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living as a healer in the fantasy Nord world RAW novel - Chapter 45
45화
“윤재 형, 진짜 진짜 나쁘다! 이렇게 인터셉트하기 있음?!”
그간 공기가 되어 손가락만 빨던 테세우스가 격분해 외쳤다. 테세우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섰지만, 크라이그는 그런 테세우스를 가볍게 무시했다.
정리된 상황에 다가온 파파와 노네임이 테세우스의 팔을 한쪽씩 맡아 붙잡았다. 왜 그러느냐는 테세우스의 귀로 노네임이 작게 속삭였다.
“도훈아,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처음부터 가망 없었어.”
비웃음 가득한 표정은 물론, 묵직한 팩트 공격이 테세우스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에 멘탈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는 어버버 입을 떨며 허무한 눈으로 크라이그를 쳐다봤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크라이그와 리디안이 가까이 붙어 있었다. 크라이그는 잔뜩 겁먹은 리디안을 은근하게 놀리나 싶더니 어느새 표정을 싹 지운 채, 코헤이와 외이리를 향해 말했다.
“그럼, 거기 세인트분들. 저희 따라오세요.”
“그, 그래도 아이템은……!”
“떨구고 20분 동안은 안 녹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
마치 내가 그런 거까지 신경 써줘야 하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코헤이는 짜증 섞인 그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몰래 나와 따거를 살려 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하… 모르겠다. 그냥 가자.”
결국 코헤이는 외이리와 함께 레기온 길드원을 따라갔다. 구석진 던전 한쪽에는 버려진 따거의 시체만 쓸쓸히 존재할 뿐이었다.
* * *
한참 전까지 있던 보스 구역은 짧은 시간 사이, 인파가 부쩍 늘어나 있었다.
리디안은 기둥 안팎으로 즐비한 플레이어들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 소란스러운 보스 구역에 리디안, 크라이그, 파파, 노네임의 등장하자 그곳에 몰려 있던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인파들은 잠시 웅성거리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이노센트가 불쑥 튀어나왔다.
“리디! 괜찮아?”
“이노 언니……! 아, 길마님에 부길마님까지……. 다 오셨네요.”
마제스티, 백검, 이모탈, 일반인, 이터널리스트, 독재. 그리고 적혈구와 아이쿠 역시 리디안 일행이 도착함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왔다.
별일 없었냐는 적혈구의 물음에 리디안은 쓴웃음을 뱉었다. 별일이야 있었죠. 그 힘없는 대꾸에 모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 근데 따거는? 윤재가 잡았어?”
크라이그의 검닉 상태를 알아본 이노센트가 놀란 듯 물었다. 모여든 플레이어들도 등장부터 알아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리디안은 설마 하는 마음에 부릅뜬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한편. 반쯤 장난으로 건넨 말인데. 정말 자기 목숨을 책임지려는 듯 바짝 긴장한 리디안의 모습에 크라이그는 이유 모를 웃음을 삼켰다.
보스 구역 오른쪽, 왼쪽으로 나뉜 진영에 레기온 길드와 태양 길드가 있었다.
태양 측에는 부길드 마스터인 핑크푸크. 그리고 하이 랭커인 오디오스, 검은양, 안개꽃이 새로 온 상태였다.
기존에 있던 멤버들만 해도 열두 명이나 됐기에 새로운 길드원들이 등장한 현재, 태양 길드 인원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모탈 님의 파티와 동맹이 되었습니다.] [적혈구 님의 파티와 동맹이 되었습니다.]레기온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미리 파티 동맹부터 맺었다. 검닉이 된 크라이그를 건드는 순간, 길드 전면전이 일어날 게 뻔했지만.
백검은 태양 측에서 그런 모험을 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대장군이라는 강력한 전력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태양이 어리석게 시비를 걸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크라이그 님이 따거 형님 처리한 모양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플레이어 정보
이름 : 핑크푸크 / 길드 : 태양
레벨 : 79 / 직업 : 아쳐 / 보조 직업 : 연금술사
HP : 3120 / MP : 1030
한 발짝 앞으로 나온 이는 태양 길드의 부길마 핑크푸크였다.
