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0
10
하늘이다.
그렇게 믿을 뻔했다. 유미경이 감탄을 삼켰다. 인위적인 직사각형 모양과 하늘 바로 옆에 보이는 몇 가지의 색감이 아니었다면. 진짜 하늘이라고 해도 믿었을 거다.
그 정도로 선명했고, 현실감이 넘쳐났다.
더 가까이. 가까이 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발이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또 고개는 두 눈에 벽화를 가득 담아 보겠다고 반쯤 젖혀진 채였다. 그러나 그걸 의식할 정신이 없었다.
‘하늘인데 꼭 물이 흐르는 것 같아.’
단순히 푸르고 맑다고 정의할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마치 연한 하늘색 수국 꽃잎을 흩뿌려놓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특이한 벽화네. 보통은 전체적인 완성도와 물감의 마름을 조절하기 위해 원을 그리듯 순서대로 손대기 마련인데.
강석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벽을 15등분으로 나눠, 하루에 한 칸씩 띄엄띄엄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꽉 채워진 네모가 7개인 걸로 봐서는 하루에 하나씩 완성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공기의 흐름마저 표현한 것 같은 뿌연 색은 어떤 배합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딱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게 단순히 하나를 배합한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물감을 발라서 자연스럽게 블랜딩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유미경이 추리하며 강석을 살폈다. 강석은 회색의 무언가로 벽을 칠하고 있었다. 윤광이 네모난 모양으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아 오늘 할 영역을 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 회색은 뭐지? 바니쉬?’
광택제 역할의 바니쉬에 회색이 있던가를 떠올리며 유미경이 걸음을 재촉했다. 호기심이 퐁퐁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다가갈수록 강가에 온 것 마냥 풀내가 섞인 물 내음이 맡아졌다. 진짜 강가에서 가져온 모래가 있어서라는 생각을 유미경은 하지 못했다. 그녀가 발견한 건 다른 거였다.
‘바뀌었다!’
걸음을 재촉하는 그 잠깐 사이 강석의 손에 들린 도구가 달라져 있었다. 이번엔 납작한 판데기였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것들을 밀어서 다듬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마치 주사랑 선생님처럼···아니, 근데 이 사람 조소 전공 아니었나?’
유미경이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발을 내디뎠다. 툭. 발치에 뭔가가 걸렸다. 색 모래 같은 것이 가득 찬 작은 통들이 엎어진 상자에서 데구루 굴러내려 왔다.
어렵지 않게 통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천연안료!’
세월이 지나도 변색과 부식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보존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다. 유미경의 눈이 반짝였다. 쉬운 재료가 아닌데···이걸 쓰고 있었구나.
탁 튀는 색감이 아닌데도 지나치게 선명하다 싶었더니. 천연안료를 가져다 본인만의 배합으로 만들어 쓰는 덕분에 그랬던 모양이었다.
시중에서 파는 아크릴 물감이 아니라 천연안료를 써서 작업하는 벽화라니. 낭만적이었다. 뭔가 16세기 하이 르네상스의 이탈리아를 방문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까 선배가 지금 그리고 있는 이 그림. 어디서 본 그림인데···’
이탈리아. 그 단어를 떠오르니까 이 그림이 뭔지 감이 잡힐 것 같았다. 수수께끼처럼 띄엄띄엄 그려진 그림을 보며 유미경은 기억을 헤엄쳤다. 어디서 봤더라.
바티칸.
바티칸이다. 유미경이 눈을 부릅떴다. 가톨릭의 총본산. 남유럽의 도시국가. 이탈리아 로마시에 둘러싸인 내륙국. 교황을 국가원수로 두는 나라의 유구하고 가장 인상적인 유물.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천장화에서 저 그림을 본 기억이 있었다.
‘예술의 구도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린 천장화···’
중앙 천장화. 네 번째 부분에 위치한, 시스티나 천장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
그래···! 아담의 창조였다.
명쾌하게 얻어진 결론과 함께 비어져 있는 공간에, 두 손을 뻗어 맞닿으려 하는 신과 아담의 모습이 환상처럼 그려졌다.
유미경은 그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름이 온몸을 덮쳐왔다.
······대박이다!
