하여!
그런 함성이 오덴아일름 영주성을 쩌렁쩌렁 울렸고.
—쿵.
돌연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
“………?”
영주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외안경을 낀 시종이 말한다.
“아스트레이 대공작가의 차남. 류리크 바타체스 폰 드라스카 아스트레이의 대리자, 메이린 벨테인 폰 얀츠크네 아이율라 영애께서 들어오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