그는 검닉인 크라이그를 향해 물었지만 크라이그는 대답 없이 스윽 고개를 돌려 리디안을 바라봤다.
“괜찮으니까 있었던 일, 그대로 말해요.”
겁먹거나 눈치 보지 말라는 크라이그의 어투에 안심한 리디안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마주했다. 와이리를 비롯한 몇몇 사람에게서 아니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전달된 사실에 태양 측 표정이 구겨졌다. 아무리 레기온과 사이가 좋지 않다곤 해도, 고작 아이템 하나에 눈이 돌아가 이 사달을 냈다는 걸 들었을 때도 어이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은인이나 다름없는 세인트를 공격까지 했다니…….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평소 이런 자리면 나서서 조잘거리던 오디오스 역시 이번 사태에 할 말이 없어 조용히 서있었다.
“지금 이 얘기, 사실입니까?”
마제스티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증인이나 다름없는 코헤이와 외이리가 서로의 눈치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길드라고 실드를 쳐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태양 길드원들도 저마다 한숨 쉬며 고개 돌렸다.
“왜 우리 길드 힐러분이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것도 도와주러 와서요. 할 말 있으면 어디 해보시죠.”
마제스티가 따지듯 말했다. 몹시 공격적인 어투였음에도. 태양 부길드 마스터 핑크푸크는 기분 나쁜 티를 낼 수 없었다.
“리디안 님이 보호막 두른 거 보고 하도 어이없어서 제가 먼저 따거 님 피케이했습니다. 지금도 거기 누워 있을 거고요. 아이템 좀 흘린 것 같던데… 그건 참고하세요. 그리고 제가 딱히 사과할 생각은 없지만, 따거 님이 대표로 리디안 님한테 사과하면 저도 따거 님한테 사과드리겠습니다.”
크라이그가 나서서 한마디 했지만, 태양 길드원들은 그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 따거가 미치지 않고서야, 무조건 자기가 옳은 줄 아는 안하무인이 제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고개 숙일 리 없었다. 그러니 레기온에서 따거를 상대로 무필, 척살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죄송합니다. 따거 형님 문제 많은 거 길드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부길마인 제가 말씀드리기 좀 부끄럽지만, 제어가 안 되는 사람이라…….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핑크푸크가 꾸벅 고개 숙였지만, 레기온의 시선은 싸늘했다.
“문제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왜 관리 안 하세요?”
날카로운 한마디를 던진 이는 이노센트였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핑크푸크는 작은 한숨과 함께 대답을 망설였다.
따거는 노르드 월드에서 알게 된 지인이었고, 좀 친해지다 보니 가까운 지역 사람인 걸 알았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만났을 뿐인데……. 소싯적 건달, 양아치로 활동하다 지금도 관계를 유지하는 그쪽 계열 사람이라는 걸 알아버린 탓에 핑크푸크는 따거를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시고 있었다.
원래는 조용히 게임만 하던 사람이었으나, 부길드 마스터인 핑크푸크를 동생 삼은 뒤로는 늘 문제의 연속이었다.
따거는 항상 대접받길 원했고, 대접받는 걸 좋아했다. 대접받기는 좋아해서일까? 따거는 ‘노저씨’ 중 ‘상노저씨’스럽게 자기보다 어리면 무조건 말을 놓았고, 자기보다 어린 길드 마스터와 부길드 마스터에게 항상 훈수를 뒀다.
길드 마스터인 대장군 본주의 접속 시간이 줄고 부주의 접속 시간이 늘어난 건 그때부터였다.
꽤 규모가 큰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어 공개적으로 얼굴과 신상이 알려진 대장군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바지 길마라는 둥, 대장군을 향한 오해와 비난이 심해졌지만 자꾸 만나자는 따거의 요구를 피하려면 그게 최선이었다.
그 뒤로 핑크푸크가 실질적인 길드 마스터 역할을 맡게 되었지만, 비선 실세나 다름없는 따거 때문에 길드 운영에 있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따거를 내치기에는 자신을 비롯한 길드원들의 사소한 신상을 쥐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려 그러지도 못했다.
