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309
308화. 진화 (1)
쿠그그그긍-!
지축을 울리는 떨림이 요람을 강타한 그 시각.
대다수의 흑검병이 죄의 미궁으로 향했다.
이는 아무리 요람의 일에 귀찮아하는 코코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게 뭔 난리라니?”
타닷-.
빠르게 나무에서 나무를 뛰어넘어 숲을 주파하는 코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녀는 한밤의 소란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저 멀리 앞서가고 있는 흑검병 무리와 그 선두에 선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 코코가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선두를 따라잡은 코코.
“응?”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애꾸눈의 듀란이 옆을 흘끗거리며 알은 척을 해 왔다.
“오셨우?”
“무슨 일이니?”
“그걸 알면 내가 이리 발바닥에 땀띠 나게 뛰고 있겠소?”
“어머? 자신의 무능을 그리 표현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네?”
“이게 왜 내 탓이요?”
“단장이 없는 사이 여기 책임자가 너잖아?”
“아니, 그건……!”
“어머머, 지금 책임 회피하는 거야?”
“젠장, 내가 할망구랑 뭔 말을 하겠어.”
“…지금 뭐라고 씨부렸니?”
코코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하자 듀란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뭐! 내가 틀린 말 했나!”
“틀린 말은 아니지. 처맞을 말이지.”
달리면서 연신 투닥거리는 두 사람.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어느덧 죄의 미궁에 도달한 것이다.
“응?”
흑검병들은 서서히 속도를 늦춰 멈췄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미궁의 입구를 등지고 선 한 사내였다.
엠마가 두 부단장을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페터 레만? 먼저 도착해 있던 거면 상황을 보고해라.”
그녀의 그런 물음에 코코가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듀란아, 네 부관 년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
“…….”
코코의 타박에 듀란은 입을 다물었고 엠마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에 코코가 조소를 머금었다.
“어딜 봐서 저게 우리보다 먼저 와서 조사를 한 놈의 눈깔이니?”
“예?”
“딱 봐도, 이 악물고 어떻게든 수작을 부리려는 눈깔이잖아. 안 그렇니? 변절자 씨?”
그런 코코의 물음에 페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십니다. 하긴, 그래서 제가 당신을 가장 존경하면서도 싫어했었죠. 당신 앞에 서면 제 존재가 낱낱이 드러날 거만 같아서.”
스르릉-.
“아, 그런데 한 가지 틀린 게 있습니다. 전 변절자가 아닙니다. 애초부터 이쪽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검을 뽑아 든 페터의 이야기에 흑검병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 말은 다시 말해 그가 지금 벌어진 지진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특히 생각보다 더 충격이 커 보이는 엠마가 페터를 노려보며 물었다.
“대체… 미궁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이에 페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알려 드릴 거였으면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비켜 드렸겠죠.”
“당연히 그렇겠지.”
듀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살벌하게 눈을 번뜩였다.
“상관없다. 네놈을 치우고 우리가 알아내면 되는 거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고작 혼자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그 말에 페터도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누가 그럽니까? 제가 혼자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엄청난 수의 그림자가 치솟았다.
파바밧-!
갑자기 나타나 흑검병 무리를 포위한 이들.
이에 엠마가 놀라 눈을 치떴다.
“이런 자들이 대체 어디서……?!”
백색의 두건으로 눈 밑을 가린 정체불명의 무리.
그들은 한눈에 봐도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숫자가 족히 100명에 가깝다는 거였다.
‘이렇게나 무더기로 침입자가 발생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니!’
엠마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진짜로 아무도 몰랐다고?’
그래, 정말 많은 것을 양보해서 평소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모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에 준하는 경계가 발동된 상태다.
이 정도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있었다면 아무리 숨긴다고 한들 흔적이 남았을 터.
그리고 이는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알려졌을 거다.
특히 모든 흑검병의 이목이 쏠린 죄의 미궁 근방이라면 더더욱!
이 상황에서 엠마가 가정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저자들이 외부에서 침입한 녀석들이 아니라면?’
하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침입자들.
그들이 바로 저 페터 레만과 같은 변절자들이라면?
‘그럼 말이 된다!’
전시 상황임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대규모 병력 이동이 가능한 이들.
그게 가능한 건 바로 흑검병뿐이었으니까.
이에 엠마는 등 뒤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 올랐다.
