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7
17
* * * *
어두운 골목길. 먼지가 달라붙은 낡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자전거를 끌었다.
덜컥덜컥, 다듬어지지 않은 길 위로 돌멩이와 동백나무 특유의 두꺼운 잎사귀 몇 개가 자전거 바퀴 아래 즈려밟혔다.
[석이 가구점]의 뒷문으로 통하는 샛길이었다.강석은 샛길을 빠져나와 자전거 핸들을 틀었다. 익숙한 정경이 펼쳐졌다. 석이 가구점의 뒷마당이었다. 강석은 대충 주차된 트럭과 살짝 떨어진 곳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 발을 휘둘렀다.
세워진 자전거에 킥스탠드가 내려오며 철컹, 소리가 났다.
자전거 바퀴를 자물쇠로 대충 꼬아 채운 강석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잠시 후 가로등의 빛을 받지 않아 어두운 뒷마당에 유일한 조명이나 다름없는 뒷문 유리창에 강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와 동시에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왔어요.”
딸랑, 뒷문과 연결된 풍경종이 흔들렸다. 가구점 앞에 있을 부모님을 찾아 눈을 돌리는데 가구점 안쪽, 닫힌 방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말소리는 두 명의 것이 아니었다. 소리는 작지만 왁자지껄한 게 여실히 티가 나는 빠르기였다.
‘누가 놀러 왔나?’
작업실 옆. 가구점 제일 안쪽 방은 손님이 없는 동안 아버지 강현도와 어머니 백명희가 수다를 떨고 휴식하는 방이었다.
강석의 발걸음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왔으면 웃어른에게 인사하는 것이라 배워온 강석이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익숙한 백명희의 얼굴이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머···! 석이 왔니?”
백명희가 인사에 화답하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화색이 돈 얼굴을 따라 강석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곳에는 아버지 강현도와 강채영,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얼굴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
“그래.”
강현도에게도 마저 인사하고 강채영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잘 기억나지 않는 얼굴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는데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석, 석이오빠 오랜만이에요.”
“윤유란. 기억나지?”
뒤에 따라오는 건 강채영의 짧은 소개였다.
윤유란?
아아. 강채영과 제일 친한 친구라고, 이름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것도 같다. 놀러 왔나보군. 강석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편하게 놀다 가.”
“네···? 네! 그럼요!”
윤유란의 표정은 친한 친구 오빠를 맞이했을 때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럽게 반짝였지만. 그건 강석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밥은?”
“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그래? 그래도 저녁 시간인데···아 참, 오늘부터 그리는 거였지? 재미는 있었니?”
인체소묘에 대한 물음이었다. 따라붙는 어머니의 시선에 강석이 눈을 굴렸다. 재미있었던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강석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재밌었어요.”
재밌었다. 꽤나.
강석의 입가가 미미하게 호선을 그리자 지켜보던 강현도와 백명희의 입가도 부드럽게 휘었다. 강석이 재미있었으면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다행이네. 근데 가구점엔 왜? 놓고 간 거 있니?”
아. 강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평소라면 집으로 걸음했을 강석이 발걸음을 돌려 가구점까지 온 건 이유가 있어서였다.
“작업실 창고에서 좀 찾아볼 게 있어서요.”
작업실 창고. 정확하게는 창고 안에 있는 잡동사니에 관심이 있었다.
이곳 석이 가구점은 본래, 젊은 날의 강현도가 학원 강사에 목공일 현장일 마다치 않고 뛰어다녀 모은 돈으로 마련된 작업실이었다.
외진 곳에 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도 임대료가 싼 이유는 아주 오래전에 계약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하다 보니 이곳에는 젊은 시절 강현도의 흔적들이 케케묵어 쌓여있었다.
그 흔적들은 가구점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작업실 안쪽에 있는 창고였다.
얼핏 보기엔 잡다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창고. 그곳에는 호기로웠던 옛날 재료 욕심이 많았던 강현도가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를 참아가며 사놓은 것들이 쌓여있었다.
때문에. 가지고 싶은 재료가 생겼다고 마구잡이로 사들일 수 없는 강석에게 가구점 창고는 보물 상자와 같았다.
“아아. 같이 찾아줄까?”
“아뇨. 괜찮아요. 근데 아버지. 창고에 있는 재료 중에 사용하면 안 되는 거 있어요?”
“창고?”
“예. 고두한 선생님 개인전에 출품할 작품 때문에 필요한 재료 좀 찾아보려고 하는데···혹시 손대면 안되는 게 있나 해서요.”
“음? 네가 손대면 안되는 게 있을 리가. 필요하면 마음껏 가져다 쓰거라.”
