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the Main Character’s Little Sister RAW novel - Chapter (69)
외전 8. 피는 물보다 진하고
균열의 날 이후 탄생한 신규 직업 하면 사람들은 헌터와 균열 짐꾼을 꼽는다.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균열 짐꾼과 채집꾼의 입지는 태생부터 모호했다.
균열의 날 이후 먹고살기 위해, 균열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균열에 들어가면 각성 확률이 높아진다는 소문을 듣고.
갖가지 이유로 균열에 진입한 비각성자들이 균열 짐꾼과 채집꾼의 시초였다.
각성자가 먼저 짐꾼과 채집꾼을 고용한 게 아니라 짐꾼과 채집꾼이 각성자와 함께 균열에 진입한 것이다.
사실 각성자 입장에선 채집꾼이면 모를까 짐꾼을 고용할 필요가 없다.
모든 각성자는 시스템의 은혜인 인벤토리를 갖고 있다.
인벤토리는 수납한 물품을 수납 시의 상태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한다.
그런 인벤토리를 두고 굳이 사람을 쓰고 싶겠는가?
인벤토리가 꽉 차 짐을 넣을 수 없다 쳐도 그렇다.
어지간한 각성자는 비각성자보다 근력이 좋다. 각성자가 직접 짐을 들면 된다. 괜히 균열에 비각성자를 들여 보호해 줘야 하는 귀찮은 일을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균열 짐꾼은 사실 균열 채집꾼에 가까웠다.
채집꾼 대신 짐꾼이라는 명칭이 자리매김한 것은 판타지 소설 때문이다. 사람들은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짐꾼이라는 용어에 익숙했고 사실과 다르더라도 그냥 입에 익숙한 용어를 선호했다.
각성자가 짐꾼과 채집꾼을 고용한다는 세간의 인식도 실제와 다르다. 정부에서 균열을 할당받은 길드(또는 각성자 파티)에서 동행할 짐꾼의 수를 공지하면 거기에 응모하는 식이다.
당연히 모집 공고에 균열 정보는 미기재다. 짐꾼은 오직 길드 이름만 보고 사지로 지원해야 했다.
각성자는 짐꾼을 고를 수 있지만 짐꾼은 각성자를 고를 수 없다. 각성자 동행 없는 비각성자의 균열 진입이 불법이 되었기 때문에 각성자는 갑이고 갑님이고 갑신이셨다.
각성자 사이에서 블랙 리스트에 오르면 다시는 균열에 진입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여봐란듯이 각성자 갑질은 점점 심해졌다. 균열 부산물을 일괄 매수하는 것도 모자라 보호비를 걷기 시작한 길드도 있다니 말 다 했다.
태생부터 모호했던 균열 짐꾼의 근무 환경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으나 지원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계층 분리가 뚜렷해지는 균열 시대에 각성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이해기 또한 각성을 꿈꾸는 청년이었다.
집합 장소에 모여 출석 체크를 마친 이해기의 핸드폰으로 균열 진입 전 안내 사항과 균열에 대한 정보가 담긴 파일이 전송되었다.
파일을 열람한 짐꾼 몇이 신음했다.
“젠장, 또 미공략이야.”
균열 및 각성자 관리국에선 공략이 완료된 균열에만 짐꾼을 진입시키길 권고했다. 균열핵을 소지한 상태니 위험해지면 바로 균열을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권고일 뿐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준수하는 길드는 몇 없었다.
사계절이 권고 사항을 준수하는 대표적인 길드였다. 하지만 사계절은 이런 식으로 일용직 짐꾼을 모집하지 않았다.
“사계절 다음 공채 언제냐.”
“공채 없앤다더라. 추천제랑 경력직 수시 채용으로 바뀐다는 카더라가 있던데.”
“뭐? 진짜?”
짐꾼 세계에서 안전과 월급이 보장된 사계절은 꿈의 직장이었다.
짐꾼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실망하더니 홱 이해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짭니까?”
“저도 잘…….”
“동생이 사계절 다니잖아요. 뭐 들은 거 없어요?”
