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51
250화
촥.
어두운 공간 속, 벽 쪽의 스크린에 한 남자의 얼굴이 띄워졌다.
“이 남자인가?”
“예. 이사님.”
“흠…….”
‘이사’라고 불린 중년 남자가 화면 속의 젊은 남성을 유심히 살폈다.
남자는 맞은편의 한 여자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컴퓨터를 조작하던 부하 직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선생의 ‘공리회’가 괴멸한 데 크게 관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추정이라. 2주가 지났는데 아직 추정이란 단어를 뱉는군.”
“죄, 죄송합니다. 거의…. 아니. 확실한 정보입니다. 이주혁. 이자가 공리회를 무너뜨렸습니다.”
“쯧. 허술하긴. 고작 경호업체 따위에게 무너지다니.”
혀를 찬 이사가 부하 직원에게 물었다.
“그자 조직은 됐고, 선생의 생사는 아직 불명인가?”
“예. 하지만 현장으로 파견됐던 H 이사님도 연락이 두절된 것으로 보아…….”
“선생도 사망했다, 이건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네 개인적인 생각 말고, 확실한 사실을 가져왔으면 좋겠는데.”
확!
냉기가 담긴 말에 부하 직원이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근방을 철저히 조사 중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흠. 선생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 문젠데……. 아, 자네는 이만 가봐도 좋네.”
“예. 이사님.”
달칵.
넓은 공간에 혼자 남은 이사는 뒤로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이주혁이라…….”
만약 선생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조직을 무너뜨린 이주혁이라는 남자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재밌는 놈이군.”
* * *
강화도 근처의 한 작은 무인도.
거기엔 오두막 크기의 작은 은신처가 존재했다.
“fxck…….”
금발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영어로 욕을 지껄였다.
남자는 30대 정도의 상당한 미남이었지만, 행색이 그리 깔끔하진 않았다.
슥슥.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남자가 침대 위에 여러 장비를 몸에 달고 누워있는 이를 보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 일어나는 건지…….”
금발 외국인의 이름은 헨리 가필드.
그를 아는 자들에게는 ‘H’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춘식이 쏜 총에 머리를 맞긴 했으나, 방탄모의 성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신 이마에 큰 상처와 더불어 혹이 나긴 했지만 말이다.
H는 이마를 두른 붕대를 매만지며 이를 갈았다.
자신을 쏜 그놈.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다시 돌이켜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도살자(Butcher). 그 망할 놈을 한국에서 마주칠 줄이야.’
H의 기억 속에는 DS컴퍼니 내에서 인간 도살자라 불리던 남자의 얼굴이 똑똑히 남아있었다.
상황이 개 같이 돌아가긴 하나, 이대로 복귀하는 데만 성공한다면 엄청난 정보와 성과를 얻어갈 수 있으리라.
“후.”
H는 슬슬 말라가는 입안을 느끼며 침대에 누운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 슬슬 일어나지, 그래.”
민지훈. 분명히 그는 이주혁 앞에서 심장이 멎었다.
사망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민지훈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었다.
약물을 통해 호흡과 맥박이 거의 제로까지 떨어지는 가사 상태에 빠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동공 반사까지 확인했다면 민지훈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깨달았겠으나, 생화학 무기가 살포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가정까지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주혁은 혹시 몰라 가사 상태에 빠진 민지훈을 바다에 던지라 했고, 그 탓에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것이다.
“제기랄.”
H도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청결과 미를 중시하는 그로서는 이런 무인도 생활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물도 다 마셔가고, 맛 더럽게 없는 음식도 떨어져 간다고. 이렇게 깨어나지 않는 건 계약 조건에 없었잖나.”
혹시 이대로 민지훈이 영영 깨어나지 않기라도 한다면, H는 그대로 끝장이다.
“대소변까지 받아가며 버텼다. 죽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야…….”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의자에 턱 앉던 H의 뒤에서 작은 신음이 났다.
“으음…….”
홱!
H는 벌떡 일어나 민지훈의 상태를 살폈다.
