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98
98. 때가 되었다(3)
“일단 오늘은 무승부로 해 두겠습니다. 이 뒤는 다음에 이어서 하는 걸로 하죠.”
그 말을 듣는 순간, 군단장들은 표정 관리도 잊고 저도 모르게 질렸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다행히 0군단장 데몬 아루트가 그들의 표정을 더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본인의 실수를 자각한 군단장들이 얼어붙은 것도 잠시,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하던 연무장의 정적은 데몬 아루트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깨졌다.
먼저 말문을 연 이는 1군단장 제이카르였다.
“……기어이 둘 중 하나가 작살이 나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은데, 데르니반?”
“…….”
드벨라니아의 이죽거림은 통하지 않았다. 데르니반은 대꾸 없이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는 오엘의 뒤에 가서 섰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올 찰나, 우연인지 의도인지 오엘이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데몬 님 분명 내려 달라 하지 않으셨어? 근데 왜 트로버가 살아 있는 거야? 정말 싫었다면 데몬 님의 말을 거역한 트로버는 죽었을 텐데. 아, 혹시 그건가? 입으론 싫다 해도 몸은….”
“오엘 님, 그 말은 여기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거야?”
“예.”
골 때리는 대화에 드벨라니아가 배를 잡고 뒹굴었다. 주변의 다른 군단장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한참을 웃던 그녀는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눈가를 훔쳤다.
웃음기 묻어나는 나른한 목소리가 한 박자 늦은 답을 꺼내 놓았다.
“평소의 데몬 님은 온건하시니까, 싫어도 죽일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 아, 아니다. 싫었다면 애초에 트로버의 손에 잡히지도 않으셨을 테니 그냥 마음에 들었던 건가? 아무래도 오엘의 말이 맞는 것 같네. 입으론 싫다 해도 몸은….”
“그만. 드벨라니아 너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거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개성 넘치는 군단장들을 제어하는 것은 이번에도 1군단장의 몫이었다.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0군단장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모든 군단장들의 인정을 받은 제이카르는 언제나 그랬듯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모여 있던 군단장들을 해산시켰다.
군단장들간의 만남이나 교류에 대한 규제는 딱히 없지만, 이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사고만 일으키는 족속들이니 지금 당장만이라도 흩어놓는 편이 좋을 테니까.
***
일주일 뒤 트로버가 대련을 하자고 하면 어쩌나 싶었던 내 걱정은 다행히 현실이 되지 않았다.
딱 일주일이 되는 날, 마왕이 나를 부른 것이다.
“어서 와.”
집무실에 도착한 나를 자리에서 일어나 반긴 그가 자연스럽게 자리로 이끈다. 실수인지 의도인지 목 언저리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냥 넘기기엔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힐긋 눈을 굴려 집무실 한쪽 벽면의 거울을 보니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검은 낙인이 눈에 들어왔다.
“……?”
“아, 놀랐어?”
그야 당연히….
이걸 새긴다는 것이 제국에 보내겠다는 암묵적인 의사 표시임을 알고 있다. 슬슬 갈 때가 되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는 사이, 다시 자리에 앉은 마왕이 따로 채색된 지도를 내 앞에 밀었다.
“설명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볼래?”
지도에는 제국을 비롯하여 주변 몇몇 왕국들이 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영역을 합치니 거의 대륙의 절반 수준….
‘절반 수준?’
벌써?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줄곧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마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읽을 수 없었던 역안이 보란 듯이 눈웃음 짓는다. 마왕은 그대로 지도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확실히 제국은 제국인 모양이더라. 곧 있으면 대륙의 절반을 먹을 기세야. 아니, 정말 그렇게 되겠지.”
“…….”
“지금 정복을 시도하고 있는 왕국은 에스페라네스. 이 지도상에 존재하는 왕국 중 가장 작은 왕국이지. 제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얼마 못 가 성문을 열지 않을까 싶어.”
“…….”
“자, 그럼 문제. 제국이 여기서 만족하고 멈출까, 아니면 기세를 몰아 진격할까?”
이 자리에서 답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몸을 뒤로 물린 마왕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깍지 낀 두 손은 책상 위에 차분히 올려놓고, 고개는 천장을 향해 젖힌다.
