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n Item RAW novel - Chapter 264
00264 #12 – 미래의 가격 =========================================================================
#12 – 미래의 가격(9)
멜도바 케이브리스.
더 이상 요새도시 케이브리스를 지키는 사령관도, 케이브리스 일가의 굳건한 정신적 지주로 자리한 가주도 아니었다.
그저 비겁하게 가발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왔던 일개 탈모러이자 대머리에 불과했다.
“본관은 운명을 받아들이겠소. 본인을 악신의 대사제로 삼으시오!”
‘싫다고. 노땅 안 받아.’
제 딴에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모든 지위와 체면을 내던졌을 테지만, 알게 뭐야.
주례식에서 늙은 대머리에게 축복받는 건 사양이다.
게다가 이 녀석의 재능은 군략과 무력이라는 부분에 한정되어져 있어서 야전지휘관으로서의 재능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 필요한 대사제가 될 수 있는 인재가 아니라는 거다.
졸지에 부처가 악신이 되었지만 거기까지는 자멸이니 빼도 박도 못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말이다.
“본관의 손자는 아직 머리숱이 풍성하고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이오. 꼭 어린싹을 꺾어야만 하겠소!”
‘응.’
“본관은 일생동안 지켜온 비밀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폭로했소. 더 이상 사령관으로서의 체면도, 가주로서의 존심도 남지 않은 이 늙은이를 정녕 초라하게 만들 셈이오!”
‘응.’
“…….”
딱히 약 올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게 진짜 목적인 걸 뭐 어떡해.
불쌍하기야 불쌍한데 내가 말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쟤도 멋대로 착각해서 자멸한 거잖아.
-쓰레기 : 존나 나쁜 새끼 ㅋㅋㅋㅋㅋ
-낭자아이 : 이거 먹버 아니냐 먹버!
-퐁삽 : 영감에게는 차가운 남자. 하지만 내 낭자에게는 상냥하겠지
먹버는 뭐가 먹버야!
버린 적도 없지만 저런 늙은이는 줘도 안 먹어!
낭자아이라면
어…
그건 좀 고민되는데.
-쓰레기 : 헉. 내 낭자라고? 이거 완전 낭자아이 아님?
-츳키 : ㅁㅊ 싱크로 오지네
-낭자아이 : ㅎㄷㄷ;
쟤들 낭자아이가 진짜 여자 갤러리인거 알면 얼마나 놀랄까.
아는 사람만 아는 재미난 광경이다.
그런 점으로 보자면 츳키의 가식도 실로 상당하네.
역시 금수저답다.
기만 실력이 보통이 아니야.
‘니 아들이나 데려와. 계속 이런 식으로 시간만 끌어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어.’
납치범이나 할 만한 협박에 멜도바는 고개를 푹 숙이며 수석기사에게 손자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진즉에 이렇게 나올 것이지.
당당하기 짝이 없는 내 반응에 레이첼이 순수한 감탄을 보냈다.
“지팡이님도 이렇게 보니까 어엿한 악당 같네요.”
‘내가 뭐. 걔 어차피 여기 있어봤자 2년 내로 죽어.’
“네!? 왜 죽어요!?”
홀 내에 메아리까지 칠 정도의 외침에 기사들과 멜도바가 흠칫했다.
아니 미친.
그런 애매한 부분에서 반응하면 쟤들이 오해하잖아.
‘걱정 마. 손자 녀석 모근이 죽는다는 거야.’
“으으음…”
기사들은 이걸 웃어야 하는지 화를 내야 하는지 종잡지 못했다.
어떻게든 얼굴 근육에 힘을 줘서 인상을 구기는 게 안쓰럽기 짝이 없다.
“도련님을 모셔왔습니다.”
“들라 하라.”
중갑옷을 걸친 수석기사의 뒤로 건장한 체격과 진중한 기색을 지닌 청년이 뒤따라 들어섰다.
문무를 겸비한 만능형 인재.
변방의 야전사령관으로 썩히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준재(俊才), 레이널드 케이브리스의 등장이었다.
“할아버님. 수석기사 페이젠의 말이 사실입니까?”
“그렇다. 악신은 너를 차기 주교로 점쳤고, 이를 거절하면 요새도시는 참담하게 파괴당할 게다.”
“그럼 제가 대머리가 되지 않으면 도시가 멸망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레이널드의 물음에 멜도바는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한 죄책감일까.
가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손자에게 짐을 떠넘겨야 하는 처지에 대한 탄식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압도적인 악명과 실력 차이가 존재하는 한, 내 발언은 절대적이며 이 자리에 모인 어느 누구도 누구도 거스를 수 있는 확정사항이기도 하다.
후후.
이런 게 바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지.
“허나 거절하겠습니다.”
