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single before returning RAW novel - Chapter 24
24화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해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몇 헌터들이 클레어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 인사를 받았다. 이런 일도 어느새 익숙해진 참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이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그런 일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던전 공략에 동료들의 끈끈한 유대가 필수라고 주장하는 건 구세대의 의견이었다. 최신 헌터 업계의 던전 공략은 해당 던전의 정보를 분석해 최적화된 상성과 특성을 가진 헌터들을 선별해 효율적으로 진행한다.
목숨을 걸고 던전 공략의 길을 개척하던 영웅들은 존경하지만, 시대가 변했다는 의미였다. 현재의 헌터 업계도 비즈니스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인 데다가 말수도 적고 실력과 재능까지 갖춘 그녀가 쉽게 말 붙일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녀에게 말을 거는 건 상당히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바보뿐이었다.
“수고했어, 클레어 씨.”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녀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늘었다. 때로는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게 될 때도 있었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그 변화를 기분 탓으로 여기고 넘어가던 정도에서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지경까지 도달했다.
“드디어 사회에 녹아드는 법 좀 배웠어?”
남들과 다른 말을 건넨 건 그녀의 아카데미 시절 동기, 주하린이었다. 몇 없는, 이전에도 곧잘 말을 걸어오던 헌터.
그녀가 쾌활하게 걸어오자 클레어가 눈매를 좁히며 반박했다.
“누가 들으면 제가 사회 부적응자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사회 부적응자? 그거 딱이다, 야. 완전 네 얘기야.”
“…….”
주하린이 웃는 얼굴로 과거의 그녀를 떠올렸다.
“옛날에 너 어땠는지 알아? 말 걸지 말라는 것처럼 인상 팍 쓰고 철벽 쳤잖아. 아카데미 시절 때부터 그랬지. 사적인 대화 금지. 공적인 대화 서면으로 처리. 할 줄 아는 말.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3개. 그때 너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얼음 여왕이었어, 얼음 여왕.”
“…나한테 그런 별명이 있었다고요?”
주하린이 킥킥대며 웃었다. 협소한 인간관계를 가진 클레어가 그 사실 관계를 확인할 방법은 요원해 보였다.
“졸업 후엔 그나마 표정이라도 풀어진 줄 알았더니, 몇 달 전부터 또 상판대기 구기고 다녔지. 그때 너, 옆에선 애들이 숨도 마음껏 못 쉬고 등도 못 펴고 다닌 거 알아? 그랬는데…….”
근래 들어 클레어는 변했다.
“너 요즘 분위기가 변했어.”
“제가요?”
“뭐, 이런 건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제일 정확한 법이니까. 사람들이 느끼는 바가 다르잖아. 그러니까 너한테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는 거고. 너도 느끼지 않아?”
클레어가 수긍했다. 요즘 인간관계에 한결 여유가 생긴 건 그녀도 느끼고 있었으니까.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주하린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달랐다. 이전엔 얼굴만 보면 짜증에 잔소리였다면, 요즘은 다 자란 아이를 보는 듯한 흐뭇한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변했냐… 니. 뭐, 물어볼 필요도 없지? 그거잖아, 그거.”
“그거?”
클레어는 주하린의 생략에 고개를 갸웃하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어깨를 들썩였다.
“결혼 말이야, 결혼.”
주하린이 시시덕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건 클레어가 왼손 약지에 낀 반지였다.
클레어는 그게 마치 남들에게 못 보여 줄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등 뒤로 감췄다.
“그, 그거랑은 관계없어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얼음 여왕이라 불리던 네가 동기 중에 제일 빨리 결혼할 줄은.”
“관계없다니까요!”
주하린은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겼다.
“게다가, 얼마나 소중하길래 아무도 안 보여 주고 꽁꽁 숨기는 거야?”
“그건…….”
“힌트만 줘 봐. 어떤 사람인데?”
“내가 그걸 왜 대답해야 하는데요?”
“서운하게. 내가 너 알게 모르게 커버쳐 준 게 얼만데?”
그냥 하는 소리 같진 않았다.
