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Michelangelo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97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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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전통적인 형식의 사슬을 모두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 조르조 바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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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입추(立秋).
가을에 접어들었건만 태양은 아직도 여름에 머물러 있는 낮이었다.
며칠째 비가 내리지 않은 탓에 공기 역시 따뜻했다. 작열하는 더위 아래. 서울을 벗어난 근교 구석. 한옥집 마당에 천막 밑.
“야···이거···이야···!”
찌는 더위에도 진회색 낮은 모자에 검은 티를 입은 사내가 감탄을 터트려댔다. 고두한이었다.
“·········이걸 이렇게···이거···허!”
제대로 된 단어가 완성되지 못하고 고두한의 입에서 흘러내렸다. 프흐흐. 허어. 고두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웃음이었다. 정제되지 못한 감탄과 웃음이 고집스러운 입매를 뚫고 흘러내렸다.
– ‘그러니까 한국적인 작품이 좋을 거라는 말씀이시죠?’
– ‘기왕이면.’
– ‘참고할게요. 감사합니다.’
고두한이 왼손으로 입과 턱을 감싸쥐었다. 오른손은 90도 각도를 유지하는 왼손의 팔꿈치를 손등으로 받친 채였다.
“참고. 참고하라고 한 게 이 정도란 말이지.”
그가 웃을 때마다 모자 아래 그늘에 감춰진 눈꼬리 끝이 슬쩍슬쩍 휘었다. 잘 웃지 않았는지 눈주름 하나 없는 눈이 움찔움찔 떨렸다.
“이런 멋진 놈을 봤나.”
고두한이 즐겁게 중얼거리며 앞을 응시했다. 그 와중에도 모자 아래에 가려진 눈동자는 그림자 속에서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여대고 있었다. 눈동자에 분홍색이 살짝살짝 깃들였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모자 밑으로 시원한 기운이 불어왔다.
바람을 피해 잠깐 눈을 감았다 고두한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고두한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보았을 때의 그 놀라운 광경이 다시 두 눈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얀색. 그리고 다시 연분홍. 자홍색.
진달래를 으깨놓은 것 같은 빛이 밀빛의 대리석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나뭇잎이 흔들리듯 연꽃에 붙어있는 아주 작은 판조각 유리들이 나무 그림자를 닮은 분홍 햇볕을 작은 세계에 퍼트리고 있었다.
연꽃잎 위를 달리며 뛰노는 어린 동자들. 진주 같이 하얀 속내를 드러내고 연꽃잎 위를 구르다 멈춘 복숭아가 분홍색을 입고, 동자들의 손이나 머리 위에 들린 꽃봉오리에 꽃잎이 맺힌다.
거대한 연꽃과 그것을 받들고 있는 복숭아 나무밑동, 연꽃잎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복숭아 나무들. 하나하나 섬세하고 세공된 복숭아꽃. 한복을 입은 어린 동자들. 그리고 복숭아. 연꽃 꽃봉오리. 심지어는 분수대에 양각된 문양 한 조각에서도 동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느낄 수 있었다.
피지 못한 연꽃 꽃봉오리와 거대한 연꽃잎 구름.
백색과 어린 동자.
복숭아꽃, 그리고 복숭아와 복숭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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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이 붙인 제목 그대로 무릉도원이었다. 여름방학 기간. 학생들 수시를 앞둔 바쁜 일정 속에서 월차 내고 보러올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니. 이걸 월차 내고 오는 걸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이야···진짜···”
고두한이 입꼬리를 씰룩였다.
스테인글라스와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유리연꽃.
정원 장식으로 많이 이용되는 조각 분수대.
대리석을 이용한 입체적이고 섬세한 조각.
그리고 빛을 이용한 화려한 연출.
– ‘차광손 그 영감쟁이는 동양화 출신이야.’
그 어느 것 하나 동양화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무엇보다도 동양화적이다.
그의 발이 조금씩 앞으로 걸어갔다. 분수대 근처로 가는 발걸음은 아니었다. 분수대를 한바퀴 돌기 위한 걸음이었다.
‘의도한 걸까?’
고두한이 즐거운 고민을 하며 작품 을 쳐다봤다.
분수대로 한폭의 그림이라고 가정했을 때.
