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a Villain in This Life RAW novel - Chapter 251
#251화
조용한 분위기의 외진 곳에 있는 한 저택.
테라스에서 한 노인이 착잡한 표정으로 밤공기를 쐬고 있었다.
“후우…….”
남자는 김우천.
원래는 전 민정수석비서관이었으나, 민기형의 죽음으로 전전 민정수석이 되어 버린 이였다.
‘우짜다 이래 된 건지.’
과거에 민기형을 봤을 땐 의아한 마음이었다.
분명 높은 곳을 바라고 있지만, 어쩐지 눈빛에는 야망이 비쳐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한광철에 의해 민기형이 ‘선생’이라 불리는 존재일 수 있다는 걸 전해 듣던 순간에도 의문이 들었다.
그런 거대한 범죄 조직의 수장으로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내일인가.’
민기형이 정말 선생이 맞는지, 그 둘째 아들은 왜 실종됐는지.
한광철이 와서 직접 사정을 설명해 주기로 했으니, 이러한 의문은 잠시 접어 둬도 될 것이리라.
김우천은 회한 섞인 눈으로 바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정계의 노괴로 불리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물론 그 과정이 청렴결백하지만은 않았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윗물이 맑지 못하니…… 아랫물도 마찬가지인 건 당연하겠지.’
김우천이 깨끗하기로 유명한 서해결 검사처럼 살았더라도 어차피 악한 사람은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김우천은 어쩐지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끙.”
어차피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혼자 앓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
정계에서 은퇴해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름 입김이 통할 것이다.
‘우선은 광철이 녀석 이야기부터 듣고…….’
생각을 이어 나가던 그때, 저 멀리에서 이쪽을 향해 차가 다가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차는 김우천의 대문 앞에 멈췄다.
ㄴ
끼익-
“이 시간에 뭐꼬?”
김우천은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탁.
차에서 내린 남자들이 현관을 향해 다가왔다.
그에 김우천은 몸을 일으켜 테라스에서 서재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자, 위를 향해 뭐라 말하려던 가사 도우미가 멈칫했다.
“우에서 봤어. 지가 누구라 카던데?”
김우천의 물음에 중년의 가사 도우미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그, 어르신 조카라고…….”
“허이고. 독버섯 같은 놈이 찾아왔구만. 자네는 들어가 있어.”
“예? 차라도 내올게요.”
“됐네. 금마는 내 주는 차가 아까워.”
“아……. 알겠습니다.”
가사 도우미가 물러가고, 김우천은 벽에 기대져 있던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그놈 상판을 보자마자 후려쳐 줄 생각이었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부님. 저 왔습니다.”
“끄지라.”
“성질머리는 여전하시네. 어이.”
험악한 인상의 중년이 뒤쪽을 향해 일본어로 뭐라 지껄였다.
“애들은 놓고 들어가겠습니다. 그게 예의니까.”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고 걸어 들어왔다.
“좋은 데 사시네. 그동안…….”
“뭐 한다고 여까지 왔노.”
“섭섭하게 또.”
“야쿠자 쉐끼가 뭐 한다고 여까지 기어 왔냔 말이다.”
그 말에 재일교포 출신 야쿠자 가네무라 아키라. 아니, 김우천의 조카 김용수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얼굴도 좀 뵙고, 안부도 좀 묻고.”
“…….”
“다른 것도 좀 물으러 왔수다.”
김우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릴 때부터 엇나가던 놈은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야쿠자에 몸담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연을 끊었다.
그런 그가 왜 이 야밤에 찾아왔는지 의문이었다.
“용건만 말하고 얼른 가라. 늙은이 잠자는 거 방해 말고.”
“나이 들면 잠도 준다는데. 숙부님은 아닌가 봐요?”
김용수, 가네무라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빙빙 돌렸다.
그러자 김우천은 지팡이로 바닥을 콱 찍으며 경고했다.
“허튼짓할 생각 말고 용건이나 끄내라. 말 오래 섞기 싫다.”
