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1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10화
빛바랜 약속 (2)
짙은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앉은 밤.
낡고 허름한 보육원 4층 옥상에 두 소년과 소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으, 그 빌어먹을 대머리 자식. 때려도 눈 쪽을 때리냐?”
적갈색 머리칼을 지닌 소녀는 깡마른 소년의 피멍 든 눈가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평소엔 얼굴처럼 눈에 띄는 장소는 잘 때리지 않는 원장이었지만, 오늘은 열이 뻗칠 대로 뻗쳤는지 얼굴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그것도 자칫하면 실명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을.
“나쁜 새끼! 확 경찰에 신고해 버릴라!”
“…해봤자 소용없는 거 알잖아.”
소년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몇 번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었지만 서로 뒷돈이라도 오간 건지 건성으로 조사하다가 되돌아 가버리고는 했다.
피멍이 든 눈가를 보여준다고 해도 넘어져서 다쳤다, 정도로 넘어가 버리겠지.
“하여간 나이 처먹어서 애들 이름 가지고 놀리기나 하고!”
소녀는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씨익, 씨익 열을 내며 연신 원장에 대한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참았어야 했어.”
“참긴 뭘 참아! 오지니 넌 잘못한 거 없어!”
단호하게 외치는 소녀의 말에 소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도 누나가 나서준 덕분에 별로 안 다쳤어.”
“별로 안 다치긴! 눈탱이 밤탱이가 됐는데!”
“누나가 없었으면 더 맞았을 거야.”
소년은 소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누나.”
“흥! 고마우면 빨리 나으라구!”
소녀는 소년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운 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쏟아지듯 찬란한 별빛이 하늘이 내려준 은총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아름답게 빛나는 별들을 눈에 담은 채 허벅지를 베고 누운 소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보물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누나.”
“우응?”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년을 올려다보는 소녀.
소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보육원에서 나가게 되면 같이 살자.”
“어, 어? 뭐, 뭐라고?”
“둘이서 같이 살자고.”
소녀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머리카락 색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가, 같이 살자.”
“그때는 내가 누나를 지켜줄게.”
소년은 소녀의 붉어진 뺨을 매만지며 맹세하듯 말했다.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던 소녀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코웃음을 쳤다.
“헹! 네가 날 어떻게 지키냐?”
허리에 양손을 척 얹으며 가소롭다는 듯 웃는 소녀.
“원래 누나가 동생을 지켜주는 거야!”
“그래?”
“고럼! 으디서 건방지게 동생이 누나를 지켜준다는 말을 해?”
소년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누나가 날 지켜줄 수 있도록 도와줄게.”
“네가 도와주긴 뭘 도와준다는 거야?”
헛웃음을 흘리며 소년의 뺨을 잡아당기는 소녀.
‘도와준다’는 말을 넙죽 받아들이기에는 소년은 지나치게 말랐고, 야위어 있었다.
“요자식 이거 맨날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구.”
장난스럽게 소년의 뺨을 잡아당기던 소녀가 이내 몸을 돌렸다.
“슬슬 내려가자. 더 있으면 걸리겠다.”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짓말 아냐.”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탓일까.
소년의 마지막 중얼거림은 소녀에게 닿지 않았다.
* * *
협곡에 불어닥치는 쌀쌀한 바람에 텐트가 흔들렸다.
눈을 뜬 오진은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 침낭 속에서 빠져나왔다.
“어제 누나랑 옛날얘기를 해서 그런가.”
오래전 보육원 옥상에서 나눴던 약속이 꿈에서 나왔다.
아마 그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빛바랜 약속이.
오진은 어린 시절 기억을 되짚으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날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라.’
구체적인 계획이나 목표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을 뿐.
“지금 생각하면 거짓말 맞구만 뭐.”
오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텐트 밖으로 나갔다.
“일어나셨나요?”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이사벨라가 환하게 웃으며 오진에게 다가왔다.
“일찍 일어났네?”
