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touch it, it'd all be profit RAW novel - Chapter (197)
“예. 모든 병원, 모든 환자에게.”
빈 살몬의 눈빛도, 목소리도.
허풍이 아니라 진심을 담고 있었다.
“저희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도시,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소명을 다하는 데에 >메디코코>가 제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좋아, 빈 살몬의 의지는 확인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현실적인 조건들이 맞아야 했다.
살짝 발을 뒤로 빼보았다.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 기술은 아직 상용화 검증 단계, 완벽하지 않습니다. 미완성인 셈이죠.”
가장 중요한 방지턱.
이것만 넘으면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 고속도로였고.
“하하하, 괜찮습니다. 저희 도시는 이제 기둥뿌리 짓고 있는데 상용화 검증 단계면 충분하죠. 다 미래를 보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원하던 답이 돌아왔다.
빈 살몬은 제 목덜미를 매만지며 덧붙였다.
“게다가 제가 직접 효과를 보지 않았습니까? 주치의가 그러더군요. 의사들 의견이 분분했는데 >메디코코>가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되었다고.”
글쎄요, >메디코코>보다는 오진 리포트 때문일 걸요? 그놈이 그놈이지만.
어쨌든 >메디코코>에 대한 신뢰는 굳건한 상태. 나는 자신있게 답했다.
“좋습니다. 도시 완공이 2030년이던가요? 그전까지는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봉이 김선달이 되어보겠다고 여기에 왔지만.
정말 사기를 칠 생각은 아니었다.
>메디 프리딕트>는 AI 질병진단 기술에 있어서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유망하다고 평가받는 회사.
그 기술력에 우리 탐코코의 피드백을 더하고, 「도미노」로 만든 선행기술을 스리슬쩍 넘겨준다면? 2030년까지 개발을 마치기엔 충분했다.
‘잘 안 돼도 내가 수작업 좀 하면 되고.’
즉, 지금 이 순간부터.
>메디코코>는 더 이상 유령이 아닌 것.
그런데.
빈 살몬은 한술 더 떴다.
“아니, 그렇게 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2030년은 일종의 슬로건입니다. 현실적으로 좀 더 넉넉하게 봐야 할 겁니다.”
뭐야, 이 사람도 김선달이었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그 신도시 프로젝트가 비현실적인 공상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꽤나 있었다. 입지 구축를 위한 프로파간다일 거라는 음모론도 있었고.
‘오히려······ 내가 당하고 있는 건가?’
엄습하는 불안감.
그치만.
나는 어차피 밑져야 본전.
빈 살몬에게 현실적인 조건을 물었다.
“그럼 저희 기술에 대한 라이센스 계약 형태일 텐데. 조건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물음에, 빈 살몬은 덥수룩한 턱수염을 긁적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한 번 허튼 소리만 해보세요.’
구체적인 조건은 추후에 조율하자, 비용은 시스템이 실제 도입된 후에 지불하겠다, 같은 소리가 나온다?
그럼 그냥 없던 일이지.
오스만 제국이랑 사우디랑 무슨 관계길래 터키랑 그렇게 으르렁대냐, 축구는 우리나라가 더 잘하지 않냐, 잡답이나 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선 착수금으로 5억 불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 정도면 개발 일정에 차질은 없겠죠?”
상상도 못한 답변을 내놓고.
씨익 웃는 빈 살몬.
‘······5억 불? 6500억?’
미스터 에브리띵?
그건 노름으로 얻은 별명이 아니었다.
*
병원 주차장.
차에 앉아서 미팅을 복기하는데.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대체 이 세상 누가 그런 천문학적인 액수를 명절날 조카 용돈 주듯 턱턱 제시할 수 있겠는가.
‘역시 기름 장수가 최고야!’
>메디코코>와 >사우디 비전 2030> 기술협약.
일단 착수금만 5억 불.
한화로 6000억 원.
사무엘에게 >메디 프리딕트>의 수익모델을 물어보면서 기술 라이센스 계약에 착수금이 있다는 건 들었다.
그런데 5억 불?
그게 어떻게 착수금이냐······.
[ 세계 최고의 의료 도시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하하하. ]5억 불이면 >메디 프리딕트>를 인수하고도 한참 남고, 연구개발비로 몰빵해도 더 남을 금액이었다.