“그럼, 뭐.”
가네무라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한광철. 아시죠?”
그 입에서 나온 이름에 김우천이 내심 동요했다.
“……알기야 알지.”
“내가 좀 알아봤는데, 아주 재밌는 사람이더라고요?”
“…….”
“어딨어요? 그 양반.”
“내는 모른다.”
“에헤이.”
가네무라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그 양반이랑 대화만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마시고 알려 줘요.”
“할 말 없다.”
“그래요? 모르시면 어쩔 수 없고.”
어깨를 으쓱한 가네무라가 몸을 돌렸다.
김우천은 그를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이래 곱게 돌아갈 놈이 아인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가네무라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 맞다. 그거 들으셨습니까?”
스윽.
고개만 살짝 돌린 가네무라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는 형님들이 말하길, 은퇴하신 어떤 양반이 자꾸 입김을 분다던데. 혹시 아는 사람이면 그러지 말라고 좀 전해 주십쇼.”
안 그래도 한광철의 부탁으로 김우천은 민기형에게 붙어 떡고물을 받아먹던 정치인을 은근히 압박하고 있었다.
명백히 자신을 겨냥한 말에 김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랖도 넓다.”
“큭. 그러다 제명에 못 간다고도 좀 전해 주시고. 갑니다. 나오지 마요.”
애초에 배웅할 생각도 없었다.
김우천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이 몰락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광철아……. 몸조심해라…….”
그러나, 세상에 나쁜 놈들은 아직 많다.
***
길고 고급스러운 복도.
한 남자가 굳은 표정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후…….”
겉으로는 화학과의 교수지만, 실상은 민지훈과 함께 생화학 무기를 제작한 이윤종 박사.
그는 긴장한 마음에 한숨을 작게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이윤종 박사가 앞에 서자, 3m는 될 법한 높이의 문이 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익-
침을 꿀꺽 삼킨 이윤종은 좌우를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좋은 곳, 화려한 곳에 가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사람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윤종이 조금 어두운 공간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 얕보여서는 안 된다.’
어깨를 쭉 펴고 고개를 돌리니, 회의실에 있을 법한 긴 테이블의 상석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실제로 회의에 사용하는 곳인지 한쪽 벽면에는 스크린이 보였다.
어딘가 음울한 인상의 남자는 머리가 검었으나, 이목구비는 뚜렷한 외국인의 것이었다.
이윤종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손을 살짝 들며 말했다.
“앉으시지요.”
“예.”
이윤종은 짧게 답하곤 그의 맞은편 의자에 착석했다. 상석의 옆에 앉으면 초장부터 지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 탓에 얘기를 나눌 두 사람의 사이에는 긴 테이블이 자리하게 되었다.
남자가 굳이?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했지만, 이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닥터 리. 얘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J 이사.”
이윤종의 딱딱한 태도와 표정에 J라고 불린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무래도 피차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어떻게, 오늘은 그가 아니라 당신 혼자 왔군요.”
J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모양입니다?”
이윤종은 의도가 다분한 질문에 흔들리지 않고 대꾸했다.
“알다시피.”
“어허. 이거 큰일 아닙니까? 우리의 예언자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니.”
J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턱을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을 때마다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그럼, 당신은 대리인 신분으로 그런 거래를 제안한 겁니까?”
생화학 무기.
그 존재를 알았을 때는 침착한 J도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비대칭 전력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보단 위력이 약하지만, 어떻게 보면 더 무서운 것이 생화학 병기다.
바이러스는 눈을 멀게 하는 섬광도, 귀를 찢은 폭음도 없이 목숨을 앗아 가니까.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온 건 이윤종이었다.
쥔 패를 공개한 것도 의문이었으나, 손에 꽉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무기를 DS컴퍼니에 넘기겠다는 제안을 건네 왔다.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지는 몰라도…….’
성사시키기만 한다면, J의 입지는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사사건건 대립했던 H 이사도 실종된 마당이다.
‘차기 대표는, 나다.’