“제 동생은 일밖에 모르는 아이라서요. 그리고 제가 물어보지 않습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이해기는 개인사를 밝히지 않았지만 동생이 사계절에 다니는 연금술사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퍼졌다. 이해기의 포션 덕을 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몰랐던 짐꾼들의 눈에 질투가 퍼졌다.
각성이 곧 로또인 세계에서 각성자 가족, 하물며 대한민국 빅파이브에 드는 대형 길드 소속 각성자 가족은 안정의 증거였다.
“쉬불, 동류인 줄 알았더니 금수저 양반이었어?”
“진흙탕 구경하러 온 거야, 뭐야.”
“사계절이 뭐가 좋아, 게임에 미친 새끼들이지.”
“와, 누군 평생 일해도 포션 구경할까 말까인데 누구는 동생 잘 둬서 포션을 물처럼 마시네.”
이해기가 동생에게 받는 포션은 품질 규정을 통과하지 못한 등급 미달 포션이다. 그나마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썼지 스스로를 위해 쓴 적은 없다.
그리고 동생이 연금술사라고 금수저라니. 뭘 모르는 소리다.
‘진짜 금수저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이해기는 균열 진입 전 장비를 점검하는 신라 길드 공략대를 응시했다.
무리의 정중앙에서 길드원에게 둘러싸인 헌터야말로 진정한 금수저였다. 대기업 퓨처사의 로열패밀리로, 그가 각성했기 때문에 퓨처는 신라 길드에 투자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균열 산업에 뛰어들었다.
균열의 날 이전에나 이후에나 수저 재질을 유지한 부러운 사례였다.
‘나도 나름 은수저는 되었었는데.’
이해기는 그리운 과거를 회상하며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무시했다.
할 일이 없어 가방 가슴 끈만 고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이해기를 두둔했다.
“쌉소리 말고 장비나 정리해. 저 형씨 경력이 너희보다 기니까.”
“도훈 형님.”
모인 짐꾼 중 최고참인 왕도훈이 이해기의 등을 두드렸다.
“이 형씨가 사람이 진국이라니까.”
“하하하.”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이 직업이 돈은 좀 만지는 거 같아도 사람 죽어 나가는 거 보면 멘탈 나가서 꾸준히 오래 하는 사람이 드물거든. 근데 이 형씨는 쉬는 걸 못 봤어. 내가 짐꾼이 보통 일이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고 물었더니 뭐라 대답했는지 알아?”
“뭐랬는데요?”
“아, 형님. 민망하니까 그만하시고.”
이해기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왕도훈은 재차 이해기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빨리 각성해서 동생 호강시켜 주고 싶대.”
과거 전 국민의 꿈이 흰쌀밥에 고깃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면 균열 세대의 꿈은 각성해서 S급 헌터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동생이 연금술사에 사계절 다니는 거 다 아는데 호강시켜 주고 싶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말은 곱지 않았지만 이해기를 질투하던 짐꾼들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이 시대 청춘들의 보편적인 꿈에 공감하는 것도 잠시였다.
“푸하하!”
대놓고 비웃음이 들렸다. 짐꾼이 아닌 신라 길드원이 모인 방향이었다.
이해기는 비웃음이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면 시비 걸릴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각성은 아무나 하는 건 줄 아나?”
신라 길드 소속 헌터 몇이 이해기와 짐꾼을 비웃었다.
“지들이 각성할 거라고 생각하나 봐.”
“각성해서 갑질하는 헌터들 혼내주는 생각? 어림도 없지.”
“왜, 망상은 자유잖아. 내버려 둬. 지금 직업이 짐꾼이니까 자기들이 소설 주인공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지.”
“짐꾼인 내가 각성하니 S급 헌터! 나도 그런 거 많이 봤어. 마음 알지. 응, 알지.”
짐꾼을 비웃은 헌터 중 한 명이 다가왔다.
평소 짐꾼 사이에서 악명 높은 C급 헌터였다. 이름 말하기도 재수 없다고 다들 ‘그 새끼’나 ‘저 새끼’로 불렀다.
‘그 새끼’의 접근에 이해기를 포함한 짐꾼들은 긴장했다.