“난 그쪽 황제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성격은 알아. 아마 황제는 멈추지 않겠지. 그대로 각 왕국을 정복하고, 대륙을 통일하고, 갈 곳 잃은 검 끝을 마계로 돌릴 거야. 내가 그걸 가만히 두고 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
“이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겠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우세한 판을 짜고 있던 제국의 게임에 난입하려는 것이다.
판을 뒤엎고, 게임 종목 자체를 바꿔서.
이전까지가 인간계 내에서의 영역 다툼이었다면, 이제는 인간계와 마계 간의 존속을 건 전쟁으로.
‘황제가 상당히 분노하겠군.’
마왕은 제국의 정복 전쟁 방해를 예고했다.
이제 다시 제국의 편이 될 때가 왔다.
나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마왕이 싱긋 웃었다.
“다녀와. 이번엔 선물 같은 건 안 가져와도 돼. 가져오더라도 내 것만 갖고 오든가.”
이를테면 ‘정보’ 같은 것 말이지.
무거운 내용과 달리 무척이나 산뜻한 어조였다.
***
데온이 물러가고, 마왕이 몸을 늘어뜨리며 앉아 있던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마계가 움직인 이 상황은 황제에게 시비를 거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시비를 피하지 않는 그의 성격상 아마 마계와의 전면전을 준비하겠지.
생각에 잠긴 눈이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본다. 나직한 중얼거림이 적막한 집무실을 채웠다.
“이제 데온 하르트는 조심해서 사용해야겠네.”
유용하지만 위험한 나의 패.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지만….’
그를 제국에 보내서 받게 될 손익을 저울에 달아 보면 차라리 보내지 않는 편이 안전하고 좋다.
하지만 그래서는 규칙 위반이지.
이건 데온 하르트를 가운데에 둔 마왕과 황제의 심리전이자 자존심 싸움이다. 가야 할 그를 붙잡아 두거나 죽이는 쪽이 겁쟁이이자 패배자가 되는 것.
이 재밌는 게임이 너무 일찍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왕으로서는 데온 하르트를 마계에 묶어 둘 수 없었다.
“앞으로 많이 피곤해지겠어.”
손을 들어 눈가를 꾹꾹 눌렀다. 가려진 눈과 달리 드러난 입은 명백히 웃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의자가 책상 앞에서 우뚝 멈춘다. 눈에서 손을 뗀 마왕이 시선을 내려 지도를 눈에 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지도상에서 가장 작은 왕국이 존재해 있었다.
“뭐… 오래된 역사가 힘의 크기를 정하는 것은 아니니.”
긴 역사와 전통이 새로운 힘에 부서지는 모습은 몇 번이고 봐 왔다.
그러니 제아무리 지도상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이라 할지라도 결국 제국 앞에 무너지게 되리라.
어쨌든 당장 집중해야 할 것은 제국이다. 손을 뻗어 통신석을 건드렸다.
-예, 마왕님. 트로버입니다!
“이제 경계선으로 돌아가.”
-예? 아, 아니, 알겠습니다.
애초에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이유로 임무를 내팽개치고 온 것이다. 아직까지 아무런 일도 터지지 않았기에 별다른 말이 없었을 뿐, 무슨 문제가 생겼다면 진즉에 목이 날아갔으리라는 것은 트로버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왕이 돌아가라 말하는데 어찌 감히 되묻겠는가.
평소 생각이 없는 듯 행동하던 9군단장 트로버도 이때만큼은 조용히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
마왕이 황제의 판에 끼어들려 한다. 필시 충돌이 일겠지. 내 할 일이 늘어날 것은 안 봐도 뻔하다.
정보뿐만이 아니라 직접 무기를 들고 전투에 뛰어들게 되는 상황도 생기지 않을까.
‘시발, 또 입에 천을 쑤셔 넣고 그 지랄을 떨어야 하는 건가.’
시도 때도 없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피는 약점이다.
특히 기댈 곳 하나 없던 8년 전쟁 때, 이를 감추기 위해 입 안에 천을 욱여넣고 복면으로 그 모습을 감췄었다. 그러다 숨 막혀 죽을 뻔한 적도 있지만.
‘아니, 아니지. 지금은 만인이 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아니까 별 상관은 없겠다.’
다들 알아서 잘 생각해 주겠지.
마왕의 저주라든가, 용사의 자폭을 막은 후유증이라든가.
