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here to end this fight RAW novel - Chapter 44
43화. 용패갈이 (2)
유리가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한 소년이 통로 끝자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꿀을 바른 듯 짙은 금발, 암갈색의 눈동자.
언뜻 평범해 보이는 외모.
그리고 예비 기수들이 입은 것과 같은 검은 의복.
“쿨럭쿨럭, 아니… 잠깐 눈만 좀 피하려고 했더니만 이게 다 뭔 난리래?”
함정을 돌파하며 쌓인 먼지를 털어 내며, 소년은 연신 투덜거렸다.
숨을 죽이고 침입자를 관찰하던 유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비 기수?’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달라.’
옷은 똑같았지만, 소년의 어깨에는 노란색의 견장이 달려 있었다.
더군다나 견장은 새것이 아닌 듯 때가 묻고 닳아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써 온 것처럼.’
거기다 저 소년에게는 어딘가 모를 여유가 느껴졌다.
그렇게 유리가 관찰하는 사이 장작의 빛으로 들어선 침입자가 동굴의 어둠을 빤히 응시했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그리 말한 소년이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렸다.
마치 송곳을 확대해 놓은 듯, 특이한 모양새의 검.
소년이 뾰족한 검 끝을 어둠을 향해 겨누며 히죽거렸다.
“어이, 선배님이 오셨으면 잽싸게 마중을 나와야지. 예의 없는 후배 새끼구먼.”
침입자는 가만히 검 끝을 어둠을 향해 겨누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이어진 적막.
“어… 음… 이쪽이 아닌가?”
아무리 기다려도 어떤 반응도 오지 않자 되레 침입자의 표정이 어색해지려는 찰나.
휘웅-.
급작스럽게 몰아친 돌풍에 장작의 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 순간.
“어딜 보고 계시는 겁니까, 선배 새끼야.”
“……?!”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침입자가 크게 몸을 선회하자 그 바람에 위태위태하던 장작불이 기어코 꺼져 버렸다.
덕분에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버린 동굴.
그 속에서….
챙- 빡-.
1번의 쇳소리와 박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온 뒤, 완벽한 고요가 찾아들었다.
* * *
시간이 흘러.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동굴 안.
파르르-.
깊이 잠들었던 제리 비(Bee)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서서히 의식을 되찾고 있다는 증거였다.
깊은 심연에서 깨어나는 그에게 찾아든 것은 뒤통수로부터 전해지는 끔찍한 통증이었다.
“끄응…….”
아직 온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음에도 앓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의 아픔.
그런 고통 덕분에 제리는 더욱 빠르게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마침내 떠지는 제리는 두 눈.
“으음…….”
점차 상이 잡히기 시작한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잡혀 든 것은 코앞에 놓인 ‘피 묻은 짱돌’이었다.
깜빡 깜빡-.
“…….”
아직 멍한 상태였음에도 제리는 저 피 묻은 짱돌이 제 뒤통수를 후려갈긴 흉기임을 직감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으니.
‘저게 왜… 이렇게 보이지?’
바로 지면에 놓인 짱돌이 아주 반듯하게 보인다는 거였다.
응당 기절했다 깨어났다면 가장 먼저 천장이 보인다거나.
아니면 옆으로 누운 상태여서 세상이 가로로 보인다거나.
대충 그래야 했다.
하지만 제리의 눈에 비친 짱돌은 지면에 수평으로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코앞에!
이건 마치…….
‘목이 잘린 상태로 땅바닥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럴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자 멍하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났다.
동시에 그는 목 아래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서, 설마?! 정말로 목이 잘린 거야?!”
하지만 목이 잘린 사람이 어찌 살아 있을까.
뒤늦게 약간의 이성은 되찾은 그는 다행히 목 아래로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몇 초 지나지 않아 제리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고 흐릿하게 웃었다.
“헤… 그냥 생매장당한 거구나.”
땅속 깊숙이 매장된 채 얼굴만 빼꼼히 내민 상태.
그게 현재 제리의 상태였다.
‘다행이네. 목이 잘리거나, 반신불수가 되는 것보다는 생매장이 훨씬 낫지.’
1년 전의 그였다면 현재 상황에서 이리 태연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용의 요람에서 보낸 1년이란 시간은 그를 이런 상황에서도 ‘다행이다’라고 말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렇다고 해도 제리 역시 생매장을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탈출할 수 있을까?’
제리는 팔다리를 꼼지락거리다가 인상을 구겼다.
‘이런… 그냥 파묻은 게 아니라 결박까지 해서 묻었잖아?’
살짝 짜증을 낸 제리는 포기하지 않고 탈출하기 위해 열심히 꿈지럭거렸다.
안간힘을 써 가며 팔다리도 움직여 보고.
마나까지 사용해 본 결과, 제리는 버럭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뭘, 어떻게 묻으면 이 정도로 꼼짝을 안 하냐!”