“어차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하루살이 하류 인생들이라 불쌍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지금 헌터들 균열 진입 앞두고 긴장한 거 안 보입니까? 댁들은 우리 보호받아 가며 바닥 기면서 풀이나 뜯으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목숨 걸고 몬스터와 싸워야 한다고. 전투 앞두고 명상하며 마음 가다듬고 있는데 옆에서 똥파리가 앵앵거리면 얼마나 신경 쓰여. 안 그래요?”
똥파리 소리에 신라 길드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짐꾼들이 얼굴을 붉혔다. 이해기도 얼굴이 화끈해지는데 이름이 불렸다.
“특히 이해기 씨.”
“네.”
“이상하게 이해기 씨만 끼면 짐꾼 물이 흐려지던데 조심 좀 합시다. 동생이 각성자에 사계절 다니는 거지 이해기 씨가 각성해서 사계절 다니는 게 아니잖습니까?”
“죄송합니다.”
“동생 팔아먹지 맙시다. 이해기 씨가 주인공이 되어야지. 응?”
‘그 새끼’는 이해기의 이마를 검지로 쿡쿡 찌른 뒤 침을 뱉고 떠났다.
“…….”
서로 정보와 근황을 교환하던 짐꾼 무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괜찮냐? 저 새낀 왜 너만 보면 지랄인지 모르겠다.]왕도훈이 문자로 이해기를 위로했다.
이해기는 쓴웃음을 짓고 더러운 기분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동생을 걸고넘어지는 건 참기 힘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참기 쉬웠다. 이상하게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운수 좋은 날 엔딩은 아니겠지?’
“짐꾼 집합!”
헌터들이 진입한 후 짐꾼 차례가 되었다.
이해기는 전투화 끈을 꽉 조인 후 천천히 발을 옮겼다.
언젠가 각성할 날이 올 것인가. 언젠가 정말 소설 속 주인공처럼 각성하여 이 일을 때려치우고 갑질하는 헌터들에게 웃어줄 날이 올까. 죽지 않았는데 죽은 것처럼 일하는 동생을 호강시켜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실종된 형과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어느새 균열이 지척이었다. 한 발짝만 넘어가면 그곳은 다른 세상이다.
어째서일까. 평소보다 흥분되었다. 이해기는 복잡한 속내를 떨쳐내고 딱 한 가지만 생각했다.
“꼭 돌아와야 해.”
눈물을 잊은 동생의 말을 떠올리자 각오가 섰다.
각성하지 못해도 좋다. 반드시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에게 살아 돌아갈 것이다.
귀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니 흥분됐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이해기는 균열로 진입했다.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핫, 어쩐지 느낌이 좋더라니.”
운수 좋은 날 엔딩이었다.
피를 흘리며 자조하는 이해기의 머리로 가래침이 떨어졌다.
“짐꾼 주제에 나대더니 꼴좋다.”
이해기는 나댄 적 없지만 ‘그 새끼’는 이해기가 나댔다고 믿는 듯했다. 부상자를 버리지 않고 부축하겠다는 주장이 나댄 것이라면 할 말은 없었다.
“끄윽!”
‘그 새끼’는 이해기의 어깨를 꿰뚫은 검에 힘을 실었다.
이해기는 검에 꿰인 채 벽에 꽂혀 꿈틀거렸다.
분명 시작은 괜찮았다. 진입한 균열은 필드형이었고 초원 지형이었다.
도련님을 모시고 온 공략이라 그런지 균열 등급보다 헌터 수준이 높았다.
헌터는 헌터대로, 채집꾼은 채집꾼대로 무난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이해기가 던전 입구를 발견했다.
그때까지 자신의 ‘좋은 느낌’을 믿고 있던 이해기는 당황했다. 용 다섯 마리가 여의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로또 사기 전에 먹은 RTA 라면에서 다시마 다섯 장이 나온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던전 입구를 발견했으니 포상금이 나오겠지만 각성하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운수 좋을 거라던 느낌을 던전 입구 발견으로 끝내자니 많이 아까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생은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이해기는 곧 현실에 수긍하고 헌터에게 던전 입구를 보고했다.