“후훗.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잖아요?”
방긋 미소 지으며 오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이사벨라.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 입술이 벌레라는 거야?”
“어머, 집 안에 퍼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먹어 치우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잠깐 떨어져 있던 이사벨라가 능청스럽게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한 번 더 입술을 겹친 후 떨어진 오진은 모닥불 쪽으로 걸어가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누나는?”
“아직 자고 있어요.”
“내가 깨울게.”
“네, 그럼 전 아침 준비 마저 하고 있을게요.”
이제 막 아이가 생긴 신혼부부가 나눌 법한 대화.
마치 멜로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달달한 분위가 두 사람 사이에 퍼졌다.
물론, 여기서 깨우는 게 아이가 아닌 또 다른 연인이라는 점에서 멜로 드라마가 아니라 막장 아침 드라마로 바뀌게 됐지만.
“누나, 일어나.”
오진은 텐트 앞에 서서 하은을 불렀다.
몇 번을 더 불러봤지만 텐트 안에서는 새액새액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 하은은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래도.”
할 수 없이 오진은 텐트 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배꼽이 훤히 드러나는 흰 티셔츠에 돌핀 팬츠 차림으로 잠들어 있는 하은의 모습이 보였다.
배를 긁적이며 입에서 침까지 흘리며 잠든 하은.
“아줌마,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요.”
“우으응?”
부스스 눈을 뜨는 하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멍한 눈으로 오진을 바라보던 하은이 오징어처럼 그를 휘감은 채 침낭 속으로 끌어당겼다.
“헤헤헤. 오지나아.”
“아니 일어나라니까 뭐하는 짓이야.”
“5분만 더어~”
마치 죽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다란 팔다리로 오진을 휘감은 하은이 찰싹 몸을 밀착해왔다.
오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옆에 누웠다.
“아침 먹어야 하니까 빨리 일어나.”
“아침 대신 우리 오지니 먹지 뭐.”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하며 휘감은 팔다리에 힘을 더했다.
“하음.”
오진의 뺨을 깨문 하은이 우물우물 입을 움직였다.
이가 아닌 입술로 깨문 거기 때문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뺨 전체가 순식간에 침 범벅이 되어버렸다.
“…이 누나가 진짜.”
하은의 옆구리 살을 꼬집고 힘을 줘 비틀었다.
“으갸갸갸갹!”
번갯불이 튄 것처럼 벌떡 일어나 비명을 지르는 하은.
오진은 물티슈로 뺨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잠 좀 깼어?”
“이 씨… 좀 살살 깨워 인마.”
“빨리 안 깨우면 잡아 먹힐 것 같아서 말이지.”
부스스한 하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침낭 옆에 벗어둔 안대를 건넸다.
안대를 착용한 하은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이사벨라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침은 간단하게 계란후라이에 스팸으로 준비했어요.”
“이야, 한국인 다 됐네.”
하은이 재빠르게 자리에 앉아 숟갈을 들었다.
새하얀 쌀밥 위에 계란후라이를 잘라 올리고 스팸 한 조각과 함께 한 입.
절로 행복해지는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후으응. 좋다 좋아. 역시 아침은 이게 국룰이지.”
“처음엔 스팸을 구워 먹는다길래 깜짝 놀랐어요.”
“외국에선 잘 안 먹으니깐.”
“그래도 밥이랑 같이 먹어보니깐 맛있던데요?”
어느새 입맛까지 한국에게 맞춰진 건가.
이사벨라는 능숙한 젓가락질로 스팸을 잘라 밥과 함께 먹었다.
“그 꼬맹이가 만들어준 배낭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맨날 육포 같은 거나 먹었어야 할 거 아냐.”
동감이다.
머나먼 마경에 와서도 이렇게 지구에서처럼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건 전적으로 김시후가 만들어준 공간 확장 배낭 덕분이었다.
“다 먹었으면 슬슬 이동하자.”