심지어 러닝 로열티 조건도 대박.
일단 내 제안은 병원 수익의 10%.
>메디 프리딕트>에서 구상한 수익모델, 업계표준을 그대로 전한 것이었고.
[ 좋습니다. 저희 둘 다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빈 살몬은 흔쾌히 오케이했다.
너무 시원시원해서 의심이 될 정도였기에 재차 확인했다.
병원이 적자가 날 경우를 대비해서 최저 로열티 조항도 있었으면 한다고. 그랬더니 그것도 오케이.
더 세부적인 건 실무자와 협의하기로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딜이었다.
‘내가 로열티 장사를 하고 있네, 크큭.’
물론 우리 >메디코코>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오진율 0%, 완벽한 진단을 할 수 있는 회사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퓨퓨!
──코로로로!
그치?
너희가 보기에도 그렇지?
‘히히.’
사실 오진 리포트로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김치호에, 박민석 부모님 일에, 이연수 일까지 겪으면서 조금씩 피어났던 생각.
내게 우연히 찾아온 이 복덩이들과 함께.
내 배만 채우는 게 아니라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
그런데 그렇게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사람이 이래서 마음을 곱게 쓰고 살아야 하나 봐.’
어쩌면 내 모든 사업을 합쳐도.
이 의료사업의 수익을 못 당해낼 것 같다는 예상이 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어뮤즈 5번 타자의 화려한 등장.
좀 모자라고 바보 같은 면이 있어서.
선풍기처럼 붕붕, 헛스윙을 해대지만.
결국 초장거리포를 쏘아 올리는 다이너마이트.
>메디코코>였다.
좋은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이보다 더 이상적인 사업이 있을까.
‘지금 내 기분 탐코코야······.’
그러나 아직 방심은 금물이었다.
>메디 프리딕트> 인수도 차질없이 해야 했고, 세계 최우수 개발 인력들도 더 끌어모아야 했다.
그래야 탐코코의 신묘함.
그 발치에라도 닿을 수 있을 테니.
‘해보자. 못 할 거 없어.’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오시지? 올 때가 됐는데.’
만나기로 한 시간은 벌써 지났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난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슥슥 훑어봤고.
조금 뒤, 주저하며 다가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오셨네.’
철컥─
그렇게 조수석에 올라탄 남자는.
바로 흉부외과 과장, 박호종 교수.
“안녕하세요, 박 교수님. 처음 뵙네요.”
“예······ 신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이제, 내부의 소음을 잠재울 차례였다.
내가 드래곤을 낳게 생겼네
어두운 주차장.
앞만 주시하며 앉아 있는 두 남자.
그리고 정적.
“······.”
“······.”
어색해 뒤질 것 같았다.
박호종이 고쳐 앉을 때마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도 신경 쓰였고.
그치만 일부러 잠자코 기다렸다.
결국 입을 달싹이던 박호종이 먼저 물었다.
“······보자고 하신 용건이 뭡니까?”
휴······.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박 교수님이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제 그렇게 티를 냈는데?
“그게 무슨······.”
“아닙니까? 아니면 돌아가시면 됩니다.”
“아뇨······ 있습니다.”
“예, 그럼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러자 일순간.
박호종의 안경테가 반짝였다.
“저희 병원으로 오던 오진 리포트, 신 대표님도 아시죠?”
“예, 이사회에서 들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만. 그동안 그 모든 오진 리포트를 신 대표님이, 아니, >메디코코>에서 보낸 겁니까?”
그래, 알아보셨구나.
역시 이 사람을 선택하길 잘했다.
사실 요즘은 오진리포트를 보내면서 오히려 들키려고 애를 썼다. 김종수한테도 추적이 가능한 방식으로 이메일을 보내라고도 했었고.
그러나 병원 측에서는 전혀 낌새도 못 차리고 감감무소식이었다.
‘답답했지.’
그런 짓을 했던 이유는 단 하나.
>메디코코>를 완전히 믿고 따를 추종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메디코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내부 반발이 있을 건 자명했고. 그 잡음을 억제하고, 성공적으로 시스템을 연착륙시켜줄 사람이 필요했다.
병원 내부에서도 파워를 가지고 있고.
