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249
꿈동산(6)
이정이 나눠놓은 호빈의 감정은 총 일곱 가지로 지금까지 진행된 것은 총 세 가지. 적극, 소극, 그리고 머뭇거림. 이렇게 세 가지.
본디 호빈은 처음 처음 거점에 자리 잡았을 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며 적극적이었지만,
처음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는 일행을 생각하면서도 비교적 소극적으로 변했고.
강진호 패거리들의 폭력이 계속되자 망설이는 일이 많아지고 머뭇거리게 된다.
순수하고 올곧은 눈동자를 가진 채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던 모습은 어느샌가 줄어들고,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려 하며, 자신을 숨긴다.
이정이 그랬듯 각 상황을 잘라서 본다면 변화를 바로 알아챌 수 있지만, 영화 전체로 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방관, 무시, 당연, 그리고 다시 적극.
이렇게 네 가지로 그중 결말에 해당하는 마지막 ‘적극’을 제외하면 이미 지나온 것과 똑같이 세 개의 흐름이 남는다.
그중 가장 첫 번째인 방관은 호빈에게 있어 윤우영의 유지 자체를 끊어버리는 짓이었지만, 제 편이라 할 수 있는 윤우영과 혜인이 죽고 완전히 홀로 남게 된 호빈은 선택해야만 했다.
꿋꿋이 남은 일행들을 책임지며 살아갈지, 아니면 홀로 살아남을지.
그리고, 호빈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이제껏 모아뒀던 식량은 그냥 둘게요.”
호빈이 하루 치 식량과 간이 천막 재료, 그리고 빗물이 담긴 통 하나를 챙기며 통보했다.
혜인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함께 그룹을 책임지고자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나마 지금까지의 식량을 전부 가져가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호빈이 혜인과 윤우영의 유지를 이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
그녀가 죽고 남은 윤우영 그룹은 이제 넷. 그중에서도 호빈을 빼면 남는 것은 어린아이 한 명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둘뿐이었다.
여태 그룹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았던 노인은 그룹을 떠나려는 호빈을 텅 빈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믿고 의지했던 두 사람을 떠나보낸 호빈의 눈동자 역시 만만치 않게 공허했다.
“식량 필요 없으니까 영찬이 데려가….”
다른 노인 한 명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남은 아이를 부탁했다. 그의 친손주는 재해가 덮쳐오던 날 잃었지만, 그룹에서 만난 영찬을 친손주처럼 아낀 탓이었다.
“최영찬. 너는 강진호 쪽으로 가. 가서 네 한 몫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받아달라고 빌어.”
호빈은 강진호 그룹에 낄 수 없다.
강진호 패거리 중 일부가 강진호 몰래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도 있지만, 떠난 태인 그룹이 그렇듯 윤우영의 죽음이 호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혀, 형이랑 같이 가면 안 돼요?”
“나랑 같이 다니면 너도 처맞을걸.”
이제는 전과 달리 순순히 맞아 줄 생각은 없었지만, 영찬을 책임지는 것은 아예 별개의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충고해주는 거야, 굶어 죽고 싶지 않으면 강진호 쪽으로 가.”
호빈이 울먹거리는 아이를 단호하게 쳐냈다.
이제부터 그는 자신의 생존을 가장 우선시할 생각이었다.
“남을 우선시해봤자 남는 건 하나도 없어.”
호빈이 천막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자신보다 남을 챙기기 일쑤였던 윤우영과 혜인이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강진호 패거리 이들보다 먼저 죽었다.
“내가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야.”
마치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호빈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호빈은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 * *
“퉤.”
호빈이 고개를 돌려 피 섞인 침을 뱉어냈다. 다듬지 못해 덥수룩한 머리가 고갯짓을 따라 흔들렸다.
“요즘은 좀 덜하네.”
호빈의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식량을 훔쳐 가려던 강진호 패거리와 한판 한 참이었다.
호빈이 윤우영 없는 윤우영 그룹을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진호 그룹이 윤우영 그룹의 남은 식량을 강탈해갔다.
사실, 식량을 두고 왔던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그럼에도 호빈이 욕심껏 식량을 챙기지 않은 이유는 식량을 지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빈은 식량을 빼앗기는 노인들을 위해 나서지 않고 그대로 방관했다.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식량을 구하지 못했던 두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날, 하루 종일 선득한 기운 한줄기가 호빈의 마음을 괴롭혔지만, 그는 죽은 그들의 시체를 묻어주는 것으로 그 마음을 떨쳐냈다.
어쩌면 먼저 거점을 떠난 태인 일행이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그들이 거점을 떠나 더 나은 환경을 찾았는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호빈은 영영 알 길이 없었다.
예상외였던 것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강진호 패거리들이 정말로 영찬을 데리고 갔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진짜 식량이 없긴 한가 봐.”
