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3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32화
거짓말 (5)
개천(開天).
흑천의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탐욕스러운 먹구름이 해방됐다.
검은 소용돌이가 요동치며 서로를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크윽… 아, 으.”
개천을 사용하자마자 흐릿해지는 의식.
약에 취한 듯 몽롱한 감각과 함께 검은 먹구름 속에 의식이 가라앉는다.
마치 질척한 늪지대 발을 디딘 듯한 느낌.
발 디딜 곳을 잃은 의식은 빠른 속도로 검은 먹구름 속으로 추락했다.
파지지지직!
“크으으으!”
왼쪽 가슴 위에 올려진 손에 푸른 뇌전을 일으켰다.
짜릿한 뇌전이 전신에 퍼지며 가라앉고 있는 의식을 강제로 각성시켰다.
까득.
여기서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대로 끝.
흑천은 탐욕스럽게 ‘오진’이라는 존재 자체를 먹어 치우겠지.
모든 기억이 흑천에게 잡아먹힌다면 그 이후에 있을 일은 뻔했다.
‘흑천의 꼭두각시가 되겠지.’
성좌도, 그 성좌의 성흔을 이어받은 각성자도.
굶주린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후우.”
끓어오르는 흑천의 기운을 가까스로 제어하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자 이쪽을 바라보며 즐겁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천마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개천을 사용하는 건 익숙하지 않은가 봐?”
그렇게 말하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천마의 모습은 내 집 안방에 있는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개천 사용한 거 맞아 저거?’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할 듯 위태로운 상태에서 어떻게 저런 여유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왜, 어떻게 이렇게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
천마는 검은 먹구름으로 변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너도 할 수 있을 거야. 나처럼 ‘잃는’다면.”
“…….”
아아, 그렇게 된 건가.
‘가지고 있는 게 적으니까, 상대적으로 잃을 것도 없다는 거냐.’
이미 의식의 대부분이 흑천에게 잡아먹혔기 때문에 오히려 그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니.
지금 천마의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천마는 방긋 웃으며 반쯤 검은 먹구름으로 변한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무리 잃었어도, 아무리 사라졌어도.”
단 하나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을 테니까.”
쿠르르르르륵!
검은 먹구름이 요동치며 천마의 몸이 오진을 향해 쏘아졌다.
‘위!’
폭포처럼 쏟아지는 검은 먹구름을 향해 손을 뻗는다.
쿠르르르르르릉!
오진의 흑천와 천마의 흑천이 격돌하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주변을 뒤흔든다.
대지가 갈려 나가고, 울창하게 자라있던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날아간다.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압도적인 파괴가 주변 대지를 찢어발긴다.
“하아, 하아!”
뒤엉킨 두 개의 흑천.
검은 뇌전과 불꽃이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서로를 뜯어먹었다.
“흐읍!”
짧게 숨을 들이쉬며 창을 내질렀다.
검은 뇌전에 휩싸인 창이 천마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천마의 몸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그리고.
“……!”
머릿속을 스치는 ‘미래’의 모습.
오진은 오른발을 축으로 빙글 몸을 돌리며 위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카가가각!
위에서 나타난 천마가 재빠르게 팔을 교차해 창을 막았다.
“그게 폴라리스에게서 얻어낸 능력이구나.”
천마는 즐겁다는 듯 눈을 빛내며 엑스자로 교차한 팔을 넓게 펼쳤다.
“너만 가지고 있는 걸 보여줬으니, 이젠 내 차례지?”
검은 불꽃이 거미줄처럼 넓게 펼쳐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오진의 몸을 옭아맸다.
“크으!”
“그물자리라는 성흔이야. 나름 쓸만하지?”
“이까짓 건…!”
오진의 몸이 검은 먹구름으로 바뀌며 그물처럼 뒤엉킨 검은 불꽃을 ‘먹어 치웠’다.
불꽃으로 이뤄진 그물이 끊어지며 오진이 천마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한계까지 뒤로 젖힌 팔을 내지르며 창을 투척했다.
“내리쳐라!”
콰르르르릉!
창 안에 응축되어 있던 검은 뇌전이 천마의 불꽃을 꿰뚫으며 그의 오른쪽 어깨에 파고들었다.
천마는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꿰뚫은 창을 내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아프잖아.”
우득.
창대를 움켜쥐고 서서히 뽑아냈다.
꿰뚫린 살점 사이로 검은 먹구름이 피처럼 꾸륵꾸륵 흘러내렸다.
“자, 돌려줄게.”
화르르륵!
창을 타고 검은 불꽃이 사납게 타올랐다.
원래 오진이 지닌 창은 주인으로 인정한 존재 이외에는 다룰 수 없는 에고 웨폰이었지만.
‘구별 못 하는 건가.’
아무래도 에고 웨폰에게 ‘천마’와 ‘오진’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까지는 없는 모양.
천마는 창에 검은 불꽃을 담아 오진을 향해 투척했다.
화르르르륵!
창 안에 깃든 검은 불꽃이 사납게 오진을 노렸다.
“크읏!”
오진은 다급히 몸을 굴러 검은 불꽃이 깃든 창을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창이 그를 스쳐 지나가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끄응. 역시 무기를 쓰는 건 익숙하지 않다니까.”
특히 그게 ‘창’이라면 더더욱.
천마는 빗나간 창을 내려다보며 쯧쯧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계속해볼까?”
쿠웅!
