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188
이젠스 성 대작전 (3)
하지만 고장이 난 건 주인집 소녀뿐만이 아니었다.
와인을 사러 심부름 왔던 처녀들도, 바깥 테이블에 기대서 물 탄 와인을 홀짝이던 아가씨들 중 몇몇도 방금 뛰쳐나간 소녀처럼 충격으로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아슬란 님이… 약혼을….〗’
‘〖그분은 언제까지나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는 절벽 위의 난초 같은 분이었는데….〗’
‘〖아슬란 공자님은 내가 처음으로 연모한 분인데. 처음 뵈었을 때부터 그 수려한 외모가 남다르셨으니 혼담이 쏟아져 들어왔겠지, 흑.〗’
‘〖지난번 첫 방문을 하셨을 때만 해도 그런 낌새 없었잖아! 하루 종일 검만 쥐고 계셨다고! 마수에 맞서 기사단을 이끌고 험지에 나섰던 그분께 훈장이나 하나 달아주고 마는 알비온의 야박한 처사를 탓하지도 않고!〗’
‘〖축제 마지막 날에 오신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이제 그 공녀란 여자를 데리고 오는 거야?〗’
‘〖야야야, 일 절만 해. 그래서 상대는 누군데!〗’
천막 아래는 흥분으로 끓어올랐다.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도 축제 분위기가 들뜨니 그저 부어라 마셔라 즐거움에 취했다.
접객원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더 관심이 있으시면 여기, 방금 나온 석간신문도 있습니다. 손님 혹시 브룬넨어를 읽을 수 있습니까?】”
“【아쉽게도, 아니요.】”
“【그럼 사진만 보십시오. 라에티카 공국의 외제니아 공녀님은 가련하고 아리따운 분이십니다. 황제폐하의 따님이시죠. 그분과 우리 아슬란 공자님께서 혼인하시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가 되실 게 분명합니다. 허허!】”
접객원은 클레이오에게 신문을 쥐여주고선 다른 테이블로 뛰어갔다.
아까 지역 유지 노인의 선언을 기점으로 이곳저곳에서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잔치 분위기 한복판에서 프란과 클레이오는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다.
아슬란의 약혼은 시골 마을의 소란 거리에 그칠 사건이 아니었다.
정치적 대격변의 예고였다.
브룬넨의 현 황제 요아힘 카스틸리엔은 라에티카 공국의 공작이기도 했다. 라에티카는 마인라트와 함께 브룬넨 최대의 영토와 세력을 가진 공국이었다.
그곳의 공녀와 아슬란이 결합한다면….
‘이 혼인동맹은 아슬란의 정통성을 최대한도로 강화시켜 주겠지.’
브룬넨의 황제는 일곱 공후의 투표로 선출된다.
요아힘 황제가 병을 얻은 지금 군주국 내부에서도 공국 간의 다툼이 치열했다.
일곱 공국은 브룬넨이라는 한 이름에 묶여있을 뿐, 제도도 법률도 공국마다 같지 않았고 기사나 마법사 역시 각 공국에서 자체적으로 양성한다고 들었다.
‘지난 원고에선 애초에 요아힘이 병석에 눕질 않았다고. 근데 이번엔 아직 노년에도 못 이른 황제가 갑자기 골골하니 공국들이 들썩이지.’
그건 뮤즈가 기록하려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주변 대화를 알아들은 일행 세 사람이 각자의 생각으로 축 가라앉아있을 때, 접객원이 가져다준 와인병 주변을 맴돌던 카롤링거어 점수 최하점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발랄하게 물었다.
“도련님! 향이 너무 좋은데, 이 새로 딴 병의 술을 제게도 좀 맛보여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레이 너 혼자 마시면 싫어. 안 돼.’라는 분명한 뜻을 담고서 아서가 개암빛 눈을 우렁거렸다.
평소의 짙은 청록색이 아니다 보니 조금 더 갯과 동물에 가까워 보이는 단점이 있었다.
클레이오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떠들썩한 술집에서 초상집의 문상객처럼 굴고 있으면 쓸데없이 눈에 뜨일 것 아닌가.
꼴꼴꼴.
클레이오는 칭찬하는 뜻을 담아 아서의 잔을 아주 가득 채워주었다.
“그래. 짐을 옮길 수만 있으면 되니 실컷 마셔도 좋아. 숙소인 방갈로는 포도밭 중턱에 있는데 올라가다 넘어지지 않도록만 해.”
“선생님, 감사합니다요! 예이!”
***
프란이 추천한 숙소는 산 중턱의 방갈로였다.
포도밭과 이젠스 성 사이에 자리해, 일을 도모하기엔 딱인 위치였다.