어차피 강현도에게 창고는 버리기 아깝고, 쓰기엔 용도가 없는 것들을 쑤셔 넣은 장소밖에 되지 않았다. 손을 안 댄 세월조차 가늠이 안 되는 것들 천지였으니 뭐라도 강석이 써준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알았어요.”
“어머머. 고두한 선생님 개인전이면···그 소묘전 말하는 거지?”
“예. 이번 소묘전 주제가······”
그때. 강석이 자신의 부모님과 대화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윤유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만화책을 읽고 있는 강채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닥거렸다.
‘들었어? 출품할 작품이래···! 너희 오빠 무슨 전시회 같은 거에 나가는 거야?’
‘잘···모르겠는데···그런가?’
강채영이 대충 응대하며 종이를 넘겼다. 내내 다음권이 안 나오던 만화책이 오랜만에 신간을 발간한 참이라 강채영의 정신은 완전히 만화책에 넘어가 있었다.
‘내가 나중에 한번 물어볼게.’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라. 강채영이 과자를 한 웅큼 짚는데 윤유란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응! 혹시 그러면 우리도 가야 하니까 미리 알려줘.’
‘우리?’
‘그래! 1호팬, 2호팬이 안가면 누가 가니!’
응? 강채영이 당황한 눈으로 윤유란을 바라봤다. 언제부터 나까지 팬이 된 건데···?
“그럼 갈게요.”
“그래.”
“그러렴.”
윤유란과 강채영이 투닥거리는 동안 대화가 끝이 난 건지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아···!”
윤유란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는 사이.
귤을 까먹던 강현도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었다. 강현도가 백명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소묘 작품에 무슨 재료가 필요한가?”
“네? 어? 그러게요?”
강현도와 백명희가 서로 눈을 마주 봤다.
‘웬 재료?’
‘무슨 재료?’
그렇게 안쪽 방에서 아쉬움과 의문이 교차되어갈 때. 강석은 바로 옆방에 위치한 작업실로 쏙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허락받은 이상, 거칠 것이 없다는 태도였다.
강석의 발이 작업실 구석에 있는 창고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다시 텅 빈 가구점에 울렸다. 동시에 케케묵은 냄새가 문틈을 비집고 퍼져 나왔다.
먼지 냄새와 건조한 공기. 어머니가 갖다 놓은 커피가루와 피톤치드 향이 창고에서 뒤섞여 오묘한 호수 냄새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강석의 손이 창고를 더듬었다. 문 바로 옆에 배치된 손전등을 지나쳐 그가 손을 댄 건 문 안쪽에 있는 스위치였다.
딸깍. 작은 소리와 함께 천장에 있는 작은 전구가 빛을 뿌렸다. 안전등이 망가졌는지 깜빡거리는데도 눈이 아프지 않은 게 수명이 거의 다해가는 것 같아 보였다.
그게 아니어도 물건들이 이리저리 쌓여있다 보니 창고 천장에 달린 작은 전구로는 이곳을 다 비춰볼 수가 없었다. 강석이 핸드폰 플래시로 창고를 비추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쌓여있는 상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있는 쪽을 제외하고 삼면을 앵글 진열대로 꽉 채웠는데도 상자들이 바닥에도 삐죽이 튀어나와있었다. 그게 얼마나 많은 상자가 이곳에 들어있는지 가늠하게 했다.
상자 틈을 비추는 플래시가 디자인 마카와 유화물감들을 밝혔다. 조소를 하던 아버지에게는 필요없는 잡다한 재료가 이곳에 가득했다.
정작 조소에 필요한 물건이나, 소묘에 쓰이는 연필이나 지우개는 중학교 때부터 자신이 야금야금 다 써린 탓에 남아있는 게 없지만. 이곳을 굳이 비유하자면 강석에게는 화방과 같았다.
‘어디 있을까나.’
강석이 바닥에 쌓인 상자 더미를 넘으며 구석으로 한 발짝 더 전진했다. 앵글 진열대를 천천히 훑는 강석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오늘 강석이 창고에서 찾으려고 하는 건, 색연필이었다. 그것도 왁스 기반의 유성 색연필 프리즈마가 필요했다.
프리즈마. 심은 무르지만, 왁스 기반이라 그런지 뛰어난 발색력과 밀도를 자랑하는 브랜드였다.
프리즈마 색연필로 채색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강석이 그려야 하는 건 소묘였으니까.
‘소묘전에 출품하는 작품인데 소묘여야지.’
하지만 그 연필의 색까지 강제하진 않았다. 강석은 그저 소묘를 하는 연필의 색을 색달리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번 작품은 특히 그게 필요했다.
강석의 기억력은 아까 보았던 풍경을 시야 위에 덧그렸다.