많이 야위고 창백하긴 하지만,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저, 정신이 좀 드나?”
“흐…….”
민지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에 H는 화색이 되었다.
본사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는데 굳이 혼자서 민지훈을 돌본 이유가 뭔가.
바로 민지훈에게 빚을 지워 자신에게 협력하게 만들고, 그의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 본사의 대표 자리까지 노리는 것.
H는 컴퍼니의 수장이 되어 ‘서클’의 권력을 누린다는 희망찬 생각을 하며 민지훈에게 말했다.
“자. 이제 슬슬 시작하지.”
* * *
부웅-.
나는 회사를 향해 액셀을 밟으며 고민에 빠졌다.
‘호칭은 어떻게 하지?’
우재성의 용건은 어차피 가면 말해줄 거고, 중요한 건 이거다.
유나 씨를 ‘유나 씨’라고 너무 많이 부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존댓말이라 조금 거리감이 있기도 하고.
솔직히 그냥 이름을 부르는 게 제일 편하긴 한데, 아무래도 그건 무리가 있었다.
내가 전생에서 마흔까지 나이를 먹긴 했지만, 나이가 리셋된 탓에 지금은 유나 씨보다 한 살이 어린 상황이다.
연장자로 대하기엔 난감하다 이거지.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리 생각해도 당분간은 그냥 유나 씨라고 부르는 게 낫겠어.’
이제와서 다르게 부르면 괜히 어색할 것 같다.
나중에 편해졌을 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끼익-.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회사 앞에 도착했다.
그나저나 우재성은 왜 급하게 나를 불렀을까.
전화로 할 내용은 아니라길래 바로 달려오긴 했는데.
‘민지훈 그놈이랑 관련된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네.’
그놈이 경찰이 오지 못하게 통제하긴 했는데, 혹시 거기 쓰러져 있던 깡패 놈들이 자리를 뜨면서 눈에 띄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경찰서로 달려가 이주혁이 그랬다면서 신고했을지도.
박건 팀장한테 그런 언질은 받은 건 아닌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자면 그렇다는 거다.
저벅.
그렇게 우재성의 사무실로 가기 위해 로비를 지나가는데.
“어? 대표?”
“고상미 씨? 여기서 뭐 해요?”
“아니, 뭐 사람 없나 하고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지.”
“무슨 맹수도 아니고, 왜 텅 빈 회사를 어슬렁거리면서 사람을 찾아다녀요?”
“심심하잖아.”
입맛을 다시는 고상미에게 대충 손짓했다.
“가서 그쪽 동생들 놀아줘요. 우리는 휴가 기간이라 이쪽엔 당분간 사람 없을 테니까.”
“안 그래도 그러려고. 그 눈 감고 다니는 재미없는 애밖에 없어서 가려던 참이었어.”
“예. 가보세요.”
“가끔은 와도 되지? 여기 운동 시설이 좋아서.”
“그래요.”
나는 고상미를 보내고 우재성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똑똑.
“접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피곤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있는 우재성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예. 무슨 일이에요?”
“그때 말씀하신 건 관련해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아, 그거요.”
우재성은 자료 몇 장을 들고 중앙의 소파로 다가왔다.
“앉으시죠.”
턱.
나는 우재성과 마주 앉았다.
“먼저 이윤종 교수는 현재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잠적했단 말입니까.”
“예. 그… 강화도 근처에 흥신소 인원들을 배치한 탓에 교수를 감시하던 눈이 줄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원래 그런 놈들은 다 자기 쥐구멍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요. 단순히 감시로는 어디로 샜는지 찾기 힘든 게 당연합니다.”
이윤종 박사.
민지훈과 함께 신약 및 백신을 연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놈이다.
거기 관여했다면 분명 민지훈이 생화학 무기를 제작하는 데도 도움을 줬을 거다. 이윤종 교수는 생화학, 생명공학에도 나름 조예가 있으니 말이야.
그렇다고 가정했을 때, 놈에게는 한 가지 불안 요소가 존재했다.
