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248
무엇을 보더라도 절대로 시로네를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향한 나쁜 마음일지라도.
“여기는……?”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적나라한 감정이 아닌 카테고리별로 정리되어 있는 역사의 흐름이었다.
일전에 시로네가 말했던 지식의 척추.
얘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막연한 도식만을 상상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로 대단한 작업을 성공시킨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5단계에 지식의 척추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하나의 정보도 허투루 다루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습득한 모든 정보들의 인과관계를 연결시키지 않으면 이해는 불가능했다.
시로네는 그것을 해냈다.
그가 마법학교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따라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르민은 얼마 전에 머물렀던 아리우스처럼 단박에 특성을 파악했다.
책장에 꽂힌 정보들의 카테고리는 어떤 항목을 살펴도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구분되어 있었다.
‘대체 이 아이는…….’
무엇보다 이곳은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평생을 살아도 결코 망각하지 않는 정보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원천 지식이라 부른다.
시로네는 지식의 척추를 원천 지식의 상태까지 끌어내린 것이었다.
속으로 감탄사를 되풀이하며 서고를 돌아다니던 아르민은 엉망진창으로 부서진 구간을 발견했다.
책들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 책장도 파괴되어 있었다.
“그들이 왔다 간 모양이군요.”
처참하게 박살 난 책장을 발견한 에이미는 속이 상했다. 시로네가 어떤 심정으로 지식의 척추를 완성시켰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들에 대한 원망감이 밀려들었다.
“나쁜 자식들. 이게 어떤 건데…….”
에이미는 바닥에 흩날린 종이들을 긁어모으며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지온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잠시 기다리세요.”
아르민이 말렸다.
허물어진 책장이 마치 생물이 상처를 복구하듯 재생되고 있었다.
에이미는 놀란 표정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보통의 경우 불가능하죠. 하지만 상호 보완적 지식 기반은 네트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경로를 차단해도 곧바로 우회하여 새로운 경로를 설정하죠. 조만간 지식의 척추는 예전과 같은 상태로 복구될 것입니다.”
레이나가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부쉈을까요? 아리우스라면 알고 있었을 텐데요. 전문가잖아요.”
“전문가니까 그런 겁니다.”
레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아르민의 설명은 거기서 끝이었다. 조만간 맞불을 상황에서 적을 칭찬해 봤자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온이 부쉈고 아리우스가 말렸다.
그 상황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도굴꾼으로 비하되지만 지적 자부심이 강한 인물. 시로네의 무의식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게 분명하다.
마치 침략자가 타국의 유물을 훼손시키고 싶어 하지 않은 것처럼.
심연의 비밀 (2)
“그나저나 이건 정말이지 놀랍군요.”
시로네는 무의식을 완벽하게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솔직히 놀랍다는 말을 넘어서 인간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르민 일행은 입구 쪽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몸을 돌렸다. 전보다 안색이 어두워진 시로네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걸어왔다.
“조금 괜찮아졌어요. 빨리 내려가죠.”
에이미가 눈물을 닦으며 시로네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내가 부축해 줄게.”
“저리 가. 너에게 도움 받고 싶지 않아.”
“그래도 일단 가야 하잖아. 이리 와.”
에이미는 강한 반발에도 개의치 않고 시로네를 부축했다.
시로네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레이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이었구나.’
처음에는 어떻게 서로의 감정을 외면하며 친구로 지낼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감정을 초월한 강력한 신뢰로 맞물려 있었다.
‘나는…… 절대로 저 자리에 들어갈 수 없겠지.’
“대단한 소녀군요.”
아르민이 레이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생각에도 에이미는 잘 버티고 있었다.
화신의 적개심은 순수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신뢰도가 100퍼센트다. 그럼에도 시로네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보통의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레이나의 입가에 비로소 홀가분한 웃음꽃이 피었다.
“1년이나 참을 정도니까요.”
***
시로네의 정신 3단계.
혹한의 세계였다.
피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가 몰아치는 가운데 시로네 일행은 어깨를 움츠리고 얼어붙은 바다를 건넜다.
태양은 없었지만 지면이 달빛을 반사시켜 앞을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막막한 어둠뿐이었다.
에이미는 북극의 밤이 이럴 것이라 상상했다.
너무나 차갑고 쓸쓸해서, 한편으로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혹한의 잠자리.
극단적으로 짧은 가시거리에서 가끔씩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사람의 키만 한 크리스털이었다.
저마다 색상이 달랐고 무성 생물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사랑. 우정. 욕망.”
아르민이 말했다.
“아마도 그런 원천 감정이 담긴 보석일 겁니다. 우리가 직접 접근하지 않는 한 열람은 불가능하겠죠. 무의식을 마치 의식처럼 다루고 있어요.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에이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면의 감정을 접하지 않았으니 시로네를 다시 만나더라도 민망하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이곳에서 살아 나갔을 때의 얘기겠지만.
심층으로 내려가고 있지만 아르민은 시로네를 더욱 모르게 된 기분이었다.
3단계만 놓고 봐도 내면의 모든 것들을 스스로 정립하여 정의를 내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풍경이었다.
‘이 아이의 통찰력은 얼마나 깊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크리스털의 빛들이 하나씩 꺼져 가기 시작했다. 시로네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초췌해졌다.
에이미는 시로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보여 주기 싫을 테니까.
그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화신의 무게는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가벼워져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 줘, 시로네…….’
시로네는 한 걸음을 옮기기 힘든 와중에도 눈에 힘을 주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불이 켜져 있는 작은 오두막집이 나왔다.
“저곳이군요. 심층 2단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르민이 얼어붙은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설명했다.