‘뭐!?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니가 거절하면 요새가 박살날 텐데도?’
“악신의 대사제가 되어서 대륙을 혼란케 할 거성을 새로이 띄우느니, 차라리 이 목숨과 요새를 바쳐서 혼란을 잠재우겠습니다.”
이런 제기랄…
뭐 이딴 건전한 녀석이 다 있어!
-츳키 : 개복치 의문의 악당행ㅋㅋㅋㅋㅋ
-쓰레기 : 괜히 착각에 장단 맞췄다가 개쓰레기 됨 ㅋㅋㅋ
-낭자아이 : 퍄퍄. 한방에 이미지 조졌네ㅋㅋㅋ
레이널드가 대머리였다면 인생에 자포자기하는 기질이 강해졌겠지만, 풍성충인 지금은 아직 세상에 정의가 있다는 믿음이 남아있어서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쩔 수 없군.
이렇게까지 강경한 대응을 보인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
『교섭을 시작합니다.』
『승리조건 : 레이널드가 대머리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패배조건 : 레이널드가 대머리의 숙명을 거절한다.』
바로 강제교섭의 시작이다.
-츳키 : 그보다 조건의 상태가 뭔가 이상한데?ㅋㅋㅋ
-낭자아이 : 교섭창이 미쳐 날뛰다 못해서 이젠 조건부터ㅋㅋㅋ
-람보르기니 : 얘 방송 뭔가 이상해ㅋㅋㅋㅋㅋ
나도 남의 방송은 가끔 챙겨봐서 교섭문 어떻게 뜨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걔들은 엄격 근엄 진지하게 뜨던데.
나만 사망플래그에 단련된 플레이를 해서 그런지 막장이 다 되가네.
『[랜덤 대화문]이 제시됩니다.』
『설득(화술 20 이상) : 악신의 대주교가 되는 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최초의 신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의 자비를 이용해 네 가문의 부흥을 꾀할 수도 있지.』
『유혹(매력 20 이상) : 날 보라고. 아이템이지만 엄청난 악명을 거머쥐니 이렇게나 살기가 편해졌잖아? 너도 악명만 쌓으면 지긋지긋한 촌구석 생활을 그만 둘 수 있다.』
『겁박(근력 30 이상) : 저항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하. 역시 애송이다운 하찮은 안목이군. 네놈이 싫다면 다른 인재가 선정될 것이고, 그에게는 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제시할 거다. 탐욕스러운 악인이 제안을 받는다면 오히려 악신의 교단도 한층 더 부흥할 수 있겠군.』
아니, 이걸 랜덤 대화문이…?
웬일로 세 개가 전부 정상적으로 나타났지.
상대가 비교적 만만해서 그런가.
신념의 견고함과 성향차이에 의한 반발 심리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우위를 결정하는 건 아니다.
시스템이 인식하는 우위란 능력치 스펙의 차이와 명성-혹은 악명-의 격차, 사회적 입지 등이 종합적으로 포함되어져 있다.
개인 대 개인으로서의 실력으로도, 소속집단의 위세로도 나는 레이널드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처해있는 것이다.
‘하. 진짜 새삼 눈물 나네. 얘도 넘사벽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갤러리들도 새삼 추억에 잠겨든 모양이었다.
얘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혼자 고민하는 척, 열심히 채팅방의 대화를 관음했다.
-낭자아이 : 장작도 못 캐오는 허접이라도 혼났었지
-쓰레기 : 착한 상관과 고문관 개복치 ㅋㅋㅋㅋ
-묵제 : 빌어먹을 사망플래그 때문에 남의 게임에서는 멀쩡했던 요새가 번번이 초전박살남ㅋㅋㅋㅋ
그만 알아보자.
‘대화문의 선택사항은 뭐 결정된 거나 다름없네.’
설득이나 유혹도 나쁜 건 아니다.
가문의 부흥.
촌구석 생활의 이탈.
이는 모두 청년시절의 레이널드가 꿈꿔왔었던 사항이며 미래를 아는 게이머이기에 구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다이스 게임도 그런 내 심리를 인지하고 있기에, 내가 인지하고 있는 정보 내에서 실현 가능한 랜덤 대화문이 짜여진 것이리라.
누구보다도 많은 사망플래그를 밟고 폭사했던 몸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거.
전부 다 지뢰이다.
‘훗. 밟으면 터질 게 뻔히 보이는 플래그 따위, 건너뛴다.’
미래의 레이널드라면 틀림없이 저 설득이나 유혹이 통했겠지.
하다못해 초대 가주 멜도바 케이브리스가 사망한 이후이거나 레이널드가 실전에 투입되어 본격적으로 몬스터 웨이브에 맞서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경험도 부족하고 부여된 책임도 거의 없다시피 한 시점에서는 그럴싸하게 좋다고 착각하도록 유도하는 선택문의 함정에 불과하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넘쳐나는 청년에게 막연한 미래를 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지.’