식사를 마치고 텐트를 정리한 오진 일행은 뽀삐의 등 위에 올라탔다.
참고로 뽀삐의 아침 식사로는 근처에서 잡은 마수의 시체를 줬다.
“그르릉!”
든든하게 식사를 마쳤는지 기분 좋은 울음을 토해낸 뽀삐가 힘차게 발을 박찼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협곡을 돌아다녔을까.
“오지나, 저기 봐봐.”
뽀삐의 등 위에 올라탄 채 손가락을 가리키는 하은.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칙칙한 암석만이 있을 뿐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엥? 뭔 소리야? 저기 막 반딧불 같은 게 떠다니고 있잖아?”
“뭐?”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오진의 눈에 보이는 건 칙칙한 암석뿐이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잠깐만.”
하은이 뽀삐의 등을 박차고 점프했다.
암석 근처로 가서 손을 가리켰다.
“진짜 아무것도 안 보여?”
“어. 그냥 돌덩이밖에 안 보이는데.”
“…뭐지?”
하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암석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푸른 빛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의 요정처럼 떠다니는 푸른 빛무리는 하은이 손을 뻗자 화들짝 놀란 듯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 도망쳤다.”
“누나한테만 보이는 거야?”
“그런 거 같은데.”
하은은 손을 머리 뒤로 돌려 안대를 풀었다.
자신은 볼 수 있는데 오진이 볼 수 없다면 그 원인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용안’일 가능성이 컸다.
“와아.”
하은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안대를 벗기 전에는 드문드문 보였던 푸른 빛무리들이 주변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보자.”
마치 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빛무리들이 흐르고 있는 장소가 있었다.
“잠깐. 일단 위험한지 아닌지부터 판단을….”
“안 위험해.”
하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그… 정확히 이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위험하지 않다는 건 알 것 같아.”
“흐음.”
용안을 지녔기 때문에 느껴지는 게 따로 있는 건가.
오진은 일단 그녀의 말대로 하은만 보이는 빛무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를 걸어갔을까.
“…여긴.”
거대한 협곡을 통째로 깎아 만들어낸 듯한 건축물.
그 압도적인 스케일에 순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웅장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가 드래고니안 왕국인가?’
과연, 용들의 왕국답게 보기만 해도 가슴 뛰는 웅장함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저기가 드래고니안 왕국인가 봐요.”
“어, 뭐야? 이쪽이 왕국으로 가는 길이었던 거야?”
그저 푸른 빛무리를 따라왔을 뿐인데 뜬금없이 목적지에 도착하자 하은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로 거대한 도시가 멀리서 안 보였을 리는 없을 텐데… 뭔가 결계 같은 걸로 숨겨져 있던 건가? 그리고 그걸 누나가 용안으로 한 번에 찾은 거고.”
용인족들의 왕국을 숨겨주고 있던 장막은 하은의 용안으로 인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간단하게 정체를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뭐, 뭐야? 내 눈깔 좀 쩌는데?”
오히려 하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왼쪽 눈가를 더듬었다.
흉측한 힘줄이 뿌리처럼 내린 눈가.
파충류의 눈처럼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강렬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일단 밖에서 좀 살펴볼까?”
일단 왕국을 찾았다고 해도 대책 없이 바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수인족 때처럼 인간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위에 가서 도시 내부를 좀 보고 올게.”
도시 외곽을 둘러싼 성벽 때문에 여기서는 안이 보이지 않았다.
타앙!
와이어 슈터를 사용해 근처 암벽 위로 올라간 오진은 뇌흔 밝기를 연달아 사용하며 높게 점프했다.
“…뭐야 이거.”
사냥개자리의 성흔의 힘을 끌어올려 도시를 내려다보던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폐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 난 왕국의 모습.
용인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마인족으로 추정되는 무리가 폐허가 된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빌어먹을.”
오진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한발 늦은 건가.’
어렵게 찾아온 드래고니안 왕국은 이미 마인족에 의해 멸망해 버린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