앞마당에선 불을 피우고 놀 수 있어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박한 목조 건물은, 포도 수확철엔 일꾼의 숙소로 사용하고 여름엔 여행객들에게 빌려주는 용도라고 했다.
산 아래의 관리인에겐 선불로 비용을 치렀다.
다음날 행선지를 향해 일찍 하이킹을 시작할 예정이라 아침 식사는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일렀다.
이맘때는 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거나 하이킹에 나서는 청년들이 워낙 많다 보니, 분주한 관리인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작이며 각종 먹거리, 술까지 짊어지고 들이닥친 일행에게 관리인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진탕 놀이판을 벌일 것처럼 도착한 일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의 지형지물과 길을 파악하는 거였다.
모두들 그럴듯한 복장을 치우고 가벼운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었다. 구두에도 단추로 각반을 채웠다.
옷깃 안에는 비상용 금화를 꿰매 넣고, 지도와 포옹의 반구 짝도 맡은 역할에 따라 나누어 가졌다.
섬광탄이며 연막탄, 마석 지갑에 옷가지까지 클레이오가 꾸릴 짐도 제법 많았다.
네 사람은 이젠스 성까지의 진입과 탈출을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해보며 인적 없는 숲길을 한참 헤집었다.
아서, 이시엘은 훈련받은 기사예비생이라 지형지물을 익히는 데 능숙했다. 클레이오는 ‘약속’의 「기억」기능에 의지했고 프란은 그냥 머리가 좋았다.
각자의 방법으로 주변 지리를 정확히 숙지하고 나니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다.
저녁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클레이오는 들어오자마자 신발만 벗어두고서, 짚을 채운 침대 위에 엎어졌다. 팔팔한 기사들과 달리 못 자면 체력이 깎이는 그는 짧게라도 자야 했다.
클레이오가 눈을 붙였다 일어나니 어느덧 밤중이었다.
아서는 잠입에 불필요한 옷가지와 짐을 태우는 중이었다.
아무튼 모닥불은 모닥불이다.
“이시엘은?”
“어두우면 변수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첼과 만날 장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러 갔어. 아마 곧 돌아올 거야.”
“아, 정말 준비성 있고 성실하다니까… 고맙네. 하아암.”
연일 이어진 강행군으로 피곤이 가시지 않은 클레이오는 연신 하품을 하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작전 개시 시간까진 아직 한 시간 남짓 남아있었다.
팔월이 한창인데도 마인라트의 밤은 서늘했다.
아서는 방갈로에서 찾아낸 양철 주전자를 모닥불에 얹어 물을 끓여낸 뒤,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아까 저녁거리를 살 때 같이 산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밀크티였다.
별이 가득한 산중의 밤이라서일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만은 엠티 날의 캠프파이어였다.
일단, 아서는 우쭐댔다.
프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내의 주점에 꼭 들러야 한다고 주장한 게 그였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맞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얘길 들을 수 있다고.”
그 꼴이 가관이라 클레이오는 혀를 찼다.
“츳, 그으래. 너무 많은 얘길 듣고 말았네. 너네 둘째 형 영애들에겐 영 관심 없는 척하더니 할 건 제일 빨리 해치우다니.”
“중매서줄 어머니가 건재하시잖아. 오죽하겠어.”
프란은 낮은 차원에서 맴돌고 있던 대화가 답답했는지 아서와 클레이오의 대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가 과거 이젠스성에 체류할 때는 2왕자가 직접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어. 상황이 바뀐 거다.”
“그래, 아슬란이 시골 아가씨들 순정을 아주 깡그리 수거해 갔던데.”
“농담은 그쯤 접어 둬. 이젠스는 한갓진 읍으로 보여도 마인라트 공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부유한 지역이야. 이젠스 와인은 막대한 부를 벌어다 주지. 축제 따위에 얼굴을 비추고, 지역민에게 호감을 사는 것도 마인라트의 후계자로서 보이는 행보인 거다.”
주전자를 불에서 내린 아서는 꽤 진지한 표정이 되어, 프란에게 먼저 잔을 쥐여주었다.
“프란, 네 이야긴 항상 깊이가 있네.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즉, 아슬란의 결혼도 후계자 지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란 뜻이다. 마인라트 공작 프리드리히가 타국의 왕자인 외손자를 정식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면 현 황제의 세력인 라에티카 공국의 지지 정돈 필요하겠지.”
“아슬란을 마인라트 공작의 후계자로 만들어주면 라에티카 공국은 무슨 실익을 얻지?”
“브룬넨은 여성 상속이 불가능하니, 요아힘 황제의 아들이 급사한 지금 두 공국엔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는 거야.