차라리 한번 벌려 놓고 문제가 생기면 경찰을 부르면 되지 않겠냐고, 누군가 그리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평범한 사회인으로선 되도록 그쪽 계열 사람과는 현실에서 엮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핑크푸크는 화난 따거를 달랠 생각을 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길드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요…….”
“나 참, 굳이 쓰레기봉투 껴안고 있는 이유는 뭐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노센트가 한심하단 듯 중얼거렸다. 그에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사나워졌지만, 그때뿐이었다. 핑크푸크가 리디안을 향해 다시 고개 숙였기 때문이다.
“리디안 님, 저희 길드원이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길마인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핑크푸크를 바라보는 리디안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따거 본인이 아닌, 타인이 대리 사과하는 모습은 참 불편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막무가내 아저씨 성격상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머리 숙일 것 같진 않았다. 결국, 자기만 크게 손해 본 꼴이었다.
“리디안 님, 마음에 안 들면 말해요. 기분 나아질 때까지 따거가 필드 못 나오게 해드릴 수도 있어요.”
리디안의 뚱한 표정을 읽은 마제스티가 그리 속삭였다. 가까이 있어 들을 수밖에 없던 핑크푸크의 얼굴이 수치심에 벌게졌다.
아무리 따거가 잘못했다 해도 자기 길드원이 무필당하는 걸 보는 것은 상당한 치욕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투 길드의 방식이기에 핑크푸크는 반박할 수 없었다.
리디안은 듬직한 길드 마스터 마제스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본인한테 직접 사과받지 못한 게 좀 그렇지만, 솔직히 가망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핑크푸크 님이 대신 사과하셨으니까요. 저는 그냥 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죠.”
그에 레기온 길드 사람들이 피식하고 웃었다. 리디안은 자신도 모르게 필터링 없이 나온 말에 놀라 슬쩍 태양 길드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발언을 불편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몇 보였으나, 딱히 겉으로 표출하는 사람은 없었다. 따거가 똥인 건 사실이었으니까. 부길드 마스터인 핑크푸크 역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레기온 길드분들에게도 죄송합니다. 베풀어 주신 선의를 악의로 갚아 죄송합니다. 인첸트 스톤도 신경 쓰지 마세요. 당연히 리디안 님 소유예요. 가능한 따거 형님이랑 잘 얘기해서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게요.”
힐끔 자신을 바라보는 핑크푸크의 눈짓에 마제스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평화롭게 일단락되는 분위기에 조용했던 태양 길드들도 작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별문제 없어 다행이라고, 여전히 변색된 크라이그의 아이디를 본 리디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때, 태양 길드의 실버린과 소소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도와 달라고 요청해서……. 좋은 마음으로 오셨는데 기분만 상하게 해서 너무 죄송해요.”
시무룩한 소소를 보며 괜찮다며 웃었지만, 리디안의 마음은 무거웠다. 다음부터는 누가 됐든 선뜻 도와줄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태양 길드의 해당 파티원들이 리디안의 파티원들을 찾아가 사과하는 것을 끝으로 따거 사태가 수습됐다.
혹시 몰라 무장하고 달려온 태양의 하이 랭커들은 너무나도 적나라한 따거의 삽질에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벌써 10분 넘었는데, 따거 귀환했겠네? 템은?”
“아까 누가 챙기러 가던데요.”
“녹을 때까지 못 먹게 지킬 걸 그랬나?”
“너어는 진짜…….”
“으휴, 초딩이냐.”
던전 내에는 레기온만 남은 상태였다. 대다수가 리디안에게 다가가 마음 쓰지 말라며 위로하는 사이, 이터널리스트는 태양이 빠져나간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번 일로 우리가 제대로 찍어 누르긴 했는데, 좀 허무하네. 너무 저자세로 나오니까 기분이 이상해. 쟤네 성격이 많이 죽은 건가? 아니면 사람 도리 하는 건가?”