속으로 짙은 미소를 짓던 J는 이윤종의 말에 눈살을 확 찌푸렸다.
“오늘은 대리인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거래의 주체는 나, 이윤종이란 소립니다.”
그 말에 J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박사가 선생의 뒤통수를 쳤단 말인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J는 머리를 굴렸다.
사실 선생이 생사불명 상태이니 이윤종의 말에 큰 어폐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선생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우리 DS가 돌아섰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세력은 DS컴퍼니가 분명 우위다.
다만, 선생에게는 세계의 판도를 뒤집을 만한 능력이 있다.
J는 선생의 생환 가능성을 점치며 예지 능력과 생화학 무기를 저울질했다.
‘선생이 자신의 세력마저도 버리고 잠적할 이유가 있나?’
이 질문의 대답은, 일단 없다.
사실상 이주혁이라는 남자에 의해 사망했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일말의 가능성은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확신하지 않는다. 이게 J가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도 얘기는 들어 보는 게 낫겠지.’
몇 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고민을 끝낸 J가 입을 열었다.
“자세한 사정은 아직 모르겠지만……. 우선 제안부터 들어 보고 싶군요.”
“좋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이윤종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제가 제공할 것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생화학 무기의 완전한 양도입니다.”
“그 대가는?”
“DS컴퍼니의 지분. 20%.”
그 말을 들은 J의 평정심이 깨졌다.
“이런 미친……. 내가 잘못 들은 겁니까?”
“아, 멀어서 잘 안 들렸을 수도 있겠군요. DS컴퍼니의 지분 20%를 넘겨주십시오.”
“후…….”
J는 이윤종을 노려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대표가 가진 지분이 20%에 못 미칩니다. 그런데 그만큼을 당신 개인에게 넘기라고요?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리라…….”
피식 웃으며 입속으로 되뇌던 이윤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턱.
이윤종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내 머릿속에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무기의 레시피, 그 무기에 저항할 수 있는 치료제의 제조법. 전부 십수 년의 연구 끝에 개발했습니다. 당신네 바이오테크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개발할 수 없을 수준이란 겁니다.”
“…….”
“이 모든 걸 DS컴퍼니에게 제공하겠다는 말입니다. 이제 저울이 좀 맞습니까?”
“흠…….”
J는 턱을 매만지며 숙고했다.
아니, 사실 마음은 이미 기울었다.
20%라는 파격적인 제안에 당황했을 뿐, 그는 이미 이윤종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가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순간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으나.
‘무리군.’
이윤종의 성향은 대강 파악했다.
남에게 빼앗길 바에 자신이 직접 없앨 것이다.
그런 확고한 신념. 아니, 광기가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알고 계실 테지만, 바로 답을 드리긴 어려운 제안입니다.”
“그렇습니까?”
“우선 내부 회의를 해야 할 것 같군요.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시간도 걸릴 테고…….”
스윽.
J가 시선을 내려 이윤종을 마주 봤다.
“아무래도 배웅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쪽에서 사양하지요.”
이윤종은 슬쩍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긍정적인 결정 기다리겠습니다.”
생화학 무기 거래에 긍정적이라니, 웃기는 소리였다.
머리가 복잡해진 J는 고개를 까딱했다.
“들어가십시오.”
“그럼.”
미련 없이 몸을 돌린 이윤종은 직접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끼익- 탁.
문을 닫은 이윤종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눈을 감았다.
‘정말 받아들일까.’
DS컴퍼니는 이윤종의 제안에 크게 흔들릴 것이다.
설령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걸 다시 반전시킬 방도도 남아 있다.
게다가 그가 직접 뱉은 조건이다. 그의 상대를 읽는 능력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민지훈. 우선 당신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다. 이윤종에게는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다시 수면 위로 등장하는 순간, 이미 내부에 독이 침투한 DS컴퍼니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히죽.
이윤종은 어쩐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제안은 DS컴퍼니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분열시킨 뒤, 결국엔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파괴할 것이다.
마치, 생화학 무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