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72
오페라극장 살인사건 (4)
하지만 두 사람 다 광기어린 살인마로 보이진 않았다.
‘물론 살인마가 이마에 나 범인이요 써 붙이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서도… 맨 앞에 앉은 저 꼬장해 뵈는 노인네는 상급 마법사고, 나머지 하나는 스툴 좌석에 선 젊은 기사. 연인이랑 왔는데. 일단 체크는 해놓자.’
클레이오는 이시엘 편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공연 시작 전 극장 안은 시끌시끌했지만 혹시 몰라 목소리를 낮췄다.
“수상한 사람은 있었어? 네가 보기엔 어때?”
“일반적인 에테르 감응자밖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막과 막 사이에 늦게 도착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게 좋겠다.”
“내가 볼 땐 저 맨 앞의 백발 노인이랑 스툴 석에 서있는 저 키 큰 청년 둘 정도만 레벨이 좀 높은 것 같거든?”
“스툴 석?”
앞자리의 노인은 이시엘 역시 발견한 모양이지만 뒷자리의 청년은 보지 못했는지 시선을 뒤로 향한다.
“저 자는 본 적이 있다. 수도방위대 기사단원이야. 잘 찾아냈다.”
“뭐.”
클레이오는 베헤못 역시 뭔가 찾아낸 게 없는가 싶어 고양이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하품을 푸지게 한 베헤못은 뚠뚠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먀아아아아앜(극장 안은 네가 본 둘이 다다.).”
그렇게 이시엘과 클레이오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동안, 급사가 에카르라트 산 로제 샴페인과가을 산딸기를 담은 베리볼을 은쟁반에 받쳐 왔다.
이미 베헤못이 술꾼임을 아는 디오네가 산딸기를 쟁반 위로 옮겨 놓고, 베리볼에 샴페인을 얕게 담아 주었다.
클레이오의 허벅지를 박차고 튀어 나간 베헤못이 베리볼에 주둥이를 박았다.
할짝 찹
헌데 무슨 일인지 딱 두 입 핥아보더니 앞발로, 탁, 그릇을 밀어내 버렸다.
“에웅, 냣 케켁(이거 뭐냐, 이름난 술이라더니 맛이 영 별로잖냐. 향도 약하고 끝 맛도 질척해.).”
“우리 못이, 술이 마음에 안 들어요?”
“먘! 먘먘!(하여간 로제는 비싼 것도 제 값 못하는 게 너무 많다.).”
호르르, 꼴깍
“그렇구나, 못아. 네 입에 안 찰만 하구나. 하긴 뭐 본인은 술도 안 마시는 왕실고문변호사가 술에 대해 뭘 알겠니~.”
알콜중독묘의 편견에 찬 소리는 그저 고양이 소리로만 들릴 텐데도 디오네는 기가 막히게 짐승의 뜻을 잘 파악했다.
잔을 내려둔 그녀는 산딸기로 입가심을 하고 베헤못의 주둥이에도 한 알 쏙 밀어 넣어 주었다.
“두 분, 이제 다 살펴봤어요?”
“네.”
“그렇습니다.”
“비록 맛은 변변찮지만, 기분이니까 샴페인 한 잔씩 들겠어요?”
이시엘은 늘 그렇듯 술을 사양했다.
클레이오는 잔을 받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베헤못이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맛 볼 필요도 없다고 만류했다.
‘꼭 맛이 없을 거 같아선 아니지만….’
“저도 오늘은 할 일이 있으니 사양하겠습니다.”
“내참! 까탈스럽긴. 술맛 되게 따진다니깐.”
자기 몫의 잔만 조르륵 비운 디오네는 체온이 오르는지 모피를 고정한 카메오를 끌렀다.
새하얀 담비 모피가 스르르 흘러내리자 그 아래로 크림색 이브닝 드레스가 드러났다.
귀걸이도 진주, 사각으로 세공한 다이아몬드가 우아하게 매달린 목걸이 끈도 세 겹의 진주였다.
과감한 네크라인 위의 피부는 진주보다도 더 화사한 진주빛이었다. 한 줌 밖에 안 될 허리와 대비되어, 막 핀 꽃처럼 풍성한 실루엣이 매혹적이었다.
클레이오는 저도 모르게 귓가를 붉힐 뻔 했다. 그는 디오네에게 문명인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하여, 무대에만 시선을 단단히 고정했다.
다행히도 공연은 곧 시작이었다.
객석에선 보이지 않는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석에선 오보에의 A음이 웅성거리는 소음 한가운데를 갈랐다.
이윽고 악기들이 시끄러운 조율을 끝내고, 단조의 서곡이 불길한 주제를 드러낸다.
클레이오는 감탄했다.