그런 자에게는 자신의 나약함을 지적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나약함을 지적하는 것이 도리어 효과적이다.
『‘겁박(근력 30 이상) : 저항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하. 역시 애송이다운 하찮은 안목이군. 네놈이 싫다면 다른 인재가 선정될 것이고, 그에게는 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제시할 거다. 탐욕스러운 악인이 제안을 받는다면 오히려 악신의 교단도 한층 더 부흥할 수 있겠군.’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널드는 빠득 이를 갈며 거칠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레이널드의 보유스킬 ‘명예원칙 : 군인’이 발동했습니다.』
스킬 이름도 딱 지 같은 게 걸리네.
에휴 명예충.
흉보는 내 심정은 까맣게 모르고 레이널드는 거친 반발심을 보였다.
「비겁한 악의 종자 같으니! 그런 사악한 수작에 당할 만큼 제국의 정병들이 나약할 것 같으냐!」
나도 한때는 정의나 반지 같은 걸 애타게 닦던 시절이 있었던지라 저 심정도 이해는 간다.
풋내기일 때에야 이게 옳아 빼애액 거릴 줄만 알았지.
하지만 수많은 실력파 악당들과 정적들에게 수도 없이 논파당하고 깨지면서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효과적으로 조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감각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자유발언 선택.’
『대사를 입력해주십시오.』
나는 본능적으로 어그로 만땅의 대화문을 입력했다.
「신념! 그거야 좋지. 숭고하고 희생적인 정신. 누구나 지킬 수만 있다면 신념을 고수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에 신념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는 걸 알고 있나? 가족을 아끼는 자는 가족이 인질로 잡히면 무너지고, 조국을 아끼는 자는 국가를 위한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무슨 개수작이냐!」
「내기해볼까? 지금 이 자리에서, 제국 제일의 지략가, 멘하이어에게 네 신병을 넘겨받겠다고 요구하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그가 과연 너를 넘기는 것을 국가를 위한 선택이라 여길지, 아닐지!」
「그건….」
「미약한 변경영지의 장자에 불과한 네놈과 달리, 진정으로 일국을 수호한다는 신념을 지킨 자의 선택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나? 네놈이 그토록 부르짖는 신념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남자의 선택이다. 자아. 자신은 없는가?」
물론 레이널드에게 이 대화를 따라올 힘은 부족하다.
자그마치 멘하이어가 아닌가.
정복왕의 제일의 조언자이자 제국 최강의 사기캐.
그의 위명은 게이머나 갤러리들뿐만 아니라 NPC들 내부에서도 자자하다.
가히 역사적인 인물이나 다름없는 자와 정면으로 대결을 펼쳐서, 그것도 승리를 거둔 내 앞에서 감히 멘하이어라는 천외천의 인물을 자신의 앞에 끌어들일 여력이 있을까.
절대로 없다.
이 남자의 정의가 아무리 두터울 지라도 거기까지는..
『레이널드의 보유스킬 ‘명예원칙 : 인류애’가 발동했습니다.』
……..아니!?
이건 또 뭔 스킬이야.
이딴 거 나 2천 회차 넘도록 한 번도 못봤다고.
「기만 따위에 위축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십니다. 인류는 당신의 생각처럼 그리 나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드리도록 하죠. 멘하이어님을 부를 수 있다면, 더욱 좋습니다. 진정한 신념은 국가를 초월한 전 인류적 평화를 위한 선택으로 이어질 테니까요!」
-퐁삽 : 미친… 레이널드가 저런 캐릭터였어?;;
-츳키 : 쟤 왜케 가식이 쩜
-소마 : 9개월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런 염세주의자로 역변하는 거냐ㄷㄷ
1년차가 지난 뒤의 레이널드는 수하들에게는 너그러운 상관이지만,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는 지금처럼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한다.
세월은 그에게서 젊음과 함께 정의를 빼앗아갈 터.
그가 저렇게 인류애라는 기가 막힌 스킬을 선보이는 것도 오직 지금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이다.
‘완전히 봉이 따로 없구나!’
정의가 있는 레이널드는, 그렇지 않은 레이널드보다 적어도 열 배 이상 상대하기 수월했다.
강점과 약점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니.
그의 정의는 어설픈 신념을 지닌 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무기이겠지만, 신념의 허실을 오래 전에 깨우친 내 앞에서는 갑옷 없이 벌거벗은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아아.
이제야 비로소 확실해졌다.
녀석은 벗어날 수 없다.
대머리가 될 운명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피할 수 없는 일정이 있었지만 전날 쌓아둔 2참 비축분을 올립니다!
독자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투약에 집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