태인 일행처럼 거점을 벗어날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거점 근처의 식량은 이제 바닥을 보이는 추세였고, 평생 이곳에서 살 수 없다면 새로운 거점이나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
“젠장.”
먼저 거점을 떠난 태인도 현재의 거점을 찾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에 이 거점을 떠나기까지 수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윤우영이 사망한 뒤, 태인은 강진호 패거리에게 흡수되지 않고 새로운 그룹을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즉 이제까지 윤우영이었기에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왔던 룰이 완전히 깨지는 것과 같았다.
즉, 두 그룹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태인이 먼저 위험을 감수하고 떠나는 쪽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툭하면 땅이 무너져내리는 거점 밖을 단 한 명의 동료 없이 떠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거점은 안전지대임과 동시에 고립된 공간이었다.
냉정하게 손익을 따져 당장 거점을 떠나는 것보다 잔류하는 것이 더 생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호빈이었지만, 강진호 패거리가 그 모습을 좋게 볼 리 없었다.
“식량 하나가 아까운 판에… 야, 꺼져.”
처음에는 이제껏 무기력한 모습으로 반항조차 하지 않는 호빈의 모습을 예상하고 대충 그를 내쫓고자 했지만, 호빈은 완전한 무시로 답을 대신한다.
“…….”
“좋은 말 할 때 꺼져라. 응?”
“…….”
호빈은 마치 윽박지름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태연했다.
참다못한 그들이 폭력을 행사했을 때, 호빈은 이제까지와 달리 제대로 맞부딪혔다.
그리고, 패한 것은 강진호 패거리들 쪽이었다.
그들이 수적으로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호빈의 반항이 이렇게까지 거셀 줄은 모른 채 방심한 탓이었다.
“완전 미친놈 다 됐다니까요?”
“야야, 약도 없는데 다치기만 하면 우리 손해야.”
혹시 문제가 생길까 그저 맞아주기만 했던 전과 달리 호빈이 필사적으로 강진호 패거리들에게 맞서기 시작하자, 그들도 들이는 노력 대비 소득이 낮은 호빈을 미친놈 보듯 하며 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실상 강진호 그룹이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는 거점에서 하나뿐인 예외가 된 호빈이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으적 씹으며 중얼거렸다.
“배고파….”
배부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양껏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남는 게 의미가 있나….”
강진호 패거리들의 악탈을 방관하고, 시비를 무시하고, 그들과의 싸움이 당연해진 지금이지만, 오히려 얻어맞기만 하던 그때보다 더 피폐해졌다.
불빛 하나 없는 밤바다를 헤엄치는 듯한 기분에 호빈이 식량을 씹던 것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윤우영과 혜인이 죽고 그는 때때로 무른 지대에 그대로 파묻히는 상상을 했다. 늪지대가 발끝부터 그를 좀먹어 결국 서서히 죽어가는. 그런 상상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식량을 씹어 삼킨 호빈이 딱딱한 바닥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지긋지긋한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갔다.
다음 날.
호빈은 매일 그랬던 것처럼 수색을 나갈 채비를 했다.
특별히 더 나은 생존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기보단 붙어있는 목숨이기에 당연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처럼 설렁설렁한 움직임이었다.
“뭐 좀 구한 거 있어?”
“이젠 아예 바깥쪽으로 나가봐야 할 거 같아.”
“그쪽은 위험한데….”
천막 틈 사이로 강진호 패거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진호 패거리가 1차 수색에서 돌아온 후 2차 수색을 나가기 전. 그사이가 바로 호빈의 수색 시간이었다.
강진호 패거리들의 말을 머릿속에 담은 호빈이 천막을 젖히고 수색을 나가려던 순간, 지긋지긋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때렸다.
― 툭, 투둑
“하아… 또 비야. 오늘은 공쳤다.”
“아… 이번엔 또 며칠 가려나….”
처음에는 식량 확보보다 더 어려운 식수 확보를 할 수 있는 데다 대충이나마 몸을 씻을 수 있어 환호했던 것도 잠시, 윤우영과 혜인을 집어삼킨 비는 그 뒤로도 종종 내렸다.
그럴 때마다 거점 바깥쪽의 건물들은 종종 무너져 내린 것은 다른 문제였다. 거점의 안전선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글렀네.”
호빈이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배낭을 스르륵 아래로 떨어뜨렸다.
질척해진 땅과 쉽게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
일행 중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잃은 호빈은 빗줄기가 세지 않으면 종종 수색을 나가는 강진호 일행과 달리 결코 수색을 나서지 않았다.
“몇 명이 비는 거 같은데?”
시간상으로라면 1차 수색대가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어야 하는 시간. 그러나 몇 안 되는 수를 눈으로 확인한 강진호가 제 패거리들에게 물었다.
“아직 안 온 사람 누구야?”
“아, 꼬맹이”
그 순간, 제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호빈의 귀에 인원을 체크하는 강진호 일행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맹이가 없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