갖은 노력에도 그가 묻힌 땅은 들썩임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땅에 묻는 기술자가 있다면, 자신을 묻은 놈은 달인의 경지에 다다른 이일 것이다.
“하아…….”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제리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장을 보며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잘못된 거지?”
어디서부터 꼬여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제리는 천천히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분명 이번 주 내내 운이 좋았었지.’
간혹 그럴 때가 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운수 좋은 날.
제리에게는 요 며칠간이 바로 그런 날들이었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500포인트를 주웠고.
몇 달 동안 진전이 없던 경지가 갑작스럽게 찾아든 작은 깨달음 덕분에 한 걸음 나아갔다.
거기다 이게 웬걸?
자신의 몸 상태가 최상인 것을 알기라도 하듯, 기다리고 기다리던 용패갈이가 예상보다 하루 일찍 앞당겨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무언가 착착 맞물리는 상황.
제리는 마치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끝내주는 기분을 안고 시작된 용패갈이.
휘오오-.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시작의 숲을 보며 제리는 무언가 강한 직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나… 이번에 뭔가 제대로 터질 거 같은데?’
요 며칠간 계속된 행운.
이번 용패갈이에서도 그 행운이 터져 줄 것만 같았다.
‘이거 잘하면 나도 용패를 갈아 치울 수 있을지도!’
자신이라고 언제까지 은룡패에 만족하며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 기회에 금룡패로 바꿔 보는 거다!
‘그게 아니면 포인트 대박이라도 한번 터져라!’
더 좋은 건 금룡패를 지닌 예비 기수가 포인트까지 빵빵하게 들고 있는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제리는 가벼운 걸음으로 시작의 숲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날씨가 문제였다.
점점 더 심해지는 눈보라에 제리는 잠시 이를 피하려 했는데…….
풀썩-.
‘엉?’
갑자기 제리가 발을 디딘 지면이 푹 꺼지며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입구가 드러났다.
마치 이리로 들어가라는 듯 말이다.
‘오!’
이게 웬 행운이냐는 듯 밝게 웃으며 지하 동굴로 들어선 제리.
곧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누군가 인위적으로 막아 놓은 흔적인데?’
제리가 지하 동굴을 발견한 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이 넓은 시작의 숲에서.
하필 디딘 땅이.
고작 지름 1m 남짓한, 나뭇가지와 이파리로 만든 간이 출입문이 놓인 자리였다니.
원래는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입구를 정말 우연의 일치로 찾은 제리.
그는 마나를 눈 쪽으로 돌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자 어둠에 잠긴 통로가 옅게 보였다.
폭과 높이가 2m 되어 보이는 통로.
그 깊이도 꽤 되는지 통로 뒤쪽으로 갈수록 어둠이 짙어졌다.
‘시작의 숲에 이런 곳이 있었네?’
딱- 봐도 무언가 있어 보이는 장소.
거기에 누군가 막아 둔 입구까지.
‘오호라?’
호기심과 기대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또한, 간이 입구의 재료로 쓰인 나뭇가지가 덜 마른 상태였다.
그건 이 동굴에 주인이 생긴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
‘즉, 이 동굴의 주인이 이번에 들어온 예비 기수라는 뜻이겠지!’
스릉-.
제리는 검을 뽑아 들고 조심스럽게 통로로 나아갔다.
그리고.
‘으엣, 깜짝이야!’
함정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딱- 캉!
갑작스럽게 돌멩이가 날아온다든지.
쉭- 탁!
발목을 노리고 나뭇가지가 휘둘러진다든지.
팡!
땅에 묻어 둔 나무줄기가 갑자기 튀어나온다든지.
도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도 모를 함정이 무수히 튀어나왔다.
‘뭐, 조금 요란스럽기는 해도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네.’
제리는 빠른 속도로 함정을 파훼해 나갔고 덩달아 기대감이 급상승했다.
‘이 동굴의 주인… 평범한 예비 기수가 아니다.’
고작 황룡패주가 이런 함정을 만들어 낸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제리의 눈이 반짝였다.
‘확실히 금룡패주다!’
1년간 요람에서 쌓은 경험, 그리고 최고의 몸 상태인 오늘이라면 아직 예비 기수에 불과한 금룡패주 정도는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들었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함정의 끝자락, 옅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 도착해서…….
[어딜 보고 계시는 겁니까, 선배 새끼야.]빡!
시원스럽게 뒤통수가 까였다.
욱씬- 욱씬-.
과거의 기억과 함께 다시금 되살아난 뒤통수의 통증에 제리는 인상을 썼다.
“그 새끼, 치사하게 기습을…….”
짙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녀석을 욕하던 제리가 순간 움찔거렸다.
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기습이 아니었으면… 막을 수 있었을까?’
짙은 어둠 때문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은 분명 정면에 있었다는 거였다.
그런데…….
‘순식간에 배후를 잡혔어.’
놈이 언제 움직인 건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뒤를 잡은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완벽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소리였다.
‘예비 기수인 주제에 내 사각을 파고들었다고?’