거대한 벽은 크기만큼 거대한 감동을 터트렸다. 아직 미완성작임에도.
궁금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림을 완성할 건지, 서양화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강석과 친해지고 싶었다. 유미경이 입을 꼼지락거리다 강석의 등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려는 찰나.
“뭐하니, 미경아.”
귓가로 가지런한 목소리가 꽂혀 들어왔다. 귀에 닿는 입김에 유미경이 몸서리를 치며 게처럼 옆으로 물러섰다.
볼에 탈색한 머리카락이 스쳤다. 유미경은 직감적으로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서, 선생님···”
유미경에게 말을 건 것은 주사랑이었다.
주사랑은 몹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유미경에게 물었다.
“8층엔 무슨 일로?”
너가 여기까지 올 일이 뭐가 있냐고 물어보는 눈빛이 한없이 검었다. 유미경이 자기도 모르게 다시 뒤를 돌았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강지원은 박종현에게 붙잡혀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잘, 잘못. 엘리베이터가 잘못 내려서···하, 하하···가려고요. 가야죠······하하···”
유미경이 그 말을 끝으로 옆으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시선은 벽화와 강석에게서 떨어트리지 못하면서였다. 누가 보면 비련의 여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주사랑은 멀어져가는 유미경을 바라보다가, 유미경의 머리카락까지 안 보이게 되어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텄네.
유미경과 강지원은 절대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이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겠어.’
즉, 이렇게 조용히 강석의 그림을 구경하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란 소리였다.
주사랑이 아쉬움을 담아 강석을 바라봤다. 방금 전, 소란이 있었는데 강석은 계속 그림에만 매진하는 중이었다. 프레스코라는 게 한눈팔 틈이 있는 작업도 아니긴 했지만. 집중력이 어마무시했다.
멋있기도 하지.
세모꼴로 좁혀진 미간과 고집스레 다물린 입이 여태까지 보아왔던 강석과는 많이도 달랐다. 마치 예민하고 고집불통의 예술가처럼 보인달까.
그렇게 생각하던 주사랑이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하긴, 미술가 중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사랑이 어깨를 으쓱이곤 천천히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 * * *
강석은 조용히 트레싱지와 먹지를 겹쳐 들었다. 일중독에 가까웠던 전생의 집중력이 접신이라도 한 것처럼 강석을 이끌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오직 도화지처럼 하얀 세상에 이 벽과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석은 트레싱지와 먹지를 회반죽 위에 살짝 얹은 뒤. 이미 그려놓은 스케치를 따라 연필을 살살 눌러가며 덧그렸다.
아무렇게나 그렸다간 커다란 벽인 만큼 비율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필수였다. 시간 단축을 위해서도 이게 좋았다. 빔프로젝트보다는 구시대적인 작업이지만, 강석은 익숙하게 몸을 놀렸다.
“···아. 왜······필···아담······니?”
트레싱지와 한몸이 되다시피 해서 움직이던 강석은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누구지. 강석이 연필선을 한 번 더 움직였다. 어느새 트레싱지로 스케치를 뜨는 작업도 끝이 나고 있었다.
“석아? 왜 하필 아담의 창조를 그리냐니까?”
여자 목소리 같았다. 뭐라고? 강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 안 물었나. 모르겠다. 말 시키지마. 강석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손을 움직였다.
지금은 내 작업시간이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 팔을 거칠게 휘두르는데 어느새 하얀 세상은 밤처럼 거뭇하게 변해있었다.
검은 밤. 남색이 짙게 내려앉은 시스티나 예배당. 모두가 사라진 시각.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고집을 못 이겨 그를 데리고 작업을 하던 그림 앞으로 걸어가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촛불에 의지한 채. 어둠 속에서 그림을 한참이나 밝혀본 그는 나에게 물었다.
【 그대는 인간을 이렇게 보는가? 】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전 인간이 처음 창조된 당시를 그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결백하고 죄악이 없이 생명의 선물에 감사해하던······”
이렇게 대답했었던 것 같은데. 맞나? 고민하는 그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미켈란젤로가 했던 말이구나. 영화에 나왔던 아담의 창조를 통해 미켈란젤로가 인간을 예찬하는 장면. 맞지?”
