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여기서부터
“…도율 씨.”
클레어가 도율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도율은 반응이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 걸 보면 조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곳도 아니었다. 티비를 켜 놓긴 했지만, 말소리 정도는 충분히 들릴 법했다.
“저기, 이도율 씨?”
클레어가 손바닥을 펼쳐 도율의 눈앞에 휘휘 저었다.
그래도 묵묵부답.
“이도율 씨!”
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도율이 화들짝 놀라며 클레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아. 네.”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멍하니.”
“아뇨, 딱히…….”
도율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입 밖에 꺼내지 않았을 뿐, 고민거리라고 할 만한 건 있었다.
‘백수아…라고 했었나.’
백우진의 집에서 봤던 여자아이의 이름은 백수아였다.
그리고 망량이 주었던, 나무로 조각된 소라고둥이 거세게 반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여자아이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지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곤란했다.
‘어차피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도율이 망량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태까지 그저 망량이 부리는 까마귀의 초대를 받아 방문했을 뿐이니까.
망량이 있는 곳은 그가 만든 파경대계 안이었고, 그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작정하고 찾아내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도율이 다시금 클레어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커피는요?”
클레어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부엌에 간 참이었다.
그런데 빈손으로 돌아오다니.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클레어에게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는 격이었다.
도율이 단호하게 말했다.
“설탕은 안 열어 줍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믹스커피에 들어가는 각설탕 보관함은 도율에 의해 굳게 닫혀 있었다.
평소라면 어느 정도 눈 감아 줄 수 있지만, 클레어는 중요한 작전에 참가하는 인원으로 확정되어 있었다.
전투를 염두에 둔다면, 몸을 무겁게 만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럼요?”
“그게…….”
그러자 클레어는 낯부끄럽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소리를 하려길래?
“쌀이 다 떨어졌던데요.”
“예?”
보릿고개도 아니고 쌀이 왜 다 떨어져.
도율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다가, 문득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떠올렸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클레어의 증언대로 지금 집에 쌀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보며 같이 사 오려고 했지만, 딴생각을 하다 보니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커피를 타러 간다는 사람이 쌀이 있는지 없는지는 왜 확인해 본 건지 의문이었지만.
‘오늘 반찬은 뭔지 궁금했나.’
도율이 그렇게 짐작하고 바라보자, 클레어가 스리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정곡인 듯하여, 도율은 클레어가 안 보는 새 쿡 하고 몰래 웃어 두었다.
‘배달… 아니다.’
도율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엔 배달 어플을 통해 어느 요리든 못 먹는 게 없다지만,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을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는 역시 몸 관리.
클레어가 작전 수행 당일에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은과 상의한 식단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딱히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맛에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게 도율의 몫이었다.
손수 만든 음식을 먹고 기뻐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지금 다녀올게요.”
아직 외출복 차림이었다. 날이 쌀쌀했지만 도율은 외투를 챙겨 입지 않아도 추위를 타지 않았다.
도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클레어도 슬그머니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같이 가요.”
“예?”
피곤할 텐데.
클레어는 요즘 거의 매일 훈련을 소화하는 동시에 밤에는 각종 연구 자료를 읽으며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으로 도약하기 위해 몸을 만들고 기술을 가다듬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열람할 수 없었던 자료들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열렸기 때문이다.
“집에서 쉬지 그래요.”
도율이 그렇게 말했지만,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바람도 좀 쐬고 싶고, 그리고 또…….”
또?
도율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클레어는 무언가 불만이라는 듯 부루퉁하게 입을 우물거렸다.
“변한 게 없잖아요, 변한 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건지, 아니면 작게 불만을 제기하는 건지.
확실한 건, 클레어는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 벽창호에게는 확실하게 말로 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을 테니. 원하는 걸 입에 담는 건 이미 각오한 바였다.
클레어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연인 사이라고 해 놓고서, 변한 게 없잖아요.”
“아…….”
도율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클레어에 대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대답까지 들었으니 이제는 명실상부한 연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변하질 않았다. 오래 보던 익숙한 사이처럼 편안하긴 했지만.
과연 아무런 일도 없는 건, 연인 관계로서 어떨지.
“가뜩이나 각자 할 일이 있어서 같이 보내는 시간도 짧은데, 그런 때에도 그냥 시간을 보내기만 하는 건… 싫어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도율이 고뇌에 잠겼다.
클레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얼버무린다면 도리가 아니었다. 할 일을 제쳐 두고 그러는 거라면 쓴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도율이 시인하자, 클레어가 의기양양한 듯 가느다란 미소를 피웠다.
“연인 다운 일, 제1호네요.”
오늘이라는 날에 기념비라도 세울 듯한 기쁨이었다.
* * *
“저기, 이거 어때요?”
클레어가 분홍빛 살덩이가 든 팩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도율은 힐긋 눈길을 주고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 부위는 지방이 너무 많아요.”
“피…….”
클레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고는 얌전히 팩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 놓고 왔다.
이 또한 학습의 결과였다. 몰래 카트에 넣으려고 해도 도율은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알아챘다.
기감 앞에서 클레어의 행동은 모두 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맛있는데.”
클레어가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도율이 슬쩍 물었다.
“저게 아니면 맛이 없었다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구요…….”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느긋하게 마트 코너를 도는 도율의 곁에 클레어가 따라와 붙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며 같은 곳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실제로 생각하는 건 도율의 몫이었고. 클레어는 그저 호기심에 따라 볼 뿐이었다.