오진리포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
‘회장님 추천도 있었지.’
내가 >메디코코> 협업 담당자로 박호종을 콕 지목한 이유였다.
그러다 마침 어제 먼저 협조 요청이 왔길래 직접적인 힌트를 숨겨놓았는데.
박호종은 그걸 놓치지 않고 캐치해낸 것.
‘매의 눈이신가.’
그렇지만.
나는 모른 척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박호종이 날 신뢰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순순히 불었다가는 자칫 쇠고랑을 찰 수도 있었으니까.
“······제가 >메디코코>에 진료기록을 보냈을 때. 아직 MRA 검사결과가 나오기 전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박호종은 흠칫, 혼자 몸을 떨더니 말했다.
“그런데 몇 분 뒤에 바로 MRA 검사결과지가 나와서 다시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이미 >메디코코>에서 리포트가 도착했더군요.”
“아, 그랬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적혀있더군요. MRI, MRA 검사결과에 나타난 이상소견을 바탕으로 사후확률을 분석한 결과, 환자의 급성 뇌경색 위험도는 극히 낮으며······.”
맞아, 그럴싸하게 쓰느라 죽는 줄 알았었지.
“그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메디코코>에서 어떻게 MRA 검사결과지를 제가 보내기도 전에 입수했는지. 계속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제는 급박한 상황이라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죠.”
박호종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오진 리포트를 보낸 사람과 동일인이라면······ 가능하겠다.”
“아······.”
“해킹이든, 내부 유출자가 있든, 방식은 모르겠지만. 평소 진료기록을 빼내던 사람이라면 검사결과지도 미리 입수할 수 있었겠다.”
아주 좋은 추론이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글쎄요. 저는 이메일 발송만 했지, 제가 자료를 만든 건 아니라서요. 저희 담당자가 오타를 낸 게 아닐까요?”
“아니······ 심지어 두 리포트 진단 결과도 완전히 똑같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전 오진 리포트를 못 봐서 모르겠습니다.”
“하아······.”
박호종은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렇게 시치미를 떼니 본인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
그렇지만 박호종은 여기에서 그칠 위인이 아니었다. 적어도 「매의 눈」에 따르면 말이지.
[ 서울중앙병원 박호종 교수는 의문의 오진 리포트를 완전히 신뢰한다. ] 참. [ 서울중앙병원 박호종 교수는 인공지능 질병진단 시스템을 병원에 적극 도입하고자 한다. ] 참. [ 서울중앙병원 박호종 교수는 오진 리포트 발송자가 법적 처벌을 받길 원한다. ] 거짓.아니나 다를까.
박호종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세차게 처들었다.
“>메디코코>······ 병원장이 반대하는 거, 알고 계십니까?”
아, 그래?
병원장이?
“몰랐습니다.”
“그냥 반대도 아니죠. 병원장은 이 시스템, 어떻게든 무산시킬 생각입니다.”
“그런가요······.”
아직 회장님 선물맛을 덜 보셨나.
조만간 한 번 찾아봬야겠어.
“아마 저도 반대했을 겁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AI 질병진단? 잡기술이라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겠죠. 그런데 이젠 달라졌습니다.”
내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박호종.
그 눈동자에서 뭔가 이글이글거리는 게 독수리 같았다.
“>메디코코>가 오진 리포트 수준의 정확성을 담보한다면······ 저는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이 병원, 우리 환자들을 위해서.”
그래, 이거였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
그런데.
하나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겠지.
“교수님.”
“네.”
“혹시 녹음기 켜져 있습니까?”
“······예? 무슨 말씀입니까?”
“폰은요? 화면 잠깐 보여주실래요?”
“······아. 당연하죠, 확인해보십쇼.”
그렇게 내보인 폰 바탕화면에는.
꼬맹이 하나가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 귀여운 애는······.”
누구냐고 물어보려다 말을 멈췄다.
[ 아빠 잘 해낼게 ] [ 늘 지켜봐 주렴 ]배경에 적힌 애달픈 문구만 봐도 어떤 사연인지 알 것만 같아서.
“아닙니다.”
“네······.”
이제 됐다.
나는 박호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교수님,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아니, 아직 저희 이야기가─”
“내일 리포트도, 꼼꼼히 살펴보셔서 아무쪼록 환자분들 치료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아······.”
