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villain, but I wish for world peace RAW novel - Chapter 127
41 악당의 방법 (4)
금 박사와의 일을 마무리 지은 나는 그대로 남주현을 만나러 갔다.
내 부름에 온 남주현은 혼자였다. 나는 가면을 쓰고 그녀의 앞에 나섰다.
“이희원 씨는 어디에 갔습니까?”
“히이익, 그렇게 튀어나오는 것 좀 그만해 주시면 안 돼요?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다고요.”
“그건 미안하게 됐네요. 발소리를 줄이는 게 버릇이 돼 놔서.”
내 변명에 더 질렸다는 표정을 지은 남주현이 앞으로 넘어온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이희원 씨는 잠깐 떼 놓고 왔어요. 위험한 일도 없고 하니.”
━이제 네놈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걷어 버린 모양이구나.
‘애초에 이혜원을 소개해 준 사람도 저니까, 저를 상대하겠다고 이혜원을 데리고 오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죠.’
게다가 오늘 할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빠질수록 더 편하기도 했고.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사이 남주현은 조금 달라 보였다.
이번 김성득 사건으로 깨달은 게 많은 얼굴이었다.
한숨을 내쉰 남주현이 내게 말했다.
“결국 당신이 말한 대로 됐네요.”
“음. 하지만 완전한 패배라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긴 하잖습니까. 아직 재판도 뭣도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고. 전 중간에 끼어든 셈이니까요.”
“재판이 끝났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예요. 결국 김성득 의원은 재판대에 서지 않았을 테니까.”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김성득 의원을 기소하는 데조차 실패했다는 무력감에 남주현은 쓰게 웃었다.
애초에 검찰이 그쪽 편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뿌리부터 썩어 있다는 걸 확인한 쪽은 영 기운이 빠진 모양이다.
“조금 무력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네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그쪽이 아니었더라면 완전히 묻혔겠죠, 이번 사건.”
“음.”
“내가 움직였던 것도 그쪽이 물어다 준 증거들 때문이고.”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당신이 퍼트린 이야기 없이 내가 김성득 의원을 죽였다면? 그랬다면 김성득 의원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나만 미친놈이 되고 끝났겠지.”
“하지만 아직도 김성득 의원의 죄는 다 밝혀진 게 아닌걸요.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구요.”
“뭐, 제 이미지야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래도 이번 일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현직 국회의원 살인 사건으로 번지고 끝날 수도 일이었지만, 남주현의 노력으로 현무 제약의 사건이 계속 물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들도 이번 사건으로 내게 겁을 집어먹게 될 테고. 지금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이건 경고입니다. 나쁜 일을 하면 너희가 죽을 수도 있다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되면, 점차 확실해지겠지.
‘벨츠머츠는 나쁜 짓을 저지른 놈을 죽인다’고 말이다.
내 이미지가 얼마나 나쁘든, 말든. 국민은 점차 ‘나쁜 놈’들이 죽는다고 믿게 될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은 다들 몸을 사릴 겁니다. 대외적인 행동도 줄이고,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던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조금은 머뭇거릴지도 모르죠.”
당장은 그거면 됐다.
내 표정에 남주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이다. 뭐, 애초에 바로 이해해 주길 바라진 않았다.
나는 남주현에게 물었다.
“앞으로는 어쩔 생각입니까?”
내 질문에 남주현은 두 눈을 깜빡였다. 안경 뒤에 숨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흡! 하고 숨을 들이쉰 남주현이 내게 물었다.
“그쪽은 어쩔 생각인데요?”
갑자기 내가 어떻게 굴지를 묻는 건가.
“이번 일로 알았어요. 당신은 단순한 악당이 아니죠?”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를 볼 때마다 덜덜 떨었으면서. 또 당차게 묻는다.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는 말은 뭡니까?”
남주현은 내 미적지근한 태도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어요. 적들이 더럽게 싸울 때엔 나도 더럽게 싸워 줘야 한다는 거!”
“그 더럽게 싸운다는 게 나를 말하는 겁니까?”
나는 손가락으로 가만히 나를 짚었다. 내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주현이 갑자기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아니, 그쪽이 더럽다는 게 아니라! 뭐냐, 그 필살기! 필살기 같은 느낌이죠! 이쪽한테도 한 방이 있다는 느낌?”