신라는 임전무퇴가 원칙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도련님 업적 만들어주기 때문인지 던전 공략을 강행했다.
짐꾼들은 반대했지만 균열 공략에서 짐꾼의 의견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헌터에게 보호받지 않으면 균열 출구로 나갈 수 없다. 짐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던전 입구에 남았다. 입구에 남지 않고 던전에 진입한 짐꾼도 있었다.
이해기와 왕도훈 같은 고참 짐꾼 몇이 채집꾼 명목으로 던전에 함께 진입했다.
던전의 이름은 .
입구에 있는 긴 계단을 내려가자 정사각형 방이 줄지어 있는 일직선 구조가 보였다. ‘무덤’이란 이름 때문에 다들 언데드 몬스터의 등장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언데드 몬스터는 출몰하지 않았다.
의 주요 출몰 몬스터는 골렘이었다. 파충류를 닮은 골렘이 직립보행하며 침입자를 공격했다.
골렘의 핵이 되는 마석은 여봐란듯이 이마 정중앙에서 빛났다.
신라 길드의 헌터들은 핵을 공격해 골렘을 무력화하고는 즐겁게 웃었다.
“와, 여기 노다진데. 이거 다 마석이야.”
“노다지는 아니야. 이렇게 흠집나면 제 가격 못 받아. 핵을 건드리지 않고 무력화한 다음 뽑아야지.”
헌터들이 마석에 홀려 있는 동안 이해기는 헌터와 골렘의 전투를 복기했다.
한 대 맞으면 사망할 만한 골렘의 공격을 쉽게 피하거나 흘려보내고 반격하는 헌터들. 화려하고 현란하면서 파괴적인 그들의 스킬이 이해기를 매료했다. 인성은 존경할 수 없지만 그들의 실력은 부러웠다.
헌터와 짐꾼은 큰 피해 없이 1층의 끝에 도달했다. 1층은 별생각 없이 진행했으나 2층부턴 다르다.
이해기를 유독 미워하는 ‘그 새끼’가 이해기를 지목했다.
“너. 내려갔다 와봐.”
“전 짐꾼입니다.”
“헌터 지망생이잖아. 계단 내려갔다 오는 것 정돈 할 줄 알아야지. 계단 기어 내려가 아래에 뭐 있는지 보고 오는 것도 무서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대화나 항의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기에 이해기는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조심스럽게 아랫단을 디디며 몬스터가 등장하면 뛰어 올라갈 생각만 했다.
다행히 2층의 첫 번째 방엔 몬스터가 없었다. 좌우로 석상이 있어 잠깐 놀랐지만 골렘이 아닌 평범한 석상이었다.
좌우 석상의 대칭이 살짝 안 맞는 듯해서 이해기는 눈여겨보았다.
석실엔 1층처럼 다음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보였다. 1층과 다른 점이라면 통로가 하나였던 1층과 다르게 세 방향 전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턴 길이 꼬이겠는데.’
빈방이지만 혹 다른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
이해기는 꼼꼼히 방을 살핀 후 1층으로 돌아갔다. 본 것을 보고하니 보상 대신 조소가 뒤따랐다.
“첫 번째 방에 아무것도 없으면 다음 방에 뭐가 있는지라도 보고 와야 할 것 아냐. 이래서 하류 인생은. 그리고 석상 위치가 좌우 대칭이어야 한단 법이 있어? 왜? 위치 맞추면 히든 피스라도 나올 것 같아서?”
이해기는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말로 ‘저 새끼’가 여기서 이해기를 포함한 짐꾼을 살해해도 헌터들끼리 몬스터에게 당했다고 입을 맞추면 끝이다.
이해기는 돌아가지 못할 테고 동생은 영영 혼자 남게 되겠지. 시체나 다름없는 가족을 지키며.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 새끼’는 그런 이해기를 보고 다시 시비 걸었다.
“꼽냐? 꼬우면 덤비든가.”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쪼는 것 봐! 겁쟁이 새끼.”
괜찮았던 시작에 순탄했던 과정.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양아치 짓에 갑질이 심하긴 해도 신라는 대형 길드였다. 헌터들은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2층부터 갈림길이면 계단 근처만 둘러보자. 던전은 일반 균열과 다르니까 재정비하고 와야 돼.”