‘야아 이거 음알못이라도 알겠다. 세종대극장 3층에서 듣던 거랑은 천지차이네.’
오페라 공연 따위, 초대권으로 딱 두 번 본 게 평생의 경험 전부였다.
그러나 세계가 바뀌었어도 오페라의 내용은 대동소이 했다.
는 디오네가 사준 그대로 봉투도 안 뜯었지만, 오페라의 내용을 이해하는 덴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사나운 겨울만이 계속되는 북방의 고원, 얼음으로 지어진 듯 차가운 흰 성이 무대 배경으로 떠오른다.
천 년을 산 흡혈귀 군주와 제물로 보내진 젊은 처녀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 군주 아르셰니에는 오해와 싸움을 거쳐, 결국 루미니따의 진실한 사랑을 얻는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배우자로 맞으려 할 때, 루미니따의 오라비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성으로 온다.
그녀는 군주에게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저항하지만 오해로 엇갈리고, 결혼 예물을 얻기 위해 숲으로 갔다 돌아온 군주는 처녀가 그를 배신했다고 여긴다.
2막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밝혀졌다.
클레이오 왼편의 이시엘은 처음과 똑같은 얼굴로 새로 자릴 채운 관객이 없나 살피는 중이었다.
반면 오른편의 디오네는 뺨이 눈물로 젖어 손수건으로 꼭꼭 찍어 누르기 바빴다.
뭐, 오페라라는 게 당대엔 막장드라마인 법.
원작의 열렬한 팬이기까지 하니 디오네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레이디 디오네가 보시기엔 극이 어땠습니까? 괜찮았나 봅니다?”
“어떠냐니, 어떠냐니요! 상상 이상! 기대 이상이에요! 저기 객석 1층 오른쪽 끝 회색양복 보이죠? 저 사람 의 비평가 줄스 터너에요. 지금 안 운 척 하면서 뒤돌아 눈가를 문지르네요.”
“뭘 모르는 제가 봐도 굉장하더라니… 그렇군요.”
“미시즈 모르간의 대본도 천재적으로 원작을 표현하고 있지만, 뭣보다 아르셰니에 역 배우가 극을 한 차원 높여버렸잖아요. 심장이 돌덩이가 아니라면 감동을 받을 수밖에. 배신의 아리아 부를 때 기억나요? 제 가슴이 다 찢어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과연 주인공은 주인공이라, 그가 노래하기 시작하면 무대를 광풍으로 휩쓰는 것 같았다. 여주인공조차도 존재가 희미해졌다.
클레이오는 공연 팜플릿을 뒤집어 가수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는 왜 반가면을 쓰고 있는 겁니까? 루미니따도 합창 부르는 배우들도 아무도 그런 건 쓰고 있지 않은데요.”
처음엔 황당하기까지 했다. 남주인공이란 자가 모자에다 가면까지 쓰고 나왔으니.
‘노래 첫 소절을 시작하는 순간 가면이고 뭐고 눈에 안 들어오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공연자인데 이상하잖아.’
디오네는 부채를 착 접어 양 손으로 집고선, 가십을 논할 때 특유의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듣기로는 이마와 눈가를 다 얽은 화상이 있다고 해요. 그는 평민인데 정숙한 귀부인을 홀려 부정을 저지르다 그걸 발견한 남편이 불을 질러 다쳤단 소문이 돌거든요.”
“아… 네.”
‘이거 뭐. 오페라의 유령도 아니고 웬 화상에 가면이야.’
이전 원고에선 언급조차 없던 인물과 사건이다 보니 전개를 예측할 수 없는 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게하임은 애칭이고, 정식 이름은 게하임니스. 수도에선 듣기 어려운 북쪽 억양을 쓰죠. 추운 땅에서 태어났을 거라 전 추측해요.”
“추측이요? 레이디 디오네께서 내막을 모르는 인물도 다 있군요.”
“그게 말이죠, 기자와 호사가들이 그의 뒤를 집요하게 캐어 보는데 전적이 아무 것도 안 나오잖아요. 몇 달 전 홀연히 수도에 나타나 지난 한 시즌동안 천문학적 금액의 티켓을 팔아치운 신비의 사나이죠.”
그 때 이시엘이 클레이오를 툭툭 쳤다.
2층 박스석에서 무거운 보석을 걸고 있던 귀부인 몇몇이 자릴 뜨고 있었다. 그들은 파우더룸 대신 무대 뒤와 연결된 층계참에 모여들었다.
“저 사람들은 왜 저리 서둘러 자리를 비우는 건지 아나?”
“키시온 영애, 그건 말이죠, 대기실에 가서 주연 배우에게 인사를 하려는 거예요. 선물을 건네고, 운이 좋으면 감사 인사 이상의 것을 받기도 하는 거죠.”
