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36
236화
이정이 의 J 역을 연기하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전투씬.
현실에는 없는 이능력을 가지고 싸우는 장면인 만큼, 아무리 CG가 있어도 자칫 어설프고 동떨어지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극의 초반 약을 먹고 도망치는 씬이나 예나를 지키려던 씬 등 두어 번의 전투씬이 있었지만, 이정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장면은 바로 조직과 그의 대대적인 전투씬이었다.
“저거 찍을 때 진짜 더웠는데….”
로만 칼라를 뺀 사제복을 입은 이정의 눈이 옅은 붉은 색으로 빛났다. 후처리된 CG가 연기할 땐 다소 심심했던 분위기에 효과를 더해주었다.
“그러고 보니까 본방 모니터링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트라우마를 극복한 뒤 현장에서의 모니터링은 종종 해왔지만, 이렇게 혼자서 본인이 출연한 드라마를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 다음 화를 찍고 있는 경우가 제일 많았고, 운 좋게 집에서 촬영이 없는 날이어도 본방송 날이 아니거나, 본방송 날이다 하더라도 민혁이나 지원 둘 중 한 명, 혹은 둘 모두와 함께 시청하곤 했다.
“어디 보자….”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본방송 모니터링을 하게 된 이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볼펜과 노트를 찾았다.
현장 모니터링에서 놓쳤던 부분이 있나 확인하고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을 적어두기 위해서였다.
“도 슬슬 준비해야지.”
아직 이정과 문세록 배우. 이렇게 두 사람만 확정되었고, 다른 배우들은 논의 중이라 아마 의 방영이 끝날 때까지는 여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까지 끝나면 진짜 쉬어야지.”
그가 쉬겠다고 하면 비웃는 지원이나 아닌 척하면서도 고개를 돌리는 민혁, 그리고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제발 진짜 좀 쉬어보라며 한숨을 쉬는 우재까지.
이정은 그들 때문이라도 꼭 휴식기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복학도 해야 하는데.”
최대 8학기까지만 휴학이 가능한 일반적인 학교와 달리 외부 활동이 잦은 한국대, 한국예대 학생들의 경우 활동 증빙만 가능하다면 최대 8년, 16학기까지 휴학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회귀 후 다시 찾아온 기회는 연기뿐만이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꼭 졸업할 생각이었다.
이정이 본격적으로 전투씬이 시작되는 드라마를 보고 볼펜을 한 바퀴 돌린 뒤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의 집에는 TV 소리와 메모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 * *
예나의 위치가 들켰다. 그녀를 안은 J가 건물을 뛰어넘었다.
“저쪽으로 간다. 잡아!”
“몰아! 몰아넣으란 말이야!”
같은 흡혈귀들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그 날카로운 목소리에 품에 안긴 예나가 움츠러들었다.
“걱정하지 마.”
J가 예나를 안심시켰다. 6년. 예나의 인생에서도, J의 인생에서도 결코 짧지 않았던 시간.
“보이는 거 있어?”
예나의 예지능력. 6년 전 J는 예나의 예지능력 때문에 목숨을 구했고, 또 예나를 지키려고 했었다. 전자는 성공했고 후자는 실패했으니 이번에야말로 후자를 성공시킬 차례였다.
“없어요.”
“진짜 없어?”
능력이 더 약했던 과거에도 위험을 감지했던 예나였다.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이 모두 죽거나, 예나가 일부러 말을 하지 않고 있거나.
J가 예나를 빤히 쳐다봤다.
한쪽 팔로도 들 수 있던 아이가 이제는 두 팔로 안아야 할 정도로 제법 자랐지만, 그래봤자 아직 아이. 거짓말에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이상한 아저씨가 보여요. 우리를 쫓고 있는 사람과는 복장이 다른데 아저씨랑 서로 아는 눈치에요. 나를 보고 놀랐어요.”
예나의 말에 J는 단박에 그 상대를 눈치챘다.
조휘. 이 상황에서 조직의 편도, J의 편도 아닌 애매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게다가 예나를 보고 놀란다니. J의 머릿속에 순간 수경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 조휘 씨랑 예나 말이야. 조휘 씨가 이렇게 생겼다면 예나는 동글동글하게 생기긴 했지만. 좀 닮지 않았어?
그때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갔지만, 이렇게 보고 있자니 정말 닮은 거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내는 죽고 딸은 실종이라고 했었나….’
어쩌면 처음으로 조휘의 감사 인사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J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기 있어.”
예나를 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곳에 내려준 J가 그녀에게 성수 꾸러미를 건넸다.