아까는 나를 편하게 대하는 것 같더니 역시 아닌가. 잔뜩 쫄아서 손발을 붕방방 떠는 걸 보니 여전히 내가 무서운가 보다.
━편하게 대하자는 생각이 있었더라도 네놈이 잘게 다져 놓은 김성득 의원을 본 순간 그 생각이 날아가지 않았겠냐.
‘쩝. 그놈이 저지른 일도 있는데 편히 보내 줄 순 없었잖아요.’
정신을 추스른 남주현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전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이번에는 그쪽 도움을 받았지만, 언젠가는 내 힘만으로 그 나쁜 놈들을 잡아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계속 노력할 거예요.”
오, 역시 당차다. 하긴, 한 번의 실패로 꺾일 사람이 아니지. 남주현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그러는 그쪽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에요?”
“그건 왜 묻는 겁니까?”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그, 그쪽이 저한테는 필살기처럼 느껴져서요. 앞으로도 도움을, 그러니까, 제가 감히 그쪽의 도움을 받아도 될까 하고요.”
남주현에게 나는, 그러니까 벨츠머츠는 여전히 미지의 존재일 것이다. 분명 나쁜 놈들이기는 한데 이번 일에는 이상할 정도로 협조적이었고 결국 더 나쁜 놈을 잡는 데에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
지금 언론에서 우리를 죽일 놈이라고 하는 것과는 별개로 남주현이 본 우리는 악이라고 정의하기 애매한 존재가 되었겠지.
필살기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를 믿을 수 있겠어요?”
내 말에 남주현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예에에?”
나는 범죄자다. 남주현이 나를 너무 ‘착한 편’으로 인식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이번에 김성득 의원을 잡는 데에 도움을 줬고…….”
“그렇다고 내가 착한 사람입니까?”
“어, 음.”
이럴 때는 마음에 없는 칭찬도 할 만한데. 남주현은 굳게 입을 닫았다.
━그렇지, 좋은 놈이라는 말은 절대로 안 나오지.
뭐, 새삼 상처는 아니다.
오히려 나를 좋은 쪽으로 보는 게 더 소름이 돋지. 그렇게 나쁜 짓을 잔뜩 해 뒀는데도 날 호인으로 보면, 그쪽이 정신병자다. 음, 그렇고말고.
“아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이 나라에 세금을 안 냅니다.”
내 갑작스러운 말에 남주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범죄자 주제에 세금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그래서 가끔 세금 내는 기분으로 나쁜 놈들이나 치워 주려고요.”
“그, 그런 개념입니까?”
“네, 제가 나름 애국자라.”
내 말에 남주현은 입을 쩍 벌렸다. 나는 킥킥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갈 곳은 있습니까?”
“예?”
“돈은 있고요?”
그 말에 남주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러면서 자기 주머니를 뒤지는데, 대체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이 정도면 화도 안 난다.
“그쪽 돈을 뺏으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 활동할 때 쓸 돈은 있냐고 물은 겁니다.”
“아! 그런 거라면, 아, 전혀 없는데요.”
여전히 아무런 대책도 없다.
“설마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가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회사에 출근할 생각은 아니죠?”
“뭐, 그쪽은 이미, 무단결근을 너무 많이 해서 돌아갈 수가 없게 되긴 했는데…….”
이번 일이 끝나고 남주현은, 그러니까 N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김성득 의원이 죽은 다음부터 신이 나서 정보를 털어 댔으니 알 만한 사람은 전부 N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을 거다.
남주현이 N이라는 걸 들키면 아마 곱게 죽기는 힘들지 않을까.
남주현의 능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문제는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 무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재능은 불행이나 다름없다.
“저번에 봤던 금 박사 쪽에 말해 뒀으니, 앞으로는 그쪽 도움을 받도록 해요.”
남주현을 벨츠머츠로 영입할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 계속 돌봐 줄 생각이다. 밖에 내놨다가는 며칠이 되지 않아 시체로 발견될 것 같아서 말이지.
“일단 그쪽 관리인은 금 박사지만, 고용주는 접니다.”
“저를 고용할 생각이라고요?”
남주현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뭘 하라고…….”
“그쪽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나는 남주현에게 말을 이었다.
“이 나라를 좀먹는 나쁜 놈들을 찾는 거죠. 그리고 그놈들의 뒤를 캐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쁜 놈이라고 알려 줘야죠. 그렇게 표적을 찍으면…….”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남주현에게 보이는 건 웃는 가면뿐이라 의미가 없겠지만,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가 처리하죠.”