길드도 없이 활동하는 S급 프리랜서 헌터인 클레어. 업무량을 소화하는 건 매니저인 도은의 능력이었지만, 다른 세력과의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던 걸 중재하는 데에는 배경이 출중한 주하린의 도움이 있었다.
그때 과거의 자신은 뭐라고 했었지? 내가 언제 도와 달라고 했나요? 떠올려 보니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손절 당하지 않은 게 용했다.
“그러니까…….”
클레어는 도율에 대해 떠올렸다.
일단 외모나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금물. 그걸 밝혔다간 금방 정체가 들통날 게 뻔했다. 그럼 남들은 알지 못하는, 들어도 알 수 없는 내용을 골라야 했는데.
“…일단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해 주고, 매일 저녁에 마사지를 해 줘요.”
“가정적이네.”
“버려진 개를 주워 왔길래 키우고 있고요.”
“진짜?”
“내가 선물한 물건을… 나름 소중하게 갖고 다니는 것 같고요.”
“좋네, 그거 좋다!”
“그리고… 한 번은 말도 없이 사라진 적이 있었는데, 그거 때문에 난리가…….”
생각해 보면 그 사건 때문이었다. 클레어가 남들에게 결혼 사실을 밝힌 이유가. 도율이 또 이처럼 멋대로 사라지는 일을 막기 위해.
한 번만 더 멋대로 굴면 전 국민 앞에서 이름과 얼굴을 까발려서 어딜 가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게 해 주지. 그런 협박의 의미였다. 어차피 자신은 이제 잃을 게 없다. 그리고 도은의 바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얼 잃어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도율은 그 후에도 비상 상황을 틈타 게이트에 같이 입장하는 등 여전히 멋대로 굴고 있다. 그런 주제에 속은 능구렁이 같아서 말로도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자기 멋대로 굴고, 내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 안 듣는 것 같은……. 꿍꿍이는 수상하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어쩐지 나만 계속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게 하는…….”
클레어의 고개와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주하린은 그런 클레어의 모습에 다급히 물었다.
“그, 그래도 사랑하시죠?”
“사랑하냐고? 그 인간이 나를?”
그 질문에 클레어가 고개를 들었다. 한쪽 입가를 끌어 올리고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해요.”
주하린이 눈을 질끈 감고 후회했다.
괜히 물어봤다고.
“클레어 씨, 다음 스케줄 시간 다 됐는데요.”
그때 클레어의 매니저가 등장했다. 주하린도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새로 고용했다는 운전수 아르바이트 겸 잡일 전용 매니저.
클레어는 싸늘한 얼굴 그대로 매니저에게 눈빛을 전가했다.
오늘 저 매니저는 가시방석에 앉겠군. 클레어의 성격상 분풀이를 할 것 같진 않아도, 고용인의 기분이 불편하면 덩달아 불편해지는 게 피고용인의 비애였다.
‘…미안합니다.’
주하린이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자리를 피했다.
* * *
[이번 건은 진짜 중요해! 무조건 꼭 따야 해. 알겠지?]“노력해 볼게.”
[프로의 세계에선 노력이 아니라 결과로 말하는 법. 승전보를 기다리겠소.]“분부대로 합죠.”
오늘 일을 앞두고 도은이가 전화로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클레어 씨에게 맡기면 될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클레어 씨는 매사에 철저한 것처럼 보여도 한 가지 허술한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부분이었다.
기본적으론 식사에 관한 부분이 그랬다. 도은이에게 듣기로 클레어 씨는 끼니를 거르거나 젤 형태의 영양분만 섭취할 때도 잦았다고 한다. 그나마 도은이가 자주 챙겨 줬지만, 조금만 눈을 팔면 금세 이상한 걸로 끼니를 때운다는 거다.
요리사 아버지를 둔 집에서 사람은 세 끼를 챙겨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 아래에서 자란 우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식습관.
그런 못 돼먹은 식습관은 내가 매일 아침을 차려 주며 뜯어고치고 있다.
그 연장선에 있는 문제가 ‘오염도’였다.
던전이나 게이트에 출입하는 헌터들은 지속적으로 몬스터의 마력에 노출되어 본인의 마력이 탁해지는데, 이를 오염도라 불렀다.
