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egal Alien Cult RAW novel - Chapter 240
240 ? 여름의 끝자락에서 #2
“핫산, 내가 준 인형은 잘 갖고 있어?”
“그거?”
나는 루나가 내게 만들어줬던 짚신 인형을 떠올렸다. 소위 부두인형이라 불리는 저주의 도구처럼 생겨서 바늘을 찔러 넣으면 효과가 있을 것 같이 생겼던가?
루나가 날 위해 만들어준 부적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걸 루나의 아버지인 에레보르에게 넘기고 왔으니 루나의 말대로 나를 지켜주는 부적과도 같은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본다.
다만 그걸 누구 줬는데-라고 말하는 건 좀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어둠 속에서 잃어버렸다고 둘러대기로 했다.
“잃어버렸어?”
“그게, 미안. 열심히 만들어준 건데, 어둠 속에서 잃어버렸어.”
“아냐, 괜찮아! 잃어버려서 오히려 다행이야!”
“그래?”
대체 왜지.
잃어버려서 다행인 물건이 있는 건가.
혹시 뭐 시한폭탄 같은 것이라도 설치가 되어 있었나? 그런 엉뚱한 생각까지 하고 있을 때, 루나가 몇 마디 더 이었다.
“심연의 신 에레보르는, 한번 자신의 안으로 들어온 건 자기 것으로 치거든. 그래서, 무언가 하나를 바치고 나와야 하는데. 우리 이데오페에서는 인형을 대신 제물로 바쳐!”
“아, 제물?”
나는 에레보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내 동료들과 백은의 장미 일행을 구하고 싶다면 그들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을 했었던가.
“어둠에서 잃어버린 거면, 어둠이 가져간 걸 거야.”
“과연,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루나 네가 준 것들이 도움이 됐어. 번개 개암이나, 로프나. 뭐 그런 거.”
“그래? 내가 심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했잖아.”
내가 고마움을 표하자 루나는 몹시 멋쩍어진 것처럼 우물쭈물 했다.
물론 내가 한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루나가 이것저것 챙겨주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니까.
안티오페도 히폴리테도 모두 뛰어난 모험가였긴 했다만, 분명 지금보다 더 큰 고난과 시험에 잠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보니 나는 이번 일을 루나와 함께 했었으면 어땠을지 떠올려 봤다. 의외로 지금보다 쉽게 일을 처리했을 지도 모른다.
루나가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떼어 놓고 온 것이긴 했는데, 나는 은연 중으로 루나를 무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핫산, 아무튼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네.”
나에게는 끽해야 하루 이틀의 시간이, 루나에게는 열흘 가까이 되었으니까. 그 동안 나타나지 않는 나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아직도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믿겨지질 않아서 얼떨떨할 뿐이었다. 무슨 인터스텔라 같은 건가. 어둠 속이라 중력이 강하게 작용해서 시공간이 뒤틀어졌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물 흘러가는 것처럼 넌지시 말을 더하는 루나.
“그리고 나, 핫산이 없는 동안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해 봤어.”
“생각을? 생각을 했다고?”
나는 순간 가슴 밑이 싸르르해지는 기분을 겪었다.
일찍이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친구들에게 듣기로 여자친구 입에서 “내가 혼자서 생각해 봤는데-.”라는 말이 나오면 분명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고 했었으니까.
혹시 루나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타입이었던 걸까?
혼자 내버려두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마음까지 정리한다는 여자애들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던 나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만 그것은 나의 기우일 뿐으로 루나의 입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혼자서 생각해봤는데. 내가 너무 핫산에게 많은 걸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
“내가 조금 더 실력이 뛰어났으면, 이렇게 핫산이 위험한 곳으로 가는 데 응원만 하지는 않았을 건데. 그래서 나도 수련을 하기로 했어!”
“루나 네가 수련을 한다고?”
나는 오러를 배우는 루나에 대해 떠올려 봤다.
물론 루나는 강력한 신들이 낳은 여자아이기 때문에 훈련을 한다면 충분히 어느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는 포텐을 갖추기는 했다.
다만, 너무 강해지면 지옥의 군주들인지 뭔지 하는 기가스들에게 더욱 빨리 들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실 핫산이 심연으로 들어가자마자 스승도 구했어. 나도 핫산이랑 똑같이 달에 1골드로 이것저것 배우기로 했거든!”