‘변절자들이… 단지 저들뿐일까?’
저토록 많은 배신자가 있는데.
그들이…….
‘우리 중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표정이 굳은 엠마가 다급하게 입술을 떼었다.
“모……!”
동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페터가 더 빨랐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신호처럼 퍼져 나가고.
서걱- 푸슥-!
사방에서 핏물이 치솟으며 흑검병들이 쓰러졌다.
그리고 쓰러진 흑검병 근처에는 어김없이 검을 뽑아 든 흑검병이 있었으니.
“컥……!”
“왜… 애?”
바로 옆에 있던 동료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진 흑검병들.
그 숫자가 열댓 명에 달했다.
그렇게 동료를 찌른 흑검병들이 자리에서 이탈해 포위한 무리로 합류했다.
품에서 새하얀 복면을 꺼내 쓰면서.
“아……!”
예상했던 대로 자신들 사이에도 변절자들이 섞여 있었다.
그 탓에 살아남은 흑검병의 수는 채 스물도 되지 않았다.
사망자와 변절자 덕분에 순식간에 전력의 절반이 날아간 상황.
그럼에도 듀란과 코코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재밌는 수작을 부려 놓았군.”
그런 듀란의 말에 한쪽에서 답이 들려왔으니.
“이 한순간을 위해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결과를 보니 꽤 보람이 있군.”
답을 하며 포위한 무리 사이에서 나온 이는 파울 그라고르였다.
오른쪽 눈을 안대로 가린 독안(獨眼).
이를 본 코코가 실소를 흘렸다.
“쟤는 누가 봐도 네 상대 같다?”
“그렇군.”
듀란이 재밌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한쪽 눈이 없는 것도 비슷하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공인 9단의 부단장급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듀란의 상대가 정해지자 코코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 그럼 내 상대는 누구니? 또 재밌는 애 없어?”
그런 그녀의 물음에 페터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상대해 드리죠.”
“네가?”
코코의 표정에 곧바로 실망이 스쳤다.
이를 읽은 페터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린 순간.
고오오오-.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독안의 파울에 뒤지지 않는 기세.
이에 코코가 눈을 빛냈다.
부장급이라 생각되던 페터 레만.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그는 놀랍게도 공인 9단에 이른 강자였다.
“그만한 실력을 숨기고 사느라 심심했겠네?”
“…….”
코코의 물음에 페터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코코를 바라볼 뿐.
그 도전적인 시선에 그녀는 궐련을 꺼내 물었다.
치익-.
궐련에 새빨간 불똥이 피어오르고.
차랑-!
코코가 두 개의 쌍절곤을 꺼내 쥔 채 환히 웃으며 외쳤다.
“어디, 재밌게 놀아 보자! 꺄하하하!”
기쁨과 투기, 광기가 가득 담긴 그녀의 기괴한 웃음소리는 듣는이로 하여금 심장이 울렁이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코코가 페터를 향해 쇄도했고, 곧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되어 숲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우리도 시작하자고.”
“흐흐흐.”
쾅-!
듀란과 파울이 격돌했다.
* * *
결정은 내렸지만, 여전히 망설임은 남아 있었다.
귀걸이로 손을 가져가는 유리의 머릿속에 과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놈의 영혈 속 마나 핵의 응집력은 기이한 수준이다. 그러니 괜히 함부로 손댔다가 사달 일으키지 말고, 엔간해서는 귀걸이 빼지 말어!]자신의 뚫린 영혈을 막아 주고 있는 샤리 귀걸이를 뺏다가는 마나 로드를 돌리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라던 요한의 경고.
이를 상기하며 유리의 손이 귀걸이에 닿았다.
‘알아… 나도 안다고, 영감탱이.’
귀걸이를 빼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진솔한 대화?’
과연 정말로 눈앞의 노인네가 단순히 대화만을 원하는 걸까?
그 질문에 유리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히 답할 수 있었다.
‘까고 있네.’
노인의 노회한 눈동자를 본 순간.
그 속에 담긴 기괴한 감정을 읽은 유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확실히 느꼈다.
이 대화는 단순히 대화로 끝나지 않으리란 걸.
하여 그는 결정을 내릴 수 있던 것이다.
‘마나 로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달칵-.
유리의 손이 왼쪽 귀걸이를 빼냈고.