오진이 창을 회수하기 전, 천마가 발을 박차며 빠르게 달려왔다.
움켜쥔 주먹에서 검은 불꽃으로 이뤄진 용이 솟구쳐 올랐다.
오진은 다급히 몸을 비틀어 용을 피했지만 이어지는 주먹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빠악!
“커헉!”
안면에 정확히 꽂힌 일격에 오진의 몸이 공깃돌처럼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주먹을 쥐었다 펼친 천마가 씨익 웃었다.
“흠. 역시 난 맨손이 제일 편해.”
“크으….”
머리를 뒤흔드는 아찔한 충격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흐트러지는 의식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천마와의 전투를 이어갔다.
쿠르르릉! 쿠궁!
교차하는 창과 주먹.
뒤엉킨 야수가 서로의 살점을 씹어먹듯 흑천의 구름이 서로를 씹어 삼켰다.
어느 한쪽이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는 점차 오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흐음. 역시 흑천의 ‘격’으로 따지면 상대가 안 되네.”
천마는 점차 오진의 흑천에 잠식되고 있는 자신의 흑천을 바라보며 쯧쯧 혀를 찼다.
서로 같은 흑천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천마가 지닌 흑천과 오진이 지닌 흑천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거문고자리 성흔이라.”
오진에게는 있지만 천마에게는 없는 것.
수십, 수백 개에 달하는 성흔 중에서 유일하게 ‘흑천’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거문고자리의 성흔.
그걸 지니고 있는 오진의 흑천은 천마가 지닌 흑천보다 한 단계 높은 ‘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흑천과 흑천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격차를 만들어냈다.
천마가 아무리 흑천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고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적으로 격이 높은 오진의 흑천에 잡아먹히게 되는 것이다.
“이거 참… 불공평하다니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젓는 천마.
오진은 계속해서 흐트러지려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왜, 이제와서 생각하니 처음 흡수한 성흔이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아닌 게 아쉬워?”
“그럴 리가 없잖아.”
천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왼쪽 가슴 위에 새겨진 용자리 성흔을 쓰다듬었다.
“이건 누나가 준 성흔이니까.”
그녀가 죽어가며 남긴 마지막 선물이니까.
설사 이 성흔에 흑천을 다룰 힘이 깃들어 있지 않다고 해도.
검은 먹구름 속에 집어 삼켜진 자신을 꺼내줄 능력이 없다고 해도.
오진이 지닌 ‘거문고자리 성흔’에 비해 나약하고, 조잡하고, 초라하다고 해도.
“이 성흔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난 여기 있을 수 있는 거니까.”
“…….”
“하지만 확실히 이대로면 불리하긴 하네.”
“그런 것 치고는 꽤 여유로운 것 같은데?”
“그런가? 하긴 뭐….”
천마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넌 날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설사 그가 더 높은 격의 흑천을 지녔다고 해도.
설사 그가 더 강력한 성흔을 지녔다고 해도.
“너는 날 이길 수 없어.”
오만에 차 있는 것도, 교만에 차 있는 것도 아니다.
교과서에 적힌 수학 공식을 나열하듯.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건 싸워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지.”
물론 이미 짧지 않은 교전을 몇 번 치른 이후지만.
아직까지는 어느 쪽이 더 유리하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 지금까지의 교전만 놓고 보면 오히려 오진 쪽이 좀 더 승산이 높았다.
“아니, 알 수 있어.”
천마는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너한테는 소중한 게 너무 많다고.”
“그게 어쨌다는….”
“소중한 게 많다는 건, 그만큼 잃을 것도 많다는 뜻이니까.”
쿠르르르륵.
다시 한번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는 천마.
절반쯤 검은 먹구름으로 변했던 그의 몸에서 먹구름의 범위가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이미 개천을 사용한 상태에서 더욱 흑천의 힘을 이끌어 올린다고?
‘그렇게 되면.’
육체의 절반이 먹구름으로 변한 것만으로도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기 벅찬 상황인데 여기서 흑천의 영역이 더 커진다면 그 결과야 뻔했다.
‘돌아올 수 없어.’
다시는 개천을 사용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처럼.
모든 의식이 검은 먹구름 갈기갈기 뜯어먹히겠지.
“너 지금 무슨….”
“흑천과의 싸움에서 ‘격’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검은 먹구름이 천마의 육체를 잠식해간다.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알아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천마의 육체 대부분이 검은 먹구름으로 변했다.
“어느 쪽이 더 많이 포기할 수 있냐, 야.”
버린다.
놓아준다.
쓸데없는 기억 따위, 의미 없는 추억 따위.
모조리 검은 먹구름 속에 집어 던지고.
“하아.”
검은 먹구름이 몸을 잠식한다.
팔이, 다리가, 머리와 가슴이.
모조리 검은 먹구름에 집어 삼켜진다.
검은 먹구름으로 변하지 않은 곳은 딱 하나.
용자리의 성흔이 새겨진 심장뿐이었다.
“너….”
인간 형상을 한 검은 먹구름 덩어리에 맥동하는 심장만이 떠올라 있는 기괴한 형태가 된 천마.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는 모습이 된 그를 바라보며 오진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가장 중요한 걸 잊지만 않는다면.”
검은 먹구름이 된 천마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검은 먹구름 사이에 기괴하게 떠올라 있는 자신의 심장을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자 그럼 이제 네 차례야.”
음울하게 일렁이는 먹구름 사이로 푸른 귀화가 타올랐다.
“너는,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