‘또 다른 생화학 무기.’
민지훈만 그걸 가지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윤종 그 박사 놈이 그걸 가지고 어디 해외로 튀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말하자, 우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있죠. 그리고, 그 DS컴퍼니 말입니다.”
“아, 예.”
우릴 돕던 고상미를 습격한 외국인. 그놈이 자신을 DS컴퍼니 소속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래서 DS컴퍼니라는 곳도 조사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고세운 씨의 도움을 받아 조사해본 결과, DS컴퍼니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오. 정말요?”
고세운 이 자식. 싸가지는 부족해도 역시 실력 하나만큼은 쓸만하다.
“그런데 이 DS컴퍼니, 아무래도 보통 기업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겠지. 도끼를 든 미친놈이 이사랍시고 앉아있는데.
“사실 이건 정확한 게 아니라 제 추측이 들어간 의견인데…… DS컴퍼니는 ‘청부’를 받는 기업으로 보입니다.”
“청부요? 살인 청부 같은 그런 거 말입니까?”
“네. 저도 미국에 살 때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막 나가던 상원의원 아들이 있었는데, 그놈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저놈을 손봐주고 싶으면 DS컴퍼니에 의뢰하라고.”
“흠.”
“저는 그렇게 말하길래 DS컴퍼니가 갱이 만든 회사나 경호업체, 이런 건 줄 알고 인터넷에서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자세한 정보는 나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관심을 껐습니다.”
“그러던 차에 내가 그 회사의 조사를 부탁했다?”
우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고세운이 직접 DS컴퍼니에 의뢰를 시도했습니다. 서류에 목표, 기간, 방식을 입력하면 비용이 산출되고, 돈이 입금되면 의뢰가 진행되는 방식입니다.”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에요? 살인 의뢰라고 생각하고 들으니까 그걸로밖에 안 들리는데.”
“하지만 고세운이 말하길, 의뢰서를 받는 것도 힘들다고 합니다. 예전에 만들어놓은 가짜 미국 신분을 이용해 겨우 접근했다고 들었습니다.”
“허, 참.”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DS컴퍼니의 자회사로, DS바이오테크가 있습니다.”
바이오테크면 생명공학인데?
“그리고 여기. 이 사진. 이윤종 박사가 3년 전 참석한 세미나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집어 확인한 나는 깜짝 놀랐다.
어딘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윤종과 다른 과학자들 뒤로, ‘DS바이오테크’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던 것이다.
‘설마…… 이윤종이 사라진 게 이들과 접촉하려고?’
추측이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애초에 항구에 DS컴퍼니에서 나온 놈이 있었다는 건 민지훈과 그쪽이 관계가 있단 뜻이고.
그러면 이윤종 박사와 그들도 커넥션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상상이 피어올랐다.
“이윤종 박사. 고상미. DS바이오테크…….”
혹시, 고상미를 생포해 모종의 인체 실험 같은 걸 하려 했다면?
사람도 죽이고 다닌다는데, 실험체로 쓰지 못할 건 또 없지.
‘억측인가.’
사실, 그놈들이 먼저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굳이 뒤를 캘 필요는 없다.
다만 이윤종 교수가 어디 있고, 정말 생화학 무기를 들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그 존재로 인해 무슨 범죄와 테러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하지만 나는 이내 걱정스러운 마음에 인상을 찡그렸다.
민지훈이 말한 ‘모임’. 미래를 볼 수 있으니 놈은 아마 나름 중요한 위치였을 거다.
그런데 놈이 갑자기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놈들은 누구한테로 관심을 돌릴까.
‘X발. 나지.’
왠지 모르게 뒷골이 자꾸 서늘하다 했더니, 설마 이거 때문인가?
“하…….”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새로운 개새끼들이 한참 만에 찾은 평화를 깨지 않기를.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유감스럽게도.
놈들이 먼저 나를 건드린다면. 내 행복을 망가뜨린다면…….
이번엔, 앞으로 절대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무너트려 줄 것이다.
이번 생은 빌런이다 1부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