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9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92화
역천의 별 (5)
어색한 침묵이 은하수처럼 흘렀다.
오진은 별빛으로 이뤄진 성좌를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자신을 먹어달라니.
그게 무슨 뜬금없는 헛소리란 말인가.
‘잠깐.’
먹어달라는 뜻이 우적우적 씹어 삼키라는 식사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물며 성적인 은유일 리는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그대도 무슨 뜻인지 알고 있지 않나?]그래.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다.
[자네가 지닌 검은 하늘로… 이 비루한 별자리를 집어삼켜 주게.]폴라리스는 마치 인격이 뒤바뀌기라도 한 듯 달라진 말투로 말했다.
“…….”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생각을 이어가던 오진이 천천히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포, 폴라리스!]베가가 다급히 날아와 폴라리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베가, 잠깐만.”
베가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베가는 흥분한 표정으로 오진을 뒤돌아봤다.
[뭐, 뭐가 괜찮다는 게냐? 본녀가 폴라리스와 직접 얘기할 테니 그대는….]“아니, 괜찮아. 어차피 폴라리스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만약 자신이 진짜 세계를 멸망시킬 천마라고 생각했다면 자신의 별자리를 먹어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겠지.
아니.
애초에 자신을 ‘역천의 별’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그제야 머리가 좀 식었는지 베가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알았던… 아니, 이건 뭐 물어볼 필요도 없나.”
작은곰자리 성흔의 능력은 미래를 들춰보는 것.
폴라리스가 무슨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라.
“언제부터 내가 흑천을 가지고 있던 걸 알고 있던 거지?”
검은 하늘처럼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별빛이 담겼다.
별빛으로 이뤄진 성좌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처음 그대와 만났을 때부터.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전부터.]“…….”
그렇다면 이미 다 들킨 상황에서 숨기겠다고 헛짓거리를 했단 말인가.
“하….”
헛웃음이 새어 나오며 깊은 현타가 밀려 들어왔다.
오진은 몸 주위에 펼쳐진 ‘흑막’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내가 흑천의 주인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날 역천의 별이라고 부른 거지?”
[그야 간단하지 않은가.]폴라리스의 몸을 이루고 있는 별빛이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무수한 별빛으로 이뤄진 시선이 영혼을 꿰뚫어 보듯 반짝였다.
[그대야말로 정해진 운명을 뒤바꿀 ‘역천의 별’이니까.]역천의 별.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세계의 운명을 다시 쓰는 구원의 존재.
일전에 베가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역천의 별이 꼭 회귀자를 가리키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온 적이 없는데?”
실제 성좌들이 ‘역천의 별=회귀자’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저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말 하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오진이 알고 있는 ‘시간을 거스른’ 존재는 이신혁와 천마가 유이했고, 자신은 그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즉.
애초에 자신이 역천의 별이라는 말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한다는 뜻.
[하지만 그대는 시간을 거슬러 온 별자리를 흑천 안에 품었지.]“…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신혁의 성흔을 흡수해서 역천의 별이 됐다는 거야?”
오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래.
이신혁의 성흔을 흡수했기 때문에 역천의 별이 됐다고 하면 논리적인 모순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게 말이 돼?’
역천의 별이라는 게 무슨 딱지치기처럼 따면 내 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폴라리스를 바라봤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기대와는 달랐다.
“운명?”
갑자기 무슨 운명 타령이란 말인가?
“그거야 뭐… 정해진 미래를 말하는 거 아냐?”
애초에 운명이라는 것을 딱히 믿지 않은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운명의 정의를 물어보는 게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운명의 성질에 대한 거지.]“…뭔 말이야 그게?”
말 한번 더럽게 꼬네.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으며 눈을 찌푸렸다.
[질문을 바꾸지. 그대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바꿀 수 없다면 애초에 역천의 별이라는 존재가 있을 수도 없겠지.”
[그렇다면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딴 선문답을 하고 싶어서 날 부른 거냐?”
오진은 폴라리스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폴라리스는 나지막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운명에 대해 이리 말하지. 나비의 작은 날갯짓에도 태풍이 이는 것처럼, 아주 작은 행동 하나로 운명은 바뀌게 된다고.]“뭐… 아무래도 그렇지?”
그에 대해서는 오진도 동감하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미래라는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닌 이상, 작은 행동 하나하나로 바뀌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항상 오른쪽 길로 가던 사람이 그날따라 왼쪽 길로 갔더니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한 행동은 단순히 평소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발걸음을 향한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운명은 송두리째 뒤바뀌지 않았는가.
‘그래… 마치.’
이신혁이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천마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폴라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운명이란 ‘정해진 미래’라고.]그는 별빛으로 이뤄진 손을 들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손가락 끝을 따라 일직선으로 별빛이 그어졌다.