밖으로는 사우디 왕세자의 금빛 지원사격.
안에서는 실력파 참의사의 지지.
거기에, 실리콘밸리에서 날아올 첨단기술까지.
단 하루만에.
>메디코코>는 완벽하게 이륙 준비를 마쳤다.
“알아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신 대표님.”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박 교수님.”
목표는 오진율 0%.
그 뒷일은 이들의 손에 달려있었다.
*
며칠 뒤, 아침.
영하권에 머무는 날씨 탓에 장갑에 패딩 조끼까지 챙겨들고 집을 나서는데 국제전화가 왔다.
“오, 어떻게 됐어요?”
>메디 프리딕트>와 의견을 조율하던 사무엘이었다.
[ 2억 7천만 불. 그 이하는 절대 안 된답니다. ]2억 7천만 불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3500억쯤······.
“꽤 완고하네요?”
[ 그쵸. 내부적으로 꽤 자신있는 모양이더군요. 프로토 현장평가 결과가 잘 나와서 금방 실용화 가능할 것 같다고. ]에이, 그래도 아직은 암 진단밖에 안 되잖아.
우리 탐코코는 질병분류기호 붙은 건 다 찾아낼 수 있는데.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착착 개발하고 있다면 나한테도 호재지.
“그렇군요. 아, 그건 물어보셨어요? 개발진들 한국 거주 괜찮냐고.”
[ 예, 역시 어렵다는 답이 많았습니다. ]“네, 이해합니다.”
역시 >메디코코>는 실리콘 밸리로 가야 할 운명인가. 기존 개발자들 줄 퇴사해버리면 인수하는 의미가 없을 테니까.
드래곤 에그를 훔치려고 했더니.
내가 드래곤을 낳게 생겼네.
아니, 입양인가?
“알겠습니다. 그럼 2억 7천만 불로 우선 합의하고, 인수 절차 밟으시죠. 인수 주체는 >메디코코>로.”
[ 알겠습니다. 그런데······ 2억 7천만 불,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사무엘 입장에서는 제기할 법한 의문이었다.
내가 거액을 융통하는 투자자인 것도 알고.
>빌인에어> 엑싯으로 9천만 불 돈벼락을 맞은 것도 알지만.
2억 7천만 불은 스케일 자체가 달랐으니까.
근데 2억 7천만 불에 탐코코 프리미엄 얹어서.
빈 살몬이 제시한 착수금만 5억 불이에요.
거기 인수하고도 2억 3천만 불이 남는다고요.
“가능하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질질 끌 것도 없었다.
빈 살몬과 기술거래 협의를 마치고, 내가 미국 출장 갈 수 있을 때쯤.
“다음 달 중순, 늦어도 다다음달 내로 끝내죠.”
[ 알겠습니다. 제 수고비 잊지 마십쇼, 하하. ]“아, 당연하죠!”
우리 미국통 아저씨.
김치사발면으로 퉁치기에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계시니까 제대로 사례해드려야지.
[ 기대하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1층 로비를 나섰더니.
곧 서울숲 입구가 나타났고.
‘아······.’
모자와 마스크로 온 얼굴을 가려도.
남다른 아우라가 하얀 입김처럼 피어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선하게 그려지는 한 사람이 몸을 풀고 있었다.
날 못 봤길래 부를까 하다가.
한걸음에 달려가서 그대로 안았다.
“왁!”
“히히.”
“아······ 깜짝 놀랐어.”
오랜만에 아침 조깅을 함께 하기로 한.
민채연이었다.
“왜 이렇게 반갑니.”
“나도.”
“왜 이렇게 귀엽고.”
“······오빠도.”
냉기에 차가워진 머리칼조차 따스해서.
정수리에 대고 마구 볼을 비볐다.
영화 촬영만 끝나면 자주 볼 줄 알았지.
그치만 나도 그렇고, 채연이도 그렇고 뭐 이렇게 일이 많은지.
그렇게 겨우겨우 얼굴 볼 때마다 우리 집에서 재우고 싶었는데, 또 거기 아버지가 워낙 험하셔야지······.
‘검사님이야, 검사님.’
나랑 결혼을 약속한 걸 알고는.