저 작은 이상향은 지극히 동양화적인 기법을 사용해 만든 분수대였다. 어느 면에서 그러하냐면 바로 시점 면에서 그러했다.
다시점.
서양 회화에서는 다시점 하면 19세기의 폴 세잔과 20세기의 피카소를 떠올릴 정도로 드물지 않고 낯설고 독특한 방식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동양화에서는 18세기 김홍도조차도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다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역시 그러했다.
우선 앞.
백련과 홍련은 연꽃의 색빠짐, 그라데이션과 닫힌 꽃봉오리를 시작으로 만개하는 것까지···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색채와 형태를 감상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앞에서 본 시점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안에 구름 무리를 연상케하는 연꽃잎들은 위에서 바라보았을 때에서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게끔 연꽃잎 아래에 감춰진 연꽃잎과 또 그 삼중 사중으로 계단처럼 연꽃잎이 모습을 드러내는 절경은···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이걸 조각할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기이하고 조화로우며 아름답다.
내가 동자들처럼 작아져서 이 분수대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석이 놈에게 허락을 받아 분수대 밑쪽으로 카메라를 찍어서 돌려봤을 땐 기함을 터트릴 뻔했지.’
강석은 이따금 조각이란 다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조각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강석은 이 작품으로 증명해냈다.
‘연꽃 잎 아래까지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줄기에서 돋아난 잎맥까지. 강석은 깻잎 양면에 느낌이 다르듯 연꽃 양면에 조금 다른 촉감까지 완벽하게 조각으로 구현해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섬세함인가.
겉으로는 가장 느긋해보이고 개미처럼 묵묵한 녀석인데 그 안에는 거미줄보다 얇은 줄 위에 서서 살아가는 노인네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정이 날카롭고 완벽하다.
또 아래서 보았을 때 완벽한 복숭아 나무는 어떠하고, 대각선 위에서 바라보았을 때 완벽한 연꽃 봉오리 속 테라리움의 세계는 또 어떠한가.
완전히 편견을 깨버린 작품이었다.
전통적으로 서양화 판에서 사용하던 것도, 동양화 판에서 사용하던 것도 죄다 섞어 새로 만들어댔다. 금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 둥근 작품이기에 더욱 그랬다.
서양기법으로 표현된 동양화 한폭.
그렇게 해석하면 되려나.
이러니 안 웃을 수가 있나. 이런 멋진 작품을 보고 안 웃으면 되나. 보기에도 완벽하고, 담긴 뜻도 좋으며 해석 역시 아름답게 잘 되었다. 하여튼 심미안이 타고난 놈이야. 이런 기특하고 멋지고 잘생기고 혼자 다 잘하는 놈.
고두한이 웃음을 흘렸다. 나른한 고양이 같은 얼굴이 만들어졌다. 고두한이 평소에 짓지 않는 매우 귀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연꽃 위에 동자 하나밖에 없었다.
고두한은 생각했다.
‘이걸 보고 대상을 안 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완벽하다.
서양회화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동양회화 기준으로 봤을 때도 완벽하다. 구상부문에서 완벽한 점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이건 심지어 회화가 아니라 조각이다.
가장 완벽한 회화는 조각이 된다고 하던가.
강석이 옳았다.
이건 가장 완벽한 회화이며 동시에 그러므로 조각이다.
“브라보!”
대상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고두한이 두 손을 활짝 들어 박수를 쳤다. 짝짝짝. 연필 쥐던 악력 어디 간 게 아니라 그런지 커다란 박수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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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고두한이 박수를 치는 걸 지켜보던 양선구가 허탈한 탄성을 흘렸다.
“내 학교 다니는 내내 고선생이 저렇게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거늘. 고씨 아니, 고선생 저 작자가 저렇게 헤프게 웃는 꼴을 다 보는 구남.”
양선구가 바람빠진 웃음을 흘릴 때. 브라보 소리가 연달아 마당을 울렸다. 얼씨구. 좋단다. 양선구가 허파에 바람이 찬듯 웃음으로 박수소리에 화답했다.
까칠하고 고집불통에 쇠공을 입에 문 무뚝뚝이는 어디가고, 기분 좋아보이는 소리꾼 하나 집안에 왔구나.
양선구의 중얼거림에 강석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사장이 공방 수업을 하러 가서 다행이야. 고선생에 조사장까지 있었으면 여기서 굿판이라도 벌이는줄 알았을 거다.”