나도 이게 충분히 위험한 일이란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마력을 내공으로 치환해서 생각해 보면 그게 탁해진다는 건 가장 피해야 할 일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헌터들은 주기적으로 오염도 측정을 하며 이를 낮추기 위한 방법들을 병행하는데, 클레어 씨도 이런 일이 필요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높은 등급의 던전에 입장하면 더 위험하니까, S급 던전 공략을 목표로 하는 클레어 씨는 더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게다가 내가 알기로 클레어 씨는 도은이에게 비밀로 하고 던전에 다닌 적이 있다. 일전에 주하린과의 대화에서 들은 내용이었다. 내가 온 이후론 그런 적 없었지만, 그때 쌓인 오염도까지 고려하면 이미 제법 아슬아슬한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클레어 씨는 태평하게 창밖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런 지루한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뭘 봐요.”
반응도 까칠하기 그지없다.
찍소리 않고 차나 몰았다.
오늘 우리가 방문한 곳은 라는 이름의 기업이었다. 불카누스는 업계 최고의 헌터 아이템 제조 공방 업체였다.
우리의 목적은 이곳에서 새로 개발한 오염도 정화 아이템.
새로 개발했다고 해서 양산할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장인급 제조 스킬을 가진 마이스터가 만들어 낸 레어 등급 아이템. 사실상 계약을 하러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그 아이템을 원하는 자들 중에 클레어 씨와 비교할 만한 이는 없었다. 같은 S급 헌터들이나 4강 길드에서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면 무난하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 도은이의 설명이었다.
로비에 들어간 후 카운터 직원에게 문의했다.
“이도율입니다. 미팅이 있어서 방문했습니다.”
“아, 네. 담당자분께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것과 클레어 씨의 방문증을 받고 잠시 기다리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남자가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울리며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박영훈 팀장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도율입니다.”
박영훈 팀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클레어 헌터님은……?”
바로 여기 있는데.
클레어 씨가 목걸이 아티팩트를 조작했다. 그러자 박영훈 팀장도 알아차렸다.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계셨군요? 뒤늦게 인사드립니다. 들으셨겠지만, 박영훈 팀장입니다.”
“클레어 컴벨입니다.”
클레어 씨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마친 후, 박영훈 팀장이 우리를 안내했다.
“회의실로 가서 대화 나누실까요?”
“예.”
사옥의 1층에도 외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회의 장소가 있었지만, 다소 오픈된 분위기였다. 우리는 그곳에 자리 잡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아 서류로 된 자료를 받아 읽어 내려갔다. 아이템의 상세 스펙이나 작동 원리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 자료였다. 음, 전혀 모르겠군.
그때 박영훈 팀장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먼 길 발걸음하게 만들어 놓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계약은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
나는 이마를 두드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천금이 들어도 좋으니 계약만 따 오라던 도은이의 말을.
“계약금이 문제인 거면 얼마든지 상향 조정을 할 수 있는데요.”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목소리를 죽였다.
“후. 어차피 숨긴다고 숨겨질 사실도 아니고, 시간 지나면 어차피 알게 되실 테니 지금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나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집중했다.
“갑자기 제3자가 거래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쪽 조건이 제법 좋은 모양입니다. 그쪽은 지금 사장님과 직통으로 계약 중입니다. 제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해도 어렵겠죠.”
“사장님과… 직통?”
“길드장급에서 나온 거죠, 그것도 거대 길드의.”
불카누스도 동네 구멍가게가 아니다. 이곳의 사장이라면 적어도 아무 소규모 길드의 길드장이 나선다 해서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상대는 아니다.
“이게 타이밍이 참 묘합니다. 꼭 클레어 헌터님이 계약하겠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움직인 것처럼…….”
“어떤 길드죠?”
“그건…….”
박영훈 팀장이더니 망설이더니 내 눈빛을 보고 대답했다.
“플레이아데스입니다.”
플레이아데스.
한국 헌터 업계의 4대 길드 중 하나.
그리고… 나를 납치했던 녀석이 고문 끝에 불었던 단체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렇군요.”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