그 와중에, 두 공국 모두와 혈연관계에 있는 7레벨 기사가 나타났다고 생각을 해봐. 심지어 그는 마수를 수없이 무찌른 전사이기까지 하지.”
“호오.”
“아슬란과 외제니아 공녀가 결혼해 두 공국의 세력을 묶어준다면, 아슬란에겐 차기 황제 자리도 먼 꿈이 아니게 될 거다. 황비를 자신들 공국에서 낼 수 있다면 라에티카가 손해 보는 계산은 아니지.”
마인라트와 라에티카는 다른 다섯 공국보다 군사력이 강성했고, 그런 탓에 국내 정치에서의 영향력도 컸다.
“갈라 처먹을 게 있으니 화평을 맺은 거라 이거구만. 그래서 걔들은 알비온을 제물로 삼을 작정인 건가?”
“속되게 말하자면 그렇게 된다만, 넌 왕자라는 놈이 어째 말본새가….”
“아, 뭐! 내가 언제부터 제대로 된 왕자였다고! 이거나 좀 물어보자. 아까 사람들이 뭐라고 아슬란 이름을 들먹이며 계속 뭐라뭐라 하던데 무슨 소리였어?”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 된 프란의 이마에 또다시 핏줄이 삐죽 섰다. 아서는 프란의 혈압 관리에 영 도움이 되지 않는 상대였다.
제 몫의 차를 후루룩 삼킨 클레이오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무슨 이야기였냐면 그 접객원이….”
그렇게 클레이오가 카롤링거어 대화를, 프란이 다른 손님들의 브룬넨어 대화를 요약해 전해줬다.
쓴 찻잔을 씻으려고 모아들던 아서가 입을 떡 벌렸다.
“헐, 마인라트의 공자님 인기가 장난이 아닌데? 알비온에 내가 모르는 왕자가 한 명 더 있는 줄 알았네!”
클레이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가씨들의 반응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쪽만은 알비온에서도 제법 수요가 있었다고. 넌 무도회장에 잘 안 들어오니 모르겠지만.”
“그거는 진짜 연애소설의 폐해다. 냉정한 왕자님을 나의 사랑으로 함락~ 이런 거잖아.”
“넌 어디서 그딴 건 다 봐가지고.”
“보긴. 내가 안 봐도 여성 접객원들은 어딜 가나 그런 책 이야기인걸.”
프란은 안경을 쓱 밀어올리고는 한심하단 듯이 말했다.
“푀르와 히드라의 독 실험 기술자들이 공공연히 오갔단 이야길 했는데, 너희 소감은 그것뿐이냐?”
“아니~, 프란 네 조사가 아주 정확했단 사실을 알 수 있었긴 하지. 하지만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고. 네가 근거 없는 보고를 할 리 없잖아.”
아서는 눈을 반짝이며 프란을 상찬했다.
비꼬려는 의도라곤 없는, 거의 동경마저 섞인 순진한 감탄은 철혈의 활동가조차 부끄럽게 했다.
안경을 밀어 올렸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내리며 프란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리오그난,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그건 요지가….”
그때, 프란을 난처한 처지에서 건져 올려줄 사람이 방갈로 입구에서 조용히 나타났다.
아서는 이미 기척을 짚고 있었는지, 깨끗한 잔 하나에 남은 밀크티를 모두 따랐다.
“잘 다녀왔어, 이시엘. 그래서 밤에 체크해 봐도 빛이 안 새 나가는 위치였어?”
첼의 비행기가 착륙할 장소를 프란이 미리 봐 두었다. 성에서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기묘하게 푹 파인 평지가 산줄기에 절묘히 감싸여 있었다.
아까 모두 함께 보고 왔지만 해가 진 뒤에도 마법식의 불빛이 단박에 보이지 않을지를 이시엘이 한 번 더 확인하고 왔다.
“지형이 오묘해서 빛이 새 나가지 않았습니다. 램프를 이용해 가장 안전한 위치를 찾아 누름돌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이시엘에게 건넨 아서가 최후의 펀치를 날렸다.
“와! 이렇게, 그 어떤 말도 어긋나지 않는데, 프란 네 의견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어? 넌 진짜로 굉장해.”
프란은 더 이상 대답 없이 귓가를 쓱 붉혔다. 저런 노골적인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그였다.
달칵. 탁.
차를 훌쩍 마신 뒤, 조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회중시계의 뚜껑을 열어 본 붉은 머리 기사가 시간을 알렸다.
“아서 님, 가야 할 시간입니다. 정리하자. 프란시스, 클레이오.”
네 사람은 각자 결의를 다지듯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흐로, 이젠스 성 잠입 작전 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