“게임 시절이면 모를까. 여기서 우리한테 처발릴 거 아니까 함부로 못 나대는 거죠. 게임이었어 봐요. 시시비비 따지기도 전에 게거품 물면서 달려들었을걸요?”
“그리고 우리가 쟤네 한두 번 겪어 봤어요?” 경멸을 감추지 않은 아이쿠의 발언에 모두가 틀린 말은 아니라며 동의했다.
“하긴, 그동안 대장군 캐릭만 믿고 깝쳤는데 혼자 2인분 하던 부주가 없으니……. 저기도 이제 얼마 못 가겠네.”
“그 쓰레기 봉지만 버리면 간신히 호흡기는 떼겠다. 그 새끼 길드에 붙어 있는 한, 저긴 절대 발전 못 해.”
“맞아요, 누님.”
“아놔, 따거 새끼 때문에 우리 리디안 님 업도 못 하고 이게 뭐야!”
마지막으로 끼어든 이는 테세우스였다.
“저거, 저거. 또 시작한다.”
이노센트가 절레절레 고개 흔들기가 무섭게.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일반인이 스윽 나타나 테세우스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악 소리 지르며 구석으로 끌려가는 테세우스 모습에 모두가 혀를 차며 외면했다.
따거의 민폐 사태도 다 정리된 마당에, 더 머물 필요가 없었기에 마제스티가 손뼉을 치며 시선을 끌었다.
“자자, 우리도 그만 귀환합시다.”
그리하여 모두 사이좋게 대기실로 빠져나왔다.
미로 파티 역시 흐름이 끊긴 탓에 그대로 레벨 업이 중단됐다. 적혈구도 리디안을 향해 오늘은 그냥 푹 쉬라며 신경 써주었다. 조금 전 따거의 일로 증폭된 불안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던 터라, 리디안은 그 배려에 몹시 감사할 뿐이었다.
“윤재, 너 어디 나가서 돌아다닐 생각 말고 아지트에 짱박혀 있어. 괜히 나가서 표적 되지 말고.”
대기실에서 곧장 아지트 귀환을 쓴 직후였다. 마제스티는 아지트로 이동된 크라이그를 보자마자 명령하듯 말했다. 하지만 크라이그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검닉으로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스릴 넘치는데요.”
힐끔 출입문을 바라보는 고갯짓에 리디안이 경악했다. 근처에서도 크라이그를 향해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실제로 검닉이 된 상태에서 도시를 돌아다니는 간 큰 플레이어가 없지는 않았다. 죽이고 템 주워 먹으려 달려드는 플레이어들을 끌고 다니며 농락하는 게 페널티 모드의 은근한 묘미였으니까.
“리디안 님 데리고 다니면 안 죽을 것 같기도 하고.”
유난히 짓궂게 웃는 모습에 리디안은 주륵 눈물을 흘렸다. 아무래도 크라이그는 자기를 간접 살인자로 만들 생각이 분명했다.
“어휴, 저 미친놈.”
“근데 진짜 윤재 형은 돌아다녀도 안 죽고 피해 다닐 것 같아서 더 소름.”
“야, 그게 더 재수 없어.”
“암튼 너 알아서 해라.”
한마디씩 던진 길드원들이 차례차례 아지트를 빠져나갔다. 기를 쓰고 다가오려는 테세우스를 강제로 연행한 일반인을 마지막으로 아지트엔 리디안과 크라이그만 남았다.
다행히 크라이그는 출입구로 향하지 않았다. 정말 짱박힐 생각인지, 아지트 내 커다란 창문 옆에 꾸며 놓은 휴식 공간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리디안은 벨벳 쇼파에 엉덩이를 붙이는 크라이그의 모습에 비로소 안도했다.
크라이그는 그런 리디안을 빤히 바라봤다.
크라이그와 눈이 마주치자 리디안은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지쳤다는 핑계를 대고 이대로 아지트를 나가도 되겠지만, 검닉이 된 크라이그를 내버려 두는 건 몹시 양심에 찔렸다. 아직 파티 중이기도 했고 말이다.