오히려 더 빨리 퇴근해서 맨날 채연이만 찾는다고 했다.
그렇게 부활하게 되었다.
겨울철에는 쉬기로 했던 아침 조깅 약속이.
“이제 갈까?”
“이거······ 놔줘야 가죠?”
“아, 이대로 뛰기 힘든가?”
“으음, 잘하면 될지도? 헤헤.”
되긴 뭐가 돼, 이 녀석아.
얼른 팔을 풀어주고, 마주 섰다.
“몸 풀던 거 마저 풀어. 나도 따라할게.”
“좋아요, 그럼 다시 처음부터.”
그렇게 같이 무릎도 들어올리고.
발목도 풀어주면서 물었다.
“그러고 있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어?”
“그렇던데요?”
“어떻게 모르지? 다 가려도 빛이 나는데.”
“에이, 이러고 있는데 누가 알아봐요.”
아닐 걸. 영화 개봉하고, CF도 몇 개 더 찍고 나면 진짜 다 알아볼 걸.
어차피 그때쯤 되면 이렇게 비밀 연애할 일도 없겠지만.
“그런데 오빠.”
“응?”
“우리 크리스마스 계획······ 아직 없잖아? 그래서 내가 좀 짜봤는데─”
“아니, 있는데?”
“있다구요?”
나는 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 예약했어.”
“와, 호텔이에요?”
“응. 사람들 많은 데는 못 다니니까.”
“나도 호텔 생각하고 있었는데! 근데 여기 뷰 엄청 좋다······ 한강 근처 호텔이에요? 내부도 엄청 예쁘네?”
사진을 넘기며.
안 그래도 땡그란 눈이 더 커진 민채연.
꽤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응, 한강 근처야.”
“호텔 어딘데요?”
“그건 비밀.”
“에······ 검색하면 금방 나올 거 같은데.”
크큭, 검색해 봐.
이런 호텔이 나오나.
“근데 여기 오빠네랑 좀 비슷한 거 같은데?”
엌······ 은근히 예리해.
나는 얼른 폰을 뺏어들었다.
“아냐, 뷰 높이가 아예 다르잖아. 그리고 여긴 거실도 복층이고.”
“맞아, 다른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아.”
아냐아냐.
“암튼! 크리스마스 계획, 아침부터 밤까지 다 세워뒀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요? 그럼 오빠만 믿고 간다?”
그럼.
나만 믿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거든.
*
민채연에게 크리스마스 이브란.
빨강, 초록으로 물든 예쁜 길거리.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쇼핑몰 이벤트.
가족들과 모여 서먹서먹하게 꾸미는 크리스마스 트리.
그 정도의 의미였다.
그런데 이렇게 옷을 고르고 집을 나설 때부터.
설레고, 가슴 벅찬 날일 줄이야.
‘빨리 보고 싶어······.’
마음이 자꾸 휘핑크림처럼 들떠서.
더 조심조심, 예민하게 운전하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
약속장소는 >세인트 한강포레> 주차장.
거기에서 신유원 차로 갈아타고, 호텔로 가는 일정.
사람들 눈에 안 띄려고 생긴.
둘만의 데이트 루틴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남아있는 의문은.
예약한 호텔의 정체.
어딘지 알면 거기에 맞춰서 뭔갈 준비하려고.
틈날 때마다 검색해봤지만.
‘절대 안 나오던데.’
한강변에 위치한 호텔 중에 신유원이 보여준 사진과 똑같은 곳은 없었다.
‘한강이 아닌가?’
아니, 그럴 순 없는데.
이 오빠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역시 종잡기 어려운 사람이야, 생각하는 사이.
들어선 주차장.
주차공간이 여럿 비어있는 곳에 차를 대고.
조심스럽게 폰을 두드렸다.
[ 민채연: 나 도착했어요 ] [ 신유원: 고생했어요 바로 옆에 댈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더니.
스르르, 옆자리로 들어오는 검은 포르쉐.
‘히히······.’
처음엔 이렇게 만나는 게 되게 어색했는데.
자꾸 하다보니 더 스릴 있고 짜릿했다.
로미오와 쥴리엣이 된 기분이랄까.
철컥─
차 문을 열고 나가서.
찰각─
바로 옆 조수석 문을 열고, 다이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