“그래? 스승? 실력 있는 사람이야?”
“핫산도 아는 사람이야! 솔직히, 별로 내키진 않았는데 그 녀석만큼 뛰어난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 같더라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루나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곰곰이 떠올려 봤다. 그런데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누군데 그래?”
“그 마녀 말이야. 네메아.”
“어으, 쉣-.”
“쉣? 핫산도 내가 수련을 하겠다는 게 기쁜 거구나! 같이 골드 티어가 되자!”
네메아.
그 이름이 여기서 다시 나올 줄이야. 나는 어쩐지 창자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 여자가 혹시 입 한번 벙끗거리면 그야말로 폭탄이 터질 것처럼 변해버릴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덧 우리는 계곡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동굴 입구에 달할 수 있었다.
*
*
*
바깥으로 나오자, 과연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는 루나의 말은 거짓말이나 과장 같은 게 아니었다.
도시로 들어오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감싸고 이것저것 물어오거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열흘이나 모습을 감췄던데! 대체 절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소도모라 당국이 숨기고 있는 거대한 괴물이 있다던데 그게 사실인지-.”
“이번 파티 구성원은 여성 셋과 남성 하나로 이루어졌는데, 혹시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자, 자, 모두들 물러나시오. 지금부터 여기는 마르스 길드의 총수인 이 몸, 발트마가 맡도록 하겠소.”
피곤함에 가득 쌓여 있었던 우리 일행들은 마르스 길드의 높은 자, 발트마의 권위로 그들을 모두 물리칠 수가 있었다.
발트마는 우리 모두를 자신의 사무실 같은 것으로 데려갔다.
마르스 길드의 회의실.
탁-.
그 서늘한 대리석 테이블이 놓인 널찍한 공간에서 찻잔을 내려놓는 반 대머리의 애꾸 사내, 발트마가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하지만, 그리 썩 다행인 일만은 아니게 되었어. 가능하면 내 선에서 묻고 싶었는데. 그렇지만은 못하게 되었다.”
발트마의 하나 뿐인 호박색 눈동자가 제법 골치 아프다는 것처럼 침전해 있었다. 그가 말하기로 이번 일의 여파가 꽤 커졌다는 모양이었다.
내가 알기로 발트마는 베누스 신전의 성녀에 버금갈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모험가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발생하는 사건들이나 좋지 않은 일들을 자신의 권위로 묵살하고 암묵적인 처리를 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남자라는 것이다.
그런 남자의 권한으로도 묻을 수 없는 사건이 되어버렸다면, 내가 생각하기로는 분명 이 남자보다 더 큰 권력자나 영향을 가진 단체가 이 일을 물고 늘어졌다는 뜻이 될 것이었다.
그것을 파악한 건 나뿐만 아니었던 것인지,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채 건성건성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티오페가 물었다.
“신전 기사단이야? 내가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해서, 나 때문에 왕성에서 문책이 내려온 거지?”
“그래, 잘 아는구나. 왕성에서 이 일을 조사한다고 말했다. 조만간 왕궁에서 조사단이 파견 될 거야. 당분간은, 문제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어. 부르면 즉각즉각 나오고. 그리고 알브하임에서-. 아니, 이건 너희들에게 말할 게 아니군.”
발트마는 쯧-하고 혀를 차며 이야기를 서둘러 끝맺었다.
왕궁에서 조사단이 파견 된다니.
왕.
영어로는 킹.
말 해 무엇을 할 정도냐 싶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인물과, 그 소속 단체가 조사를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존재 앞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진 발트마는 그냥 아저씨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어째선지 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발트마의 이마가 평소보다 더욱 넓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분간 쥐 죽은 듯이 있어. 바깥에 나가지도 말고. 어떤 행동을 해도 정치적으로 비춰질지 모르고,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모사꾼들에게 먹이를 주게 될 테니까.”
나와 안티오페는 발트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때 한 마디 묻는 안티오페.
“그래서 내 언니나 다른 사람들은?”
“치료소로 이송시켰다. 강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더군. 그 히폴리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라니, 대체 심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발트마의 물음에 나는 안티오페를 슬쩍 쳐다봤다. 그러자 안티오페는 자신이 말하겠다는 것처럼 입을 먼저 뗐다.