붉은색과 남색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하늘의 정경.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는 지금 찾고 있는 것이 적당했다. 강석의 손과 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당장 내일이 주말로 고두한 작업실에 처음 가는 날이었으니 오늘 찾아놔야만 했다.
‘어디다 놓으셨지?’
조소 자체가 스케치가 필요한 작업인 만큼 색연필은 눈이 닿는 곳에 두셨을 것 같은데···그렇게 생각하며 강석이 등을 돌리는 순간. 상자가 밀리며 침묵 속에서 깡통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
깡통. 프리지마 프리미어 색연필 케이스는 깡통 재질이었다. 강석의 몸이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찾았다.”
깡통케이스에 담긴 프리즈마 색연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껑을 열자 플라스틱 진열대는 버렸는지 색연필은 같은 계열 색끼리 두꺼운 고무줄에 묶인 채였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
픽사티브며 색연필이며 전생과 비교했을 때 쉽고 간편한 도구가 미술 학도들 손에 쥐어져 있었다. 기술이 삶을 편하게 하리라. 그건 예술의 영역에서도 통하는 말이었나 보다.
강석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고 구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창고 구석구석에는 곰팡이가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끼워놓은 종이나 신문지가 가득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강석이 손을 품으로 다시 가져오자 빛바랜 종이 몇 장이 손가락 틈에 끼어 있었다.
‘어디 보자.’
누렇게 변색 된 종이 위로 강석이 색연필을 쭉 그었다. 빛바랜 종이 위로 선명한 색깔이 툭 튀어 올라왔다. 붉은색. 마치 바닥에 붉은 선 하나를 그은 것처럼 선명한 발색이었다.
먼지가 쌓인 종이도 뚫고 올라오는 발색이라니. 마음에 들었다. 그림이나 그려볼까. 강석이 선을 툭툭 그었다.
그을 때마다 석류알이 터지듯 종이 속 선의 형태가 뚜렷한 그림으로 바뀌어나갔다.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던 아버지의 등이었다. 강석이 그때를 떠올리며 본격적으로 손을 놀리려는 그 순간.
“석아!”
“석이 오빠!”
다 닫히지 않은 창고 문틈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쩐지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나?
강석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보다 창고 문이 열리는 게 빨랐다. 와장창 들어오는 빛 속에서 시야를 꽉 채운 건, 핸드폰이었다.
“오빠! 이것 봐! 지금 인별그램으로 dm이 하나 왔는데···! 이건 오빠가 봐야 해!”
인별? DM?
강석이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안녕하세요. 계정에 올라온 새가. 조각된 요람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혹시 새 조각상은. 직접 조각한 거라고 하셨는데. 만나뵐 수. 있을까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강석의 눈이 점점 커졌다.
계정에 올라온 새 조각상? 새라면, 떠오르는게 하나 있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아버지 옆에서 만들던 고부조를 박아넣은 요람. 자신이 알기로는 그게 가구점에 있는 유일한 새 조각상이었다.
설마?
강석이 왼쪽 나가기를 눌러 DM을 받은 계정으로 들어갔다. 석이가구점이라는 계정이었다.
가구점 홍보용으로 파놓은 계정인 것으로 보였다. 계정의 제일 상단에는 작업실에서 최근 찍은 걸로 추정되는 사진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강석 본인이 수선한 요람이었다. 그때 작업한 걸 석이가구점 계정에 올려놓았던 모양이었다.
“이걸 언제···”
강석의 질문은 끝을 맺지 못했다.
요람을 올려놓은 사진에 붙어있는 좋아요 갯수 때문이었다.
좋아요 493개.
인별그램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꽤 높은 숫자였다. 유명하지도 않은 계정임을 감안하면, 사진 하나에 붙어있는 숫자치고는 충분히 높았다.
그 옛날에 비하면 작은 반딧불 같은 관심이었지만, 강석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이 이번 생에는 처음이어서였다.
비록 좋아요였지만. 뜻깊었다. 강석이 굳어서 좋아요 갯수만 바라보는데 강채영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우웅, 진동을 토해냈다.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DM을 보내는 사람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음? 강석의 엄지가 이번에는 상대방 프로필을 향해 움직였다. 꾹 누르자 계정으로 연동되었다.
처음으로 강석의 눈에 보인 것은 글씨였다.
한국대학교 언어학과 이민혁 교수.
단테 알리기에리가 집필한 을 40년에 걸쳐 100번을 읽고 번역한 것으로 요즘 TV에서 떠오르는 교수였다.
TV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 연락을 해왔다는 게 신기한지 강채영이 입꼬리가 활짝 휘었다.
“이민혁 교수님이 오빠한테 의뢰를 하고 싶나 봐!”
18. 새벽에 내렸던 눈처럼 새하얀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