또 제집처럼 편히 앉는 걸 보니 바깥에 나갈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그렇다고 위험에 노출되지도 않은 이곳에서 가만히 감시하는 것처럼 옆에 붙어 있는 것도 퍽 우스운 꼴이었다.
“왜 거기 서있어요. 밖에 나가고 싶어요? 그럼 같이 나갈까요?”
슬쩍 일어나려는 크라이그의 모습에 리디안은 기겁하며 달려왔다.
“아니요!”
단호하게 부정하며 리디안은 크라이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지만 넓은 아지트 구석에서 조그마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자니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리디안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슬쩍 물었다.
“그… 검닉 시간 얼마나 남으셨어요?”
“글쎄요. 수치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면 앞으로 40분?”
“네? 원래 그렇게 오래 가요?”
“강제 피케이 때마다 누적되는 시스템이라 시간이 점점 늘어나거든요.”
“아……. 생각보다 사람 많이 죽여 보셨구나.”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리디안의 모습에 크라이그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피케이니까 ‘죽였다’는 말이 맞는 표현이기는 한데, 굳이 사람이라는 단어로 리디안이 저리 말하니 뭔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다.
“그래도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에요. 그 아저씨 일도 그렇고. 혹시라도 크게 싸움 날까 봐…….”
요정의 미로 맵에 있는 내내 가슴을 졸였던 리디안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며 등받이에 편히 머리를 기댔다.
“많이 힘들어 보이네요.”
너무 지친 티를 냈나? 쓰게 웃은 리디안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을 토로했다.
“사실 저 엄청 후회돼요. 괜히 도와주러 갔나 봐요. 다른 길드원분들까지 기분만 나빠지고, 정작 본인한테는 사과도 못 받고…….”
리디안의 침울한 모습에 크라이그는 흠, 하고 고민했다. 전투 길드에 들어온 이상, 타 길드에 무의식적으로 호의를 베푸는 것도 사실 깊게 고민해 봐야 할 일이긴 했다. 그러나 타인이 선택을 강요할 사항은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 깨닫고 판단해야 할 문제지.
크라이그는 리디안의 어깨가 무거워질 사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우리가 그런 병ㅅ… 아니, 그런 놈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라서요. 원래 길드끼리 전쟁하다 보면 사소한 거 하나로도 성격이 바뀌거든요. 따거도 특이 케이스긴 한데, 게임 하다 보면 걔보다 더한 빌런이 더 많아요. 오늘 같은 일도 전 솔직히 별로 놀랍지도 않아요.”
크라이그는 오늘 일을 전달받자마자 모두가 건수 생겼다며 환호했다는 것도 덧붙였다. 그에 시무룩해졌던 리디안의 얼굴이 차츰 풀어졌다.
리디안은 다소 신기한 눈으로 크라이그를 바라봤다. 저리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지금 하는 말 자체는 위로가 분명했다. 그래서 리디안은 헤헤 웃었다.
“크라이그 님, 은근히 다정하시네요.”
방글거리는 리디안의 얼굴에 크라이그는 잠시 당황했다. 순간 뭘 들었나 싶기도 했다. 반대로 말하면 전혀 그렇게 안 보였다는 소리였다. 물론 본인도 본인 성격을 알기에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리디안이 자신을 칭찬하니 뭔가 느낌이 새로웠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그걸 깨닫는 순간, 크라이그는 저도 모르게 낯이 뜨거워졌다. 크라이그는 낮게 탄성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동안 다른 길드원들에게 물질적으로 신경 써준 적은 있어도, 언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신경 써준 적은 없었다. 하물며 기존 여자 길드원인 이노센트나 행복, 자토에게도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참 신기하고 낯선 일이긴 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자연스레 생긴 호감을 굳이 밀어내거나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크라이그는 슬쩍 리디안을 쳐다봤다.
장차 힐러 유망주, 또래, 착한 사람.
사실 이것만 보더라도 리디안과 더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었다.
결국, 크라이그의 머릿속에서 리디안 파티의 메인 딜러인 테세우스의 실업이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