그리고는 디오네는 한 눈을 찡긋 감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이시엘은 추가 설명을 바란다는 표정으로 눈만 두어 번 깜빡였다.
“레이디 말씀 좀 자제를….”
‘아니 인생이 FM인 열일곱 살 검사한테 연예계 스폰서 이야길 갑자기 들이밀면 어떡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하시기에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아하하. 다들 3막 시작 전엔 자리로 돌아올 테니 걱정 않아도 돼요.”
“확실한 목적이 있어 움직인 거라면 알겠습니다.”
이시엘은 아무런 동요 없이 원래의 탐색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이런 쪽의 눈치는 전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긴 하죠. 보통은 저 정도 되는 부인네들이 직접 움직이질 않는단 말이에요? 그것도 여러 명이 그 좁은 대기실에서 아웅다웅, 체면 안 살잖아요.”
“게하임이란 가수가 유독 매력이 있단 뜻이 되겠군요.”
“아이구, 도련님 눈치가 빨라서 좋아. 아까 마지막으로 일어난 사람은 크로프트 백작부인인데, 원랜 가수 따윈 후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요. 이번엔 원칙을 깬 거죠.”
“얼굴의 절반이 화상으로 얼크러졌다는 사내가 온 수도의 귀부인들을 사로잡았다니 놀랍군요.”
“하지만 도련님도 들었잖아요. 뚝뚝 끊기는 북쪽 억양조차도 저 사람의 노래로 들으면, 북해의 겨울바람 같이 차갑고도 매혹적이죠. 거기다 이번에 군주 아르셰니에 역을 맡았으니 인기가 얼마나 더 치솟을지!”
남자인 그로선 도통 감이 안 잡히는 이야기였지만, 저 가수와 흡혈귀 군주 역이 분위기상 아주 잘 맞는다는 건 이해했다.
뎅뎅, 뎅뎅
사환들이 돌아다니며 종을 울리고 인터미션이 끝났음을 알렸다.
어느새 극은 3막에 접어들었다.
무대 배경은 검은 숲으로 바뀌었다.
눈으로 뒤덮인 차가운 숲속에서, 맨발로 되돌아온 루미니따는 배신한 연인을 저주하는 군주의 절규를 듣는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절망한 남자에게 다가간다.
분노에 찬 군주는 스스로의 맹세를 어기고는, 자신을 껴안은 루미니따의 목덜미를 물려하는데….
“[내게 불멸을. 당신과 함께할 영원을 선사해 줘요.]”
루미니따는 흰 목덜미를 연인의 입술 쪽으로 기울인다. 군주는 후회에 젖어 연인을 놓아주려 한다.
“[불멸은 저주이오, 필멸이야말로 축복이니. 영원은 순간을 퇴색시키고, 불같던 사랑을 재로 만드오.]”
“[당신과 함께라면 퇴색조차도 눈부시고, 재조차도 달콤할 것.]”
불멸이 저주임을 아는 군주는 소녀를 놓아주려 하지만 그녀의 팔이 연인을 끌어당긴다.
그 순간만은 풍만한 체형을 가진 중년의 소프라노가 열일곱 살의 가련한 루미니따가 되었고, 젊은 테너는 천 년간 어둠을 다스린 군주가 된다.
목을 물린 루미니따는 축 늘어져 쓰러졌다가, 곧 활기 속에서 다시 일어난다.
그녀는 자신을 흡혈귀로 만든 군주의 품에 안겨 환희에 찬 아리아를 부른다.
군주와 그의 일족이 된 처녀가 부르는 2중창은 극의 절정부였다.
클레이오는 주변을 살펴야 한다는 의무조차 잊고 극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 순간,
할 일을 잊었던 클레이오를 책하듯, ‘약속’이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공용 스킬:‘매혹’] [―사용자의 특정 행위에 강력한 매력을 부 ‸□∞여 ◈‡‱다…]‘뭐지? 메시지가 깨져?!’
어그러진 메시지 아래에서 가수는 고개를 사납게 치켜들었다.
아리아의 마지막 구절을 엄청난 성량으로 토해낸 가수는, 숨조차 헐떡이지 않고 똑바로 서 클레이오를 노려봤다.
그 엄청난 열연에 완전히 얼어붙었던 객석은 한 박자 늦게 환호를 토해냈다.
“와아아아!”
“브라보!”
“휘유우우우우!”
가수는 갈채를 보내는 관객들에게 겸손히 인사했다. 어느새 메시지도 기묘한 적의도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지각」을 켠 클레이오는 분명히 목격했다.
‘저 가수! 한 순간이지만, 눈이 붉게 빛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