[운명이라는 것은 올곧게 뻗어나가는 선이 아니다.]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손을 내리그었다.
별빛의 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운명이란 사납게 쏟아져 내리는 급류와 같지.]“…아까부터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대는 쏟아져 내리는 급류에 작은 돌멩이를 던진다고 그 흐름이 바뀔 거라 생각하는가?]“…….”
이제야 폴라리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좀 알 것 같았다.
“운명이라는 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래.]“아니 뭐 그 간단한 말을 그렇게 베베 꼬아서 하는 거야?”
무슨 소크라테스야?
[정확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선 때론 적절한 은유가 필요한 법이지.]“내 입장에선 겉멋 들린 말로밖에 안 들리지만 말이지.”
뭐,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운명은 전생과 아예 달라졌는데?”
비단 그의 운명만이 아니다.
하은의 운명도, 베가의 운명도 이사벨라의 운명도, 카시아의 운명도.
아니.
어쩌면 세계의 운명까지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로 인해 전생과는 아예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내가 그대를 ‘역천의 별’이라 부른 것이다.]“아….”
이제야 자신이 처음 했던 물음과 대답이 이어졌다.
폴라리스가 자신을 ‘역천의 별’이라 칭한 이유.
“그러니까… 내가 운명을 바꿨기 때문에 역천의 별이라는 뜻이지?”
[그렇다.]애초에 시간을 거슬러 오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걸 바꿨기에.
쏟아지는 급류를 뒤틀었기에.
하늘의 이치와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 역천의 별이라 불릴 자격을 얻었다는 것.
‘순서가 반대였군.’
역천의 별이기에 운명을 바꾼 것이 아니다.
바뀔 리 없는 운명을 바꿨기에 역천의 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네… 아니, 폴라리스 님의 별자리를 흑천으로 흡수하라는 겁니까?”
[인제 와서 예를 차리려는 건가?]“적의가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굳이 내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폴라리스는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난… 흘러가는 운명을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비루한 성좌니까.]“…….”
아까 전에 자신을 운명의 급류에 묶여 있다고 표현했던가.
“…율법의 제약에라도 묶여 있는 거야?”
[아니. 내가 묶여 있는 것은 그보다 더한 것이지.]폴라리스는 씁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은 내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었으면서, 그를 바꿀 수 있는 팔다리는 앗아가셨다.]짙은 자괴감과 죄책감에 가득 찬 목소리.
별빛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때도 나는 그저… 가만히 이곳에 묶여 운명이 흘러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그때?”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아득한 과거 흑천에 의해 이미 한 번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을.]베가와 함께 간 별의 무덤.
지금의 성좌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아득한 과거에 일어났던 멸망.
오진의 입장에서야 과거 공룡의 멸종했다는 얘기 정도로밖에 와닿지 않는 말이었지만.
“설마… 그때부터 이 샘 안에 갇혀 있었던 거야?”
[그래.]저 ‘그래’라는 담담한 대답 안에 얼마나 아득한 감정이 녹아 들어가 있을까.
[세계가 멸망하고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계속해서 기다려왔다.]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억겁의 시간 속에서.
바위산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처럼.
애타게 애원하며, 처절하게 갈망하며, 무력한 자신을 저주하며.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누군가 이 미래를 바꿔주기를.]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절망과 고통을 막아줄 존재를.
[무너지는 정신을 여러 개로 쪼개며 계속해서 운명을 바꿀 존재를 기다려 봐도.]아무도.
그 누구도.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하지만.
그러던 중.
[네가… 보였다.]검은 하늘 속 찬란히 빛나는 한줄기 별빛이.
운명을 거스를 역천의 별이.
그렇게 말하며 폴라리스는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
다가오는 멸망을 그저 묵묵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얼마나 폴라리스를 절망에 빠트렸을지는, 오진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다시 말을 높였다.
예를 차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이제까지 폴라리스가 견뎌 온 아득한 삶의 무게에는 경외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제가 당신을… 작은곰자리 별의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어드리겠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뜬금없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진이 본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닳아 마모된 폴라리스의 모습뿐이었으니까.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기까지.
그가 얼마나 아득한 절망을 견뎌왔을지 감히 상상하지 않았다.
알 수 없을뿐더러, 설사 안다고 해도 그를 위로할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기나긴 이야기의.
절망과 후회와 탄식과 자책만이 가득하던 삶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것뿐이다.
[…고마워요.]다시 말투가 바뀌었다.
원래 이 조용조용한 말투가 폴라리스의 말투였는지, 근엄한 말투가 폴라리스의 말투였는지 오진은 모른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
이미 진짜 ‘폴라리스’는 아득한 시간에 마모되어 바스러져 버렸을 테니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오진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먹구름이 작은곰자리의 성좌를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