“하하.”
강석이 작은 웃음 소리를 흘렸다. 양선구가 복숭아를 한웅큼 먹으며 옆을 돌아봤다. 분명 웃음소리를 들었거늘 표정은 돌덩이처럼 묵직했다.
‘신묘한 얼굴이로고.’
굳어진 얼굴에 강한 인상인데도 어찌 저리 바람처럼 부드럽게 생겼어. 양선구가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아차차. 이게 아니었지. 양선구가 속에 담아둔 물음을 꺼냈다.
“그래서 미국엔 언제 간다고?”
“내일 모레 정도에 바로 가려고요.”
“으응, 그래. 미국···어디더라?”
“마이애미요.”
“그래. 마이애미.”
양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작품을 만들러 이탈리아로 날아오기 전, 강석은 미국 마이애미에 있었다.
그곳에서 강석은 를 그렸고 도 그렸다. 양선구 역시도 너튜브 채널을 자주 보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레 갤러리라고 했나.”
“예.”
“한국엔 씨엘로, 하늘이 있고 미국엔 마레, 바다가 있구나.”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가자마자 오픈인감?”
“그래야죠.”
그렇게 해야만 휴가철인 8월이 가기전에 마이애미 왕복권 당첨자가 된 사람들이 부담없이 갤러리에 들렀다가 갈 수가 있을 터였다.
“블룸 미술관은 이미 마이애미 갤러리에 가있는 건감, 그럼?”
“예. 첫팀은 저번주에 이미 출발했다고 하더라고요.”
“제품 최종 발주를 2일인가, 3일엔가 통과했다고 하지 않았남?”
강석으로서도 저번주에 바로 첫팀이 가고, 발주를 서둘러 나머지 팀도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살짝 놀랐었다.
블룸 미술관이 그렇게 총출동해서 달라붙을 줄은 몰랐기에. 강석이 뭐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옅은 웃음만 지었다.
“···허, 블룸에서 생각보다 석이 너하고 거래를 오래 이어가고 싶은 모양이구남.”
“그런 것 같아요.”
설여진 관장이 유리작약만 가지고 끙끙대고 있는 걸 봐서 그러겠지. 양선구가 하얀 수염을 쓸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도 대우를 못 받은 적이 없지만 이제는 슬슬 해외 주류 작가들이 받는 대우 비슷한 걸 받는 수준까지 간 모양이었다. 블룸에서도 이렇게 대우를 한다면, 다른 갤러리는 거의 메인작가급으로 대우를 해주려 들 터였다.
물론 석이 녀석이 그렇다고 시선 한 번 줄 리가 없었다.
해외 갤러리와 미술관, 그리고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들도 달라붙고 싶어하는 상황이었다.
강석이 혼자서 다 독차지하고 싶어하고, 이것저것 다 잘하는 팔방미인형 재주를 가진 게 아니었다면 이미 해외 갤러리와 줄을 대고도 남았다.
···벌써 그렇게 컸구나.
세월은 짧은데 무지막지한 성장을 이루는 게 뿌듯했다. 양선구가 기분 좋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마땅히 그래야지.”
양선구는 블룸 미술관하고도 교류가 꽤 있었기에 기왕 한국 갤러리 하나와 협업한다면 블룸 미술관하고 하는 게 좋기도 했다.
허튼 짓은 안하고 있는 모양이구만.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웃음을 지어보인 양선구가 강석을 바라보았다.
“작품 제출은 나랑 조사장, 그리고 고선생이 책임지고 해놓을테니 걱정말고 다녀오거라.”
“예. 감사합니다.”
조각은 서류제출할 때 사진을 첨부하고, 마감 날짜 하루 전에 방문 접수로 한날한시에 동시에 실물을 제출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걸 해놓고 가기에는 강석의 일정이 너무 밀려있어 부탁하고 가는 참이었다.
“그래도 발표일에는 돌아오고.”
“그 전에 끝나면 그 전에 돌아올게요.”
“그래.”
양선구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였다. 강석이 깜빡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분수대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이게 분수대다보니까 물을 채운 다음이 중요하거든요. 그걸 안 보여드렸네.”
분수대는 자고로 물이 있어야 완성 아니겠나.
198. 나는 장사꾼 같은 화가로 또는 조각가로 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