“맛없어도 하나는 마시고 하나는 몸에 뿌려. 그리고 누가 다가오면 그 사람한테 뿌려버리고. 알겠지?”
“응.”
“인간이나 이능력자들은 성수가 통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결계를 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J의 능력 밖이었다.
검은 사제복을 벗어 예나가 보이지 않도록 잘 둘러 준 J가 다시 한번 땅을 박차고 건물 위로 올라갔다.
“여기 있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끝이 없다. 조직원, 더 나아가 조직 그 자체를 잡아 버려야 했다.
기다림은 지난 6년이면 충분했다.
J가 눈으로 상대의 숫자를 셌다. 흡혈귀 셋, 이능력자 둘. 합이 다섯. 지난번에 봤던 이들은 없었다.
심호흡조차 하지 않고 1차 변형을 한 J가 먼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능력자부터 단번에 제압한다.’
예나를 바닥에 내려준 이유는 그녀를 숨기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이런 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도 있었다.
‘아무리 성숙한 아이여도 죽고 죽이는 걸 봐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J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달려들 줄 몰랐던 이능력자가 짧은 단말마를 내뱉었다.
“어어!”
그사이 J는 이미 그의 목덜미에 손톱을 꽂아 넣은 뒤 반 바퀴 돌아 이능력자 옆에 있던 흡혈귀에게 성수를 뿌렸다.
“크으윽!!”
성당에서 갓 가져온 따끈따끈한 성수는 흡혈귀 한 명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J에게도 몇 방울 튀어 그의 살이 타들어 갔지만, 6년간 십자가에 단련된 그에게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 않았다.
“흡혈귀 냄새가 진동을 해서 와 봤더니….”
짧은 사이 다섯 중 둘을 처리한 J와 상대가 대치하는 사이 예나가 예지능력으로 보았던 조휘가 자리했다.
J의 반대편에서 나타나 흡혈귀 한 명을 처리한 그가 알만하다는 듯 말했다.
“조직이구나.”
그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한 조휘가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이능력자들은 꺼져.”
이능력자들은 말 그대로 이능력이 있을 뿐 인간. 오직 흡혈귀들만을 목표로 하는 조휘에게 공격의 대상이 아니었다.
J는 그런 조휘의 곁으로 가 다른 흡혈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려가 봐.”
이제 이능력자 하나, 흡혈귀 하나. 한 명 붙잡아 조직으로 안내시킬 걸 생각하면 겨우 한 명 남았으니 이 정도는 J 혼자 할 수 있었다.
“…….”
조휘가 할 말은 아니지만, 같이 싸워도 모자랄 판에 자신을 내려보내는 J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래에 아이가 한 명 있어.”
조휘의 역린. 아이.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만큼이나 그는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물렀고 또 그들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네가 지켜.”
J는 예나의 정체에 대해 섣불리 말하기보다 조휘를 보내는 쪽을 택했다.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한에 미친 그의 딸이 예나가 맞다면 단박에 알아볼 테니까.
J를 힐끗 보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던 조휘가 훌쩍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밑져야 본전인 데다 없으면 다시 올라오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후….”
다시 2:1 대치 상황이 된 J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로 예나를 만난 이후로는 전과 달리 한숨이 부쩍 늘었다. 그럼에도 전보다 즐겁다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이능력자와 흡혈귀. 둘 중 어느 쪽을 단순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데려가는 게 쉬울까 재보던 J가 결정을 내렸다.
“2차 변형….”
같은 흡혈귀인 상대가 침음을 삼켰다.
흡혈귀들 중에서도 극소수만 가능하다는 2차 변형. J의 눈동자가 완전히 붉게 물들고, 길게 돋아났던 손톱은 다시 일반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오히려 압도적이었다.
“으윽….”
1차 변형도 겨우 하는 하급 흡혈귀인 상대가 J와 눈을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길게 끌면 안 돼.’
그러나 J의 상황 역시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그리 많은 힘이 들지 않는 1차 변형과 달리 2차 변형은 흡혈 욕구가 강해진다.
오랫동안 흡혈을 하지 않은 J가 2차 변형을 하지 않은 이유였다.
길 안내 상대로 흡혈귀를 고른 J가 재빠르게 이능력자를 공격했다. 인간의 피 냄새를 맡은 J의 포악성이 두드러지자 곁에 있던 흡혈귀가 털썩 주저앉았다.
“안내해.”
흡혈 욕구를 참느라 한층 험악해진 것뿐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상대 흡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다.
한편, 아래로 내려간 조휘는 검은 사제복에 둘러싸인 예나를 발견하고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렸다.
“예… 나?”
자신의 이름에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예나와 조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조휘는 확신했다.
예나는 실종, 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