“저희는 최단 거리로 정신세계를 관통한 셈입니다. 지금쯤이면 아리우스를 따라잡았을지도 모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세요.”
전투태세를 갖추라는 얘기였다.
에이미는 그때부터 수열식으로 정신을 예열했다.
레이나도 추위에 서리가 낀 화살을 꺼내 들고 시위에 얹은 채로 문 옆에 등을 기댔다.
아르민이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 오두막 내부를 살폈다. 조너는 아니지만 시각적 방향성이 없는 광안은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빠르게 전방위를 살필 수 있었다.
다음으로 레이나가 튕기듯 몸을 돌려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활을 겨눈 자세로 아르민을 따라가며 사방을 엄호했으나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르민이 깨끗하다는 신호를 보내자 에이미가 시로네를 데리고 들어왔다.
혹한의 바람에 시달려 퍼렇게 질린 피부가 오두막의 온기에 녹아내렸다.
문을 닫자 귀곡성 같은 바람 소리가 종적 없이 사라졌다.
“저, 저곳으로…….”
시로네는 떨리는 손으로 거실 소파를 가리켰다.
에이미가 데려다주자 그는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소파 위에 쓰러졌다.
“조금만…… 쉬고 싶어요.”
“그게 좋겠군요.”
시로네의 상태를 살펴보던 아르민이 동의했다.
그러자 레이나가 악역을 자처하며 말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이곳에 아리우스가 없다는 건 이미 1단계로 내려갔다는 거잖아요.”
“아타락시아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추출에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설령 아리우스를 막는다고 해도 이곳에 무언가를 각인시키지 못하면 시로네는 죽습니다.”
“아…….”
레이나는 현실의 상황을 떠올렸다.
제노거의 강선이 시로네의 목을 자르고 있다.
심층의 막바지까지 다다른 지금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였다.
“1단계는 시로네의 가장 먼 기억입니다. 모태 의식이라고 하죠. 자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명확한 개념을 심기가 불가능해요.”
“결국 이곳이 시로네의 보물 창고란 얘기군요.”
레이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로네가 선택한 소중한 장소는 아늑한 자신의 집이었다. 그가 얼마나 가족의 온정을 느끼며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에이미는 마른 장작을 벽난로에 집어넣고 이그나이트를 시전했다.
빌어먹을 이그나이트.
속으로 생각한 그녀는 양손을 내밀어 불의 온기를 느껴 보다가 일행에게 몸을 돌렸다.
“방법도 문제지만, 어디에 기록해야 하는 거죠?”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본 바에 의하면 책의 형태가 아닐까 싶은데요. 일단 서고로 들어가 보죠.”
세 사람은 서고로 발길을 옮겼다.
시로네의 전 인생에 걸친 사유가 책의 형태로 분류되어 있었다.
사람의 이름이 제목인 책도 있었다.
빈센트, 올리나는 물론 레이나와 아르민도 빠짐없이 꽂혀 있었다.
마법학교 학생들의 이름을 훑어보던 에이미는 한 권의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카르미스 에이미.
붉은 커버의 책이었다.
저 책에 모든 게 담겨 있다.
시로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에이미는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꺼내 들고 가죽 질감의 하드커버를 쓰다듬었다.
아르민과 레이나가 뒤에서 지켜보았다.
“말리지 않을게, 에이미. 네가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에이미 양은 여기까지 시로네를 잘 이끌었어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레이나는 의외라는 듯 아르민을 돌아보았다.
자신이야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나쁜 짓이라는 걸 알고도 허락했지만 아르민까지 승낙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확률이라는 건가?’
아르민은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시로네를 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면 에이미에게는 지금이 시로네와 함께하는 마지막 추억이 된다. 최소한 그의 마음 정도는 알고 작별을 맞이하라는 아르민의 배려였다.
“아뇨. 그러지 않을래요.”
에이미는 책의 커버만 살펴보고는 다시 책장에 꽂았다.
아직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로네는 반드시 살아날 테니까. 앞으로도 자신과 경쟁하며 마법사가 될 테니까.
“여기에는 시로네에게 무언가를 각인시킬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다른 곳으로 가 보죠.”
에이미가 미련 없이 서재를 나가자 아르민과 레이나는 서로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에이미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로네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이제는 초탈의 경지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마음껏 미워해라. 현실로 돌아가면 아주 신명 나게 두들겨 패 줄 테니까.”
“나는 너 싫어. 정말이야.”
“흥! 그러든지 말든지. 나도 너 싫거든? 메롱!”
에이미가 혀를 내미는 순간 시로네가 기침을 했다.
한 모금의 피가 울컥 토해져 나오자 얼굴이 창백해진 에이미가 달려갔다.
“시로네! 괜찮아?”
정신세계가 붕괴되는 와중에도 눈빛만은 또렷했던 그이지만 지금은 초점이 풀려 있었다.
화신은 더 이상 무게를 느낄 수도 없을 만큼 가벼웠다.
시로네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애써 치켜들며 말했다.
“왜……. 네가…… 밉다고…….”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정신 좀 차려 봐.”
“……싫어.”
시로네가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다른 사람과 춤추는 게…… 싫어.”
에이미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목숨을 구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지온과 춤을 췄다는 이유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그건 있잖아, 시로네…….”
불가항력의 사건이었다.
아니, 정말로 그럴까?
시로네의 불만에 나는 온전히 떳떳한가?
“멍청아, 그런 거 아니야.”
에이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시로네가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선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나는…… 나는…….”
시로네가 희미해진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도망……쳐. 모두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 나는 더 이상……. 모두 죽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