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옆을 돌아보니 시스티나 예배당과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사라지고, 주사랑 선생님만이 옆에 서 있었다.
맙소사.
강석의 귀가 붉어졌다. 너무 집중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전생의 기억에 심취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사를 입 밖으로 따라 해버리다니.
강석이 부끄러움에 입을 비틀리듯 열었다.
“혹시 방금 저한테 뭐라 하셨어요?”
“응?”
“잘 못 들어서요.”
주사랑 선생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주사랑 선생님이 실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여셨다.
“많고 많은 르네상스 그림 중에서 왜 하필 아담의 창조를 그리냐고 물었지. 넌 아주 좋은 대답을 해줬고.”
주사랑이 웃으면서 강석의 어깨를 툭툭 친 뒤.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다른 층으로 갈 모양이었다. 그걸 멍하니 보고 있자니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가던 주사랑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강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내용은 꼭 실어줄게.”
“예?”
실어줘? 어디다? 강석이 의문을 품고 주사랑을 바라봤다.
“그럼 또 올게! 작업 열심히 해···!”
그러나 주사랑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덕분에 강석은 주사랑이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 내내 붕붕 흔드는 손을 의문에 찬 눈으로 바라만 봐야 했다.
* * * *
“와. 와. 말도 안 돼.”
“저게 강석이 그린 거라고?”
주사랑의 예감대로 유미경과 강지원이 다녀간 뒤. 8층은 청화예고 벽화 동아리팀의 놀이터나 다름없게 전락했다.
– ‘진짜 아담의 창조를 그리고 있었다니까. 그 커다란 벽을 꽉 채워서···! 와. 난 진짜 고등학생 그림 보고 소름이 돋은 적은 처음이야. 아니 어떻게 그 실력으로 꼴등이지? 2학년들은 다 괴물인가?’
입이 가벼울지언정 거짓말은 안 하는 유미경을 따라 아이들이 떼거리로 8층에 몰려온 다음날 부터였다.
강석은 돗자리를 깔다시피 하고 감상하는 아이들의 인기척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했던 강석만의 파라다이스는 칠일천하로 막을 내려버렸다.
이제는 청화예고 삼십 명이 돌아가면서 구경을 오는 탓에 고요의 고자도 찾아볼 수 없게 돼버린 8층에서 강석은 붓을 놀렸다.
강석의 붓은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신이 손을 내밀어 아담에게 지성을 부여하는 찰나를 표현한 그림, 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강석은 작은 붓 하나로 신이라도 된 것마냥 벽화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작업 중에 누군가 바라보는 게 거슬릴 만도 하건만. 전생에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4년간 가톨릭 신자와 추기경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려봤던 경험 덕분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작업도 막바지에 다다른 뒤였다. 마지막 한 칸을 채우는 강석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이들이 평소보다 많이 몰린 이유였다. 이 거대한 벽화가 완성되는 것을 보기 위해.
“진짜 저 큰걸 16일 만에 완성을 해버리시네.”
“오늘 저거 무조건 끝내겠지?”
“당연하지. 하루에 한 칸은 무조건 완성하는 거 못 봤냐.”
대부분이 이미 자신의 벽화 작업을 끝내고 온 뒤라, 아이들의 말에서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기실. 아이들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완성한 스물아홉 점의 벽화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고요한 눈으로 강석의 그림이 완성되길 바라보는 주사랑 선생님과 크래피티 선생님들이 아니더라도 알 것 같았다.
저 작품의 완성이 곧 고교벽화전의 우승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아담의 창조를 모작한 이 벽화는 앞으로 르네상스 복합 쇼핑몰의 상징과도 같아질 거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발걸음을 돌리겠지.
십년도 훌쩍 넘은 과거. 벽화마을 이화가 유명해지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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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초.
눈처럼 새하얀 하늘 아래. 석이 가구점 뒷마당에 심은 동백나무가 꽃을 만개했다.
강석의 엄마. 백명희는 멍한 얼굴로 동백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황조롱이가 익숙한 폼으로 두툼한 나뭇가지에 안착했다.
그와 동시에 둘째 강채영의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엄마! 엄마! 이것 봐!”
한 손에는 쇠젓가락,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강채영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우리 오빠가 기사에 실렸어!”
11. 백명희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