“그냥, 거기서 거대한 마물을 사냥한 것뿐이야. 영지주의자들의 잔재와 싸웠거든. 언니는 정신적인 한계까지 몰려 있었으니까,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그렇구만. 영지주의자들인가. 큰 문제긴 하지.”
물론 안티오페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히폴리테가 정신을 잃은 것은 백색 로브의 남자가 손가락에서 뿜어낸 번개를 직격으로 맞은 뒤였으니까 말이다.
다만 안티오페와 대화를 나누기로, 그 사실을 말해봤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괜한 문제들을 여기저기서 끌어올 수 있기 때문에 비밀로 하는 것이 좋다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동의했다.
나는 애초에 신들과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남들에게 비밀로 했왔으니까.
대체 이 새끼는 정체가 뭐지-라는 느낌으로 누군가 나를 납치해 머리라도 가르면 큰일 날 게 분명했다.
이 세상의 의술은 형편없기 때문에, 가르고 꺼낸 나의 머리를 원래대로 돌려놓지 못할 게 확실했다.
“아, 역시 발트마 아저씨를 속이는 건 쉽지가 않네.”
회의실에서 나오며 안티오페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몸을 잔뜩 가리는 가죽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 목덜미나 이마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어서 정말 더워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물었다.
“그래? 방금 얘기 잘 끝난 거 아냐?”
“아냐, 내가 저 아저씨 오래 봐서 아는데. 우리 얘기를 전혀 믿는 눈치가 아냐. 근데 그냥 넘어가주기로 한 것 같아.”
“그렇구만.”
역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폼으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됐다. 그리고 그걸 파악한 안티오페도 상상 이상으로 유능한 녀석이었다.
그러니까 길드의 고위 인물이 된 거고, 그러니까 신전 기사단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것이겠지.
“그래서, 핫산 이제 어떻게 하려고?”
“뭘 어떻게 해. 당분간 얌전히 있으라는데, 얌전히 있어야지.”
“역시 그래야겠지. 근데, 핫산, 왕성과 얽히는 건 조심해야할 거야. 지금의 왕은, 네가 그다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래?”
“어째서 플루토 신도들이 사교도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어?”
“아니, 잘은 모르는데.”
“거짓말 하기는. 너도 당연히 알겠지만 다 이번 왕이 즉위하며 개정한 왕국의 법률 때문이지. 사실 여러 요인이 있긴 하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니까.”
“법률인가-.”
“나는…, 나는 그게 쥬피테르 님의 뜻인 줄 알았어.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내가 여태까지 뭘 하고 있었나 싶네.”
안티오페는 막 딸을 친 사람처럼 탈력적인 표정을 보여주었다. 사실 내가 비유한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지금 자신의 직업에 대해 회의감과 현자타임을 느끼는 듯했다.
“난 아직 한참 멀었어. 어쩌면, 그 어둠 속에서 들려왔던 목소리들 또한 내 본심이었을지도 모르겠네. 나는 아직 어리구나.”
이내 허공을 향해 주먹을 꽉 쥐어보는 안티오페였다.
자신이 해왔던 일에 대해 흔들리는 사람은 많이 봤었다. 그래서 무어라 한 마디 위로라도 해 줄까 하다가, 나는 곧 그만 입을 다물었다.
굳이 내가 어설픈 위로를 할 필요 없이, 안티오페는 이미 무언가 의욕에 찬 얼굴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내 위로 같은 게 필요할 만큼 약한 여성이 아니었다는 소리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운명을 느껴. 잘못 된 걸 바로 고치는 것, 그게 나의 숙명이야. 그러니까 모두가 정신을 잃었던 순간에, 나는 정신을 잃지 않고 모든 걸 목도했던 것이겠지. 나는, 나는 역시 선택받았어. 모두와는 달라.”
머리가 좀 맛이 간 것 같다는 게 문제였지만.
*
*
*
오두막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건 뜻밖의 광경들이었다.
마당에 무슨 기이하게 자라난 나무 같은 것이 이파리와 넝쿨들을 여기저기 뻗어 맹그로브 유적 같은 모습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 시벌 이게 뭐여?”
내가 기억하기로 마당에 자라 있는 식물이라고 해 봐야 감자 이파리 정도가 전부였는데.
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어야 이게 이렇게 자라날 수 있는 거지? 식물에 의한 지상의 대 침공?