‘일단은 살고 봐야지 않겠어?’
달칵-.
곧이어 오른쪽 귀걸이마저 빼냈다.
“후우…….”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빼지 않았던 귀걸이를 주머니에 고이 찔러 넣은 유리의 소감은 간단했다.
‘시원하네.’
아니, 살짝 가려운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뿐이었다.
귀걸이를 뺐다고 엄청 극적인 변화 따위는 없었다.
귓불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 정도?
이에 유리는 안도했다.
‘다행이네.’
아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오히려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별문제 없이 지나간다면 다시 귀걸이를 끼워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양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유리를 노인은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다 된 거냐?”
“대답 준비 완료.”
대답을 준비하는 것과 귀걸이를 빼는 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 노인은 잘 알지 못했다.
아니, 딱히 관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일단 그가 느끼기에도 눈앞의 소년에게서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니까.
하여 노인은 곧장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갔다.
“광인을… 누구에게 배운 것이냐.”
모두를 내보내면서까지.
눈앞의 소년과 단둘이 남아서 묻고 싶었던 질문.
머릿속을 혼잡스럽게 만든 그 궁금증을 드디어 내뱉은 노인은 유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서 답을 하라는 듯 말이다.
이에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광인?”
“말했을 거다. 내가 호의를 베푼 만큼 너 역시 거짓 없이 답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순식간에 살기를 띤 노인의 눈빛에 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쏘아 붙였다.
“광인을 누구한테 배웠는지 묻기 전에 그 광인인지 뭐시기가 뭔지 알려 줘야 하는 게 순서 아닌가?”
“…그조차 모른다는 거냐.”
탄식과 같은 말을 내뱉은 노인은 유리를 잠시 바라보다 손을 들었다.
그리고.
“광인이란…….”
스스스-.
그의 손에 황금빛 선이 선명이 떠올랐다.
마치 자신의 광혈처럼 말이다.
“이를 말하는 것이다.”
“어?!”
그걸 본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당연지사.
“뭐야? 당신도 그거 할 줄 알아?”
“답하거라. 광인을 누구에게 배운 것이냐.”
“그걸 광인이라고 하나 보지? 난 광혈이라고 부르는데.”
“광혈?”
“라이더 가문의 흑혈을 보고 따라 한 거거든.”
“…흑혈을 보고 따라 했다?”
“응, 그래서 광혈이라고 이름 붙였지.”
“그 말은…….”
노인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게 아니다?”
“당연히. 그냥 혼자 익힌 건데.”
노인은 말없이 유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 깃든 진솔함을 읽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은 아니군.”
“원래는 광인이라고 부르나 보네? 오!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뭐 좀 물어봅시다.”
“…….”
“광혈… 아니, 광인이라는 거 쓰면 예전에는 막 마나도 충전되고 그랬는데 이제는 안 되더라고? 이거 왜 그런지 알아?”
적에게 제 의문을 물어보는 그 모습을 보았다면 요한은 혀를 찼을 거다.
진즉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정신 나간 놈이었다고.
한편 별생각 없어 보이는 유리를 보며 노인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네 녀석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군.”
“모르니까, 좀 알려 줄 수도 있지 않나?”
“이름이 무어냐.”
“저기, 제가 먼저 질문했습니다만?”
“이름.”
강압적인 목소리에 유리의 주둥이가 삐죽 튀어나오며 씰룩였다.
“…유리 홀랜드.”
“홀랜드라… 부모는?”
“그런 거 없는데?”
“출신은 어디더냐?”
“떠돌이 고아 출신입니다만?”
난데없는 호구 조사에 유리의 표정이 아니꼽게 변했다.
노인은 그런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유리의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말이다.
마치 자신의 것과 같은 황금빛.
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생기를 머금은 눈동자.
노인은 이를 말없이 응시했다.
“…….”
“…….”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옘병.’
유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별일 없이 넘어가긴…….’
제발 이번만은 자신이 잘못 느꼈길 바랐지만, 어림없었다.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노인의 동공 깊은 곳.
그곳에서 스멀스멀 커져 가는 음험한 기운.
그건…….
‘이젠 아예 숨기지도 않는군.’
…자신을 향한 지독한 살기였다.
그리고 이를 감지한 순간.
꿀렁-.
유리의 그림자가 미약하게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