“에드, 인간계에 갈 겁니다.”
“아, 네. 이번에도 홀로 다녀오시는 겁니까?”
“네.”
“준비하겠습니다.”
곧장 일어선 에드가 척척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괴상한 식물을 품에 안고 있는 히엔과 마주쳤다.
“…….”
“…….”
슬슬 문이 닫힌다. 완전히 닫히기 전, 발이 문 안에 쓱 들어왔다.
“잘라 버리기 전에 빼라.”
“자, 잠시 데몬 님을 좀….”
“나한테 말해.”
“그럼 이것만이라도 데몬 님께 전해 주시면….”
긔에엑.
검붉은 색의 처음 보는 꽃이 수줍게 괴성을 뱉었다. 꾸물꾸물 움직이는 그것을 본 에드의 표정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괴상한 꽃은 뭐지? 지금 그딴 걸 데몬 님께 드리려는 건가?”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을 심어 키웠어요.”
“아주 예쁜 꽃이군.”
“…….”
“…….”
아니, 잠깐만. 내가 준 씨앗을 심어 키웠다고? 저게?
내가 준 건 장미 씨앗인데. 절대 키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혼란에 말을 잃은 사이, 힐긋 나를 살핀 에드가 다시 한번 꽃을 보더니 큼큼 헛기침을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라.”
히엔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방에 발을 들였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살피던 에드가 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전 준비를 하러 다녀오겠습니다.”
“…….”
날 혼자 두지 마.
내 무언의 외침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에드가 방을 나가고, 히엔과 단둘이 된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화분 속 식물을 살폈다.
잘 보니 장미와 얼추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꽃잎이 장미 모양 같긴 하거든.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건 못 본 걸로 하자.
도대체 이걸 어떻게 키운 거지?
“그건….”
“아, 역시 알아보시네요!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을 드디어 피워 왔습니다! 보통 씨앗은 심으면 3일 내로 싹이 트는데,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은 역시 뭔가 다르긴 한지 이건 일주일이 되어서야 간신히 싹이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싹이 날 수가 없다니까.
“사실 데몬 님께서 주신 씨앗을 헛되게 보낼 수 없어 살짝 마력을 주입했어요.”
“아, 그래서 그런 괴생명체가….”
“네?”
“아닙니다. 그런데 마법은 사용 금지 아니었습니까?”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마력을 주입한 것뿐이에요. 다행히 잘 받아먹고 쑥쑥 크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히엔이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무언가 바라는 듯한 눈빛에 나는 약간의 침묵 후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수고했습니다.”
“네!”
“…….”
“아, 그리고 이건 가지세요! 귀한 씨앗을 키울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긔에에.
아니, 보답이면 좀 좋은 걸로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걸 왜….
복잡한 눈으로 테이블에 놓인 꽃을 보다가 손을 뻗어 화분을 밀었다. 만에 하나 꽃에 손이 닿기라도 할까 손끝이 달달 떨렸다.
“괜…찮습니다.”
“네? 어째서… 아, 걱정 마세요. 이 꽃이 데몬 님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확실히 교육시켰거든요.”
동물이냐.
“마침 인간계로 가신다던데, 귀찮은 녀석들을 아래 선에서 처리해 줄 호위가 필요하지 않으시겠어요?”
“……이건 뭘 먹습니까?”
“아, 그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먹기는 이것저것 다 먹는 것 같은데, 굳이 뭔가 먹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 같아서….”
“이것저것이라니….”
“마물이나 인간, 마족 같은 것이요.”
“역시 괜찮습니다.”
인간을 먹는다잖아! 아무리 잘 교육시켰다고 해도 그렇지, 날 먹으려 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대번에 히엔이 시무룩해졌다. 그의 노력과 정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 내 목숨이 더 소중하다.
필사적으로 그를 외면하는데, 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몬 님, 에드입니다.”
“들어오세요!”
에드가 들어오기 무섭게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아한 에드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히엔을 눈으로 가리켰다. 요컨대 이런 뜻이다.
‘우리 교대하자.’
난 잠시 도망… 아니, 자리를 비울 테니까 네가 얘 좀 어떻게 해 봐.
“전 잠시 화장실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예?”
“그럼.”
서둘러 방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갔다.
등 뒤로 따라붙는 당혹스러운 시선은 무시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