“히이익.”
내 말에 남주현이 기겁했다.
“그쪽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면 굳이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만, 보셨듯 이 나라의 악인들은 전부 다 잘 빠져나가기 마련이라.”
“하지만 그, 그쪽은 아, 악당이잖아요.”
“약속하죠. 민간인을 해치진 않겠습니다.”
“그 어린애들은…….”
“그 애들이 어떻게 됐는지 정확히 말해 줄 순 없지만, 한 가지는 말해 주죠. 나는 그 애들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내 말에 남주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믿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남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적어도 죄 없는 애들을 해칠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뭐냐, 이 믿음은.
레이의 말에 속으로 헛기침을 내뱉은 나는 남주현을 향해 물었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원해 줄 수 있는 건 돈뿐이다. 나쁜 놈들의 뒤를 쫓고, 유의미한 증거를 캐내는 건 모두 남주현의 몫이다.
내 질문에 남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어떻게 할지는 감이 와요.”
“아, 만약 벨츠머츠와 관련된 기사를 쓸 일이 있으면…….”
나는 남주현을 향해 말했다.
“괜히 실드 치지 말고 그냥 사실 그대로 실어요.”
내 말을 들은 레이가 물었다.
━왜냐, 이번 기회야말로 너희의 이미지를 쇄신할 기회 아니냐?
‘빌런이 좋은 이미지를 가져서 뭘 합니까.’
괜히 말도 안 되는 실드를 치면, 남주현의 뒤에 내가 있다는 게 들킬 거 아닌가. 그랬다가는 남주현의 신뢰도도 떨어질 거다. 겨우 얻은 소중한 스피커를 어이없이 잃을 순 없지.
“이왕이면 더 욕을 하는 것도 좋겠네요. 우리랑 그쪽이 아예 척을 진 것처럼 보이도록.”
내 말에 남주현이 두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좋아요! 아주 철저하게 욕해 볼게요! 누가 봐도 쌍놈이다 싶게! 개자식들이다 싶게!”
아, 그렇게까지는 노력 안 해도 되는데?
* * *
김성득 의원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살해되었다. 대한민국 현직 국회의원이 업무를 보다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살해된 전무후무한 일. 당연히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고, 대한민국에 단 한 명뿐인 사이코메트리 능력자 유채린은 울며불며 현장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일의 경중이야 심각하긴 했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꼭 자신이 필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범인도 뻔한 사건이잖아.’
끔찍한 사체의 상태를 보고 나서부터는 불안 장애가 도질 정도로 정신이 불안정해졌다.
사이코메트리는 만능이 아니다. 때때로 그녀는 아무런 일도 읽어 내지 못한다.
하지만 이토록 강렬한 사념이 깃든 공간에서는, 무조건 그 사념과 관련된 일이 읽힌다.
김성득 의원은 끔찍한 고문 끝에 사망했으니, 유채린이 보게 될 광경은 끔찍할 게 분명했다.
‘보고 싶지 않아, 진짜 싫다고.’
유채린은 우는 얼굴로 현장 안으로 들어섰다.
현장은 피투성이였다. 며칠이 지나 부패가 시작된 피비린내는 슬쩍 맡는 것만으로도 구토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불쾌했다.
유채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두렵고, 메스꺼웠다.
으으, 유채린은 오만상을 쓰며 아직까지도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바닥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곧이어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 유채린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아, 아아…….”
유채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 그날 있었던 광경이 떠올랐다.
가면을 뒤집어쓴 남자는 날카로운 단도로 김성득 의원의 살갗을 헤집었다. 엄청난 고통에 몸을 뒤트는 김성득 의원에게 남자가 속삭였다.
━죽더라도 끝이 아니야. 당신은 지금의 이 고통을 영원히 느끼게 될 거야.
그 말에는 기이한 설득력이 있었다.
가면 속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김성득 의원은 뒤늦은 용서를 빌며 흐느꼈지만, 남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김성득 의원을 차분히 고문하며 남자가 말했다.
━죽음으로도 당신은 도망칠 수 없어.
그 모든 회상이 끝난 뒤 유채린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눈가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악마, 악마였어요.”
그런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웃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김성득 의원을 고문하던 남자의 모습은 악마나 다름없었다고.
제12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