덕분에 대부분은 도율이 어디로 시선을 보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고 보니 도율 씨는.”
“예.”
“뭔가 먹고 싶은 건 없나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도율은 언제나 클레어를 위한 것들을 사 올 뿐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한 기호 식품을 사 들인 적이 없었다.
처음엔 그게 얹혀사는 입장을 생각한 체면과 염치였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도율도 스스로 돈을 벌고 있고, 클레어의 눈치를 볼 이유 따위는 거의 사라졌으니.
‘그런데도…….’
카트에는 두 사람의 생활에 필요한 것. 식사 메뉴에 들어갈 요리 재료. 그리고 클레어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클레어에게 필요한 물품들뿐이었다.
그 자신을 위한 물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유일한 취미인 요리도. 자기 자신이 맛있게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곤 하는 게 전부였다.
“글쎄요. 딱히 끌리는 게 없어서.”
도율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클레어의 생각은 달랐다. 도율이 흥미를 느끼는 취미나 물건이 없는 건, 현대에서 동떨어진 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걸 되찾는 방법을 깨닫지 못한 채 지난 시간을 보내 왔던 것이다.
‘다시…….’
클레어가 다짐했다.
도율이 다시 평범한 사람들처럼 좋고 싫음을 되찾을 수 있게 하리라고.
클레어가 도율의 팔을 잡아끌고 간식 코너의 진열대를 가리켰다.
“저기 저 과자는 어때요?”
“짜 보이네요.”
“그럼 저건요?!”
“달아 보이네요.”
그건 포장지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거 말고, 좀 더 이런……. 맛있어 보인다거나, 먹어 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들어요?”
클레어가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과자 좀 먹는다고 행복해지는 건 과장일지 몰라도, 원래 첫걸음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법이랬으니까.
도율이 그런 클레어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언제 과자에도 취미를 붙인 겁니까?”
“네……?”
도율이 한숨을 뱉었다.
“원래 그런 건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갑자기 과자 귀신이 되어 버려서는…….”
도율이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절대 안 사 준다고.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클레어가 뒤늦게 부인해 봤지만, 도율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클레어가 잡은 팔을 오히려 굳건하게 끌고 나가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 나갔다. 클레어는 그에 딸려 질질 끌려가는 형세였다.
“자, 야채 보러 갑니다.”
“아니, 진짜 그런 거 아닌데…….”
그때 누군가 도율에게 말을 걸었다.
“잘생긴 총각! 오늘은 둘이 왔네?”
마트 직원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가 위생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전자 저울 옆에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도율이 인사하자 클레어가 도율을 따라서 어색하게 인사했다. 누가 봐도 뒤따라 하는 모양새.
그 광경을 본 아주머니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도율을 향해 물었다.
“옆엔 누구야? 응?”
그러자 도율이 클레어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금 아주머니에게 답했다.
“아내, 입니다.”
묘하게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아이구~~! 이거 내가 눈치가 없었네! 그려, 그려. 이 아줌마는 바쁘니까, 둘이서 느긋하게! 둘러보라구.”
아주머니는 호들갑을 떨더니 등을 돌리고 공연히 야채를 정돈했다.
괜한 반응에 클레어와 도율 모두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두 사람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괜히 입 밖으로 꺼내게 되니 발이 땅에 붙은 듯했다.
도율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클레어에게 물었다.
“…마저 볼까요.”
“네, 네…….”
앞장서 걷는 도율의 앞을 클레어가 반보 뒤에서 따라갔다. 이번엔 얼굴을 살필 자신이 없어, 신발 끝에 시선이 머물렀다.
괜한 긴장감에 클레어가 도율의 등에 대고 물었다.
“왜 괜히 긴장하고 그래요. 몇 번이나 말했던 거면서…….”
이전.
클레어와 도율이 부부 행세를 할 때.
도율은 능숙하다 못해 뻔뻔할 정도로 태연하게, 클레어를 자기 아내라고 부르고 남편 행세를 해냈다.
카메라 앞에서도. 촬영에 들어가기 전엔 어색하고 쭈뼛거릴 것처럼 굴더니 남들에게 보여 줘야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곧잘 유들유들해졌다.
그럴 땐 괜히 자신만 곤혹스러워서 억울함을 느끼곤 했는데.
왜 지금은 또 그때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 주는 건지. 클레어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
그런 클레어의 물음에 도율은 천천히 보폭을 줄이다가 멈춰 서더니.
“처음입니다.”
“네?”
고개를 틀어 시선을 뒤로 보냈다.
“처음이라 생각하고 말한 겁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입에 올리던 남자가, 처음으로 행한 일이라고 한다면.
이제 막 달라진 관계에 대한 것밖에 없으니까.
“그…….”
말뜻을 이해한 클레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도율이 물었다.
“내친김에 좀 더 해 볼까요? 처음인 거.”
“네……!?”
도율의 표정이 잘 보이질 않았다. 장난으로 말하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지. 긴가민가했다.
이런 곳에서 물어본다고? 아니,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 놓고 또 장난이면 그냥 죽여 버릴…….
클레어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도율이 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요.”
도율의 손이 무언가를 기다리듯 가볍게 펴져 있었다.
클레어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기서부터……?”
한쪽 입꼬리를 경련하듯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