비록 자신이 은룡패이기는 하지만, 만약 지금 요람의 시험을 치르던 때로 돌아간다면 금룡패 정도는 무난하게 받아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이… 비록 뒤늦게 반응해 한 번의 공격을 막아 냈다고는 해도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에 제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젠장, 어쩐지 요 며칠 운이 좋더라니…….”
자신의 운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운이 너무 좋았던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하, 대충 금룡패 정도면 됐을 텐데 한 방에 백룡패주가 걸리냐.”
백룡패와 금룡패는 비록 한 단계 차이일지라도 통상적으로 금룡패주 다섯이 백룡패주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다.
그것도 예비 기수 시절에 말이다.
그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고 백룡패주는 점차 건들 수 없는 괴물이 되어 간다.
다시 말해 백룡패주는 예비 기수 시절부터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거다.
그럼에도 제리가 백룡패주를 신경 쓰지 않은 건 그들의 숫자 때문이었다.
한 해, 요람에 들어오는 이들 중 백룡패의 주인은 많아야 5명 내외.
정말 많아야 다섯인 거다.
그런 이들을 이 넓은 시작의 숲에서 맞닥뜨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자신은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하필 백룡패주로 짐작되는 녀석과 단번에 맞닥뜨리다니.
“하… 이젠 운이 좋아도 문제네.”
뭔가 제대로 터질 거 같은 예감?
“터지긴 터졌네, 내 뒤통수가.”
제리가 어이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은 순간.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갑자기 눈앞에 검은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지며 새하얀 얼굴이 거꾸로 나타났다.
기척도 없이, 그것도 코앞에 사람 얼굴이 거꾸로 불쑥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놀란 제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흐갸아아악!”
어찌나 놀랐던지 눈을 까뒤집으며 경기를 일으킨 제리.
만약 몸이 땅에 묻혀 있지만 않았으면 갓 잡힌 물고기처럼 팔딱거렸으리라.
그사이 검은 그림자가 제리의 머리를 넘어갔다.
탁-.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신발을 본 제리가 소리쳤다.
“시, 시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기척 좀 내고 다녀라!”
“내가 왜?”
…그러게, 왤까?
할 말이 없어진 제리가 궁색하게 답했다.
“내, 내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걸 못 알아차린 놈이 병신 아닌가? 나 아까부터 뒤에 있었는데?”
“…언제부터?”
“네가 ‘서, 설마?! 정말로 목이 잘린 거야?!’라고 소리쳤을 때부터?”
“…내가 깨어났을 때부터 있었다는 거네?
“응.”
“…….”
기척을 알아차리는 것도 실력.
그렇게나 가까이 있는 상대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건 정말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는 거였다.
제리는 입을 꾹 다물고 대신 자신의 앞에 불량스럽게 쭈그려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
그리고 자세와 꼭 잘 어울리는 불량스러운 입매.
무언가 싸한 기분을 느낀 제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 이름 모를 후배군?”
“왜, 이름 모를 선배야.”
“저기 그래도 내가 선배인데 말을 좀 가려 가며…….”
“너, 선배 맞긴 해? 뭔 선배라는 게 이리 허약해?”
“나… 선배 맞는데.”
“선배는 무슨. 요즘은 칼침 놓으려고 살금살금 접근하는 걸 선배라고 하나?”
“그… 요람에서는 원래 그래……. 그리고 내가 언제 살금살금…….”
무언가 반박을 해서 선배로서의 위엄을 세우고 싶어도, 단번에 제압당해 땅속에 처박힌 상태로 잘도 위엄이 설까 싶었다.
제리의 시무룩한 모습에, 유리가 혀를 차며 물었다.
“쯧, 그래서 이름 모를 선배의 이름은?”
“제리 비.”
“몇 기?”
“…49기.”
“2년 차?”
“그래.”
“정말 49기?”
“진짜야…….”
제발 좀 믿으라는 듯한 제리의 눈빛 공세에 유리는 묘한 이채를 발했다.
“그렇단 말이지.”
“……?”
“그래서 2년 차가 여긴 무슨 일인데? 소풍을 온 건 아닐 테고.”
“그건…….”
유리의 질문에 제리는 입을 다물었다.
예비 기수에게 제압당한 것도 창피한 일인데 알고 있는 걸 전부 술술 불 수는 없지 않은가.
동기들이 알면 이건 평생 놀림감이었다.
‘특히 험프리 새끼가 이 사실을 알면?!’
어차피 이틀 뒤면 시험이 끝났다.
그때까지 탈출을 하든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될 일.
차라리 이틀 고생하는 게 험프리에게 놀림당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제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를 본 유리는 히죽거렸다.
“아하? 선배로서 자존이 있어서 그거까지는 알려 주지 못하겠다?”
“…….”
“정말로?”
“…….”
“뭐, 좋아.”
제리가 입을 열 기색이 없어 보이자 유리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흐흐흐.”
대신 불길한 웃음을 흘린 그는 제리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