“석상 좌우 대칭 다른 것도 신경 쓰여. 던전 생겨 먹은 게 함정 많아 보이니까 관련 스킬 있는 사람 데려오자고.”
“던전 이름이 무덤이니 보스가 언데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용종 몬스터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으니 대비하죠.”
예상치 못한 던전 진입에 불안해하던 짐꾼들은 조금만 더 둘러보고 빠져나간단 소리에 안도했다.
2층의 첫 번째 방을 지나 정면에 있는 두 번째 방에 진입했을 때 방이 흔들렸다. 눈치 빠른 헌터가 외쳤다.
“던전이 움직인다! 빨리 올라가!”
끝에서부터 벽이 밀려와 통로가 막혔다.
벽이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방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이해기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 없이 정신없이 뛰었다.
헌터들은 이미 저만치 앞에서 계단으로 올라갔고 짐꾼들만 뒤처져 숨을 헐떡였다.
“으악!”
이해기의 뒤에서 잘 뛰던 왕도훈이 계단에서 넘어졌다. 이해기는 손을 내밀어 그가 빨리 일어서도록 도왔다. 왕도훈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계단을 뛰어오르려다가 재차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으윽!”
왕도훈이 급히 뛰다 발을 삔 듯했다.
“아파도 어쩔 수 없어요! 저 붙잡고 빨리 가요!”
이해기가 그렇게 말해도 왕도훈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이해기는 그를 부축하고 계단을 올랐다.
“이해기 씨 뭐 하는 거야! 그 새낀 버리고 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계단만 오르면 괜찮…….”
1층으로 올라온 이해기는 울컥하여 처음으로 소리쳤다.
던전 출구가 멀지 않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부상자를 버리고 오라니. 이해기의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이해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평지였던 1층의 통로가 전부 계단이 되어 그를 맞이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계단 각 칸의 높이가 점점 높아졌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계단이 아닌 벽이 그를 가로막을 것이다.
기가 질렸지만 이해기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몬스터는 오는 중에 정리했고 통로가 계단이 되었을 뿐 방의 위치는 일직선 그대로다. 헌터들은 근력이 좋으니 그들이 도와주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필 후미에 남은 게 ‘그 새끼’였다.
이해기는 부탁하기 전에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긴 하지만 뒤처진 짐꾼들 살피려고 후열에 남았잖아. 도와줄 거야.’
왕도훈을 고쳐서 부축하는데 신음하던 왕도훈이 이해기에게 속삭였다.
“형씨, 그냥 혼자 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고작해야 발 삔 거 갖고…….”
이해기는 그제야 고개를 숙여 왕도훈의 다리를 살폈다.
순간 이해기는 전신의 피가 식었다. 계단에서 넘어져 발을 삐었다고 생각한 왕도훈의 다리에 피가 흥건했다.
이해기의 머릿속에서 짐꾼들 사이에 떠도는 괴담이 떠올랐다. 헌터 중엔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액땜한답시고 짐꾼을 제물로 바치는 헌터가 있다고.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이해기는 질색했다.
설마요. 헌터도 같은 사람인데 그러겠어요. 너무 흉측한 괴담인데요.
“그냥 처오라니까 말을 안 들어.”
“사람으로 안 보니까.”
하루살이나 똥파리에 불과하니 고작 이런 일에도 제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과 함께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이해기는 왕도훈과 엉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던전이 움직이는 와중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니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현기증과 통증을 호소하는 몸에 새로운 고통이 추가되었다.
이해기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불에 덴 듯한 통증에 간신히 눈을 떴다.
‘그 새끼’의 검이 그의 몸을 관통해 벽에 박혀 있었다.
“새끼가, 꼴 보기 싫어도 동생이 사계절 다닌대서 살려주려고 했더니 꼭 말을 안 들어서 일을 키워.”
‘그 새끼’가 이해기의 복부를 걷어찼다. 내장이 진탕되는 느낌에 속이 뒤집혔다.
이해기는 기침하면서 피를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