그런 느낌으로 당황하고 있자니 덜컥-하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루나가 맨 발로 흙을 밟으며 뛰쳐나온다.
“핫산, 돌아왔구나! 어떻게 됐어? 일은 잘 해결 됐어?”
“그래, 그런 것 같은데. 당분간은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라고 그러더라. 왕성에서 무슨 조사관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그러던데.”
“왕성?”
“조만간 높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어.”
“와, 핫산 그럼 엄청 유명해지겠다! 왕성과 연이 닿으면 골드 티어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거잖아!”
높은 사람들에게 문책을 당할까 걱정했던 나와 다르게, 루나의 반응은 제법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루나의 말도 맞았다.
옛날에 유행했던 자기계발 서적에서 흔히 말하기를,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자가 성공하게 된다고 했었나.
과연, 곧 왕궁에서 오는 이들에게 나라는 인간에 대해 강한 어필을 한다면 유명세를 얻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테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것 정도야 그리 대수로울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의 내게 있어서는 골드티어의 모험가도. 왕성도, 심지어 마당에 자라난 넝쿨들이나 루나의 재잘거리는 이야기마저도 손바닥을 스쳐 흘러가는 모래처럼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역시 그것 때문이겠지.
“핫산, 핫산- 어디가?”
“잠깐, 저기, 언덕에. 혼자서 좀 다녀올게.”
“피곤하지 않아?”
“금방 다녀올 거야.”
나는 의아해하는 루나를 뒤로한 채,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내가 향하는 곳은 도시의 넓은 전경이 훤히 보이는 도심 내부의 가파른 언덕 같은 곳이었다.
거인의 무릎-이라 불리며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유명한 이 언덕에는, 어째선지 사람 한 명 보이질 않는다. 노을 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아마 다들 집으로 돌아간 것이겠지.
물론 지금 나에게는 이 조용함과 고요함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는 저 멀리 타들어가는 노을과 이 도시 소도모라, 아니 이 가이아 대륙이 훤히 보이는 이 높은 언덕에 앉았다.
잠깐 숨을 돌리자 떠오르는 것은 아까 전, 아니, 어쩌면 며칠 전에 만났을지 모르는 백색 남자와의 대화였다.
지그레스, 너는 봉인되어 있다. 단전이 파괴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이래서야 아무리 노력해도 오러는 사용할 수 없어.
나의 배를 휘젓는 동안 남자는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귀띔했었다. 당시에는 정신이 없어서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니 확실히 알겠다.
강령술은 죽음의 힘을 다루는 것. 생명의 힘인 오러와 지옥의 마력은 병행할 수 없지만, 너라면 가능할지 모르지. 고로 두 가지의 힘을 균등히 맞춰줄 필요가 있다.
욱신, 욱신-.
그때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남자의 손에 휘적여졌던 나의 복부에 강렬한 통증이 다시금 선명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운명을 쟁취하는 건 어디까지나 지그레스, 네가 되어야 한다. 나는 어깨를 떠밀어줄 수 있을 뿐이지.
제가 뭘 당했다는 겁니까…? 대체, 누구에게?
그야, 네 몸을 가장 많이 다루었던 자겠지. 자, 이 감각을 기억해 두어라. 너의 뱃속에서 생명이 요동치는 감각.
온몸의 혈류가 통증이 뿜어져 나오는 배에 집중되기 시작한다.
피가 부족해진 손발과 머리, 사지의 말단부가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이 시시각각 느껴질 정도였다.
피는 사람의 생명 그 자체.
나는 지금 나의 생명이 몸 구석구석을 순환하며 나돌아가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혈류가 닿는 곳의 신경과 세포들이 일깨워지는 것이, 나라는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육신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 몸의 내부, 더 나아가 피부와 맞닿아 있는 옷감의 촉감이나 서늘한 바람이 흐르고 있는 모든 순간들의 감각이 증폭되기 시작한다.
마침내 내가 눈을 다시 떴을 때.
저물어가는 노을과 함께 나의 유년기-.
여름이 끝을 고하고 있었다.
[작품후기]이야기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닷…하지만 역시 라이브 연재는 힘이 든 법입니닷… 비축을… 하다 못해 2편이라도 쌓고 싶습니닷… 하지만 휴재는 금물… 때문에 밤을 새서 씁니닷…!!!
241회
알브하임의 엘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