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365
플루가 되묻자 시로네가 말했다.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군.”
이카사도 더 이상은 감추지 않았다.
“맞아. 구속력으로 봤을 때 최소한 8시간에 준하는 동력이 대가로 지불된다. 즉, 이걸 파괴하면 나는 8시간 동안 행동 불능 상태가 된다는 거야.”
“8시간…….”
산 하나를 무너뜨리는 데에도 30분이 걸리지 않았던 이카사가 8시간의 노동력을 지불해야 하는 정도의 구속력.
물리력이 아닌 율법의 안티테제이기에 가능한 결과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생물체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시로네는 이카사가 주저한 이유를 깨달았다.
“반드시 너를 구해 줄게. 그러니 우리를 풀어 줘.”
“흥, 인간의 말 따위, 내가 믿을 것 같아?”
“믿어야 해. 이대로 있어 봤자 모두 죽어.”
이카사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나라면 모를까, 너희가 나가 봤자 뭐가 달라지지? 이 생물체는 1~2개가 아닐 거야. 어차피 또 붙잡혀서 다시 이곳에 오게 될 뿐이라고.”
“그건 나에게 생각이 있어.”
플루가 말했다.
“지하 실험실에 가라스가 붙잡혀 있어. 그걸 이곳에 풀어 버리는 거지. 놈들에게 이곳은 꽃밭이나 다름없을 테니.”
“흐음.”
이카사는 신중히 생각에 잠겼다.
번식의 왕 가라스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최악의 생물체였다.
‘가라스로 이 박요종을 제거한다? 하긴, 풀려나기만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카사.”
심적초월을 통해 몸을 일으킨 시로네가 느릿하게 다가와 이카사와 눈을 마주쳤다.
“반드시 구하러 올게. 우리를 풀어 줘.”
인간의 생에 대한 욕망은 참으로 집요하다.
앙케 라가 인간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고, 그것으로 인해 이카사는 타락천사가 되고 말았다.
“흥, 하루살이 인간과 비교하지 마라.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아. 조금 짜증 날 뿐이지.”
“하지만 너에게도…….”
이카사가 시로네의 말을 잘랐다.
“가. 보내 주마.”
시로네가 놀란 표정을 짓자 이카사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널 위해서가 아니야. 방법이 없기도 하고, 천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저 여자가 망하는 꼴을 봐야 속이 풀릴 것 같으니.”
“꼭 돌아와서 구해 줄게. 기다려.”
이카사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성광체가 확장되면서 발할라 액션의 전지가 광륜에 집적되기 시작했다.
‘구속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
발할라의 연산이 내놓은 결론은 9시간 43초.
이카사가 화신의 힘으로 아카마이를 파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역시 평천사급은 붙잡기 힘들겠군.’
타락천사가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그녀 나름의 위안이었다.
‘인간 따위에게 기대는 날이 오다니.’
크게 숨을 들이마시던 이카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발할라 액션!
“키이이이이이!”
진眞아카마이가 몸으로 괴성을 내질렀다.
거대한 초점이 빛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물컹한 몸체가 말라비틀어졌다.
대보름의 날 (4)
달빛에 반사되는 금속 천사의 매끈한 육체는 생물의 아름다움을 본뜬 것이지만 세인 일행은 아름다움 속에 감추어진 무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바벨은 아름다웠다.
다만 시리도록 차가웠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뼈마디가 얼어 버릴 만큼.
세인의 철륜안이 세찬 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연산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이걸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이건?’
강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아우라는 없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강자를 상대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초냉정의 견고함이 느껴졌다.
-타깃 설정 : 우선순위 없음.
-랜덤 타깃 알고리즘 가동.
바벨의 시각 렌즈가 레나를 포착했다.
붉은 패널에 감추어진 초점은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오직 한 사람, 레나의 아버지 위쳐는 몸을 날렸다.
“위험해!”
카냐와 레나 중에서 레나를 고른 것은 극단적인 부성애가 만들어 낸 초능력일까?
선택은 정확했고, 레나를 떠민 위쳐의 몸이 덜컥 멈췄다.
어느새 다가온 바벨이 차가운 손으로 위쳐의 가슴을 꿰뚫은 상태였다.
“아, 아빠?”
레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신이 미치기 직전의 영역에 걸쳐 간당간당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아아아아!”
카냐가 분노에 눈이 멀어 바벨에게 뛰어들었다.
-적 접근 감지.
-대응 타입 : 즉살.
바벨이 잔상조차 없이 사라지자 의지할 곳 없는 위쳐의 시체가 쓰러졌다.
초고속이 만드는 극심한 상대성으로 카냐의 뇌는 들어오는 풍경을 순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위쳐가 먼저 쓰러지고 눈앞에 바벨이 나타난 것과 같은 착각 속에서 오직 하나만이 명확했다.
‘죽는구나.’
끼이이이이!
바벨의 수도가 시린 소리를 내며 카냐의 목 앞에 멈췄다.
어깨 너머로 세인이 철륜안을 날카롭게 회전시키며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위쳐의 죽음으로 계산할 수 있었던 한 번의 이퀄리브리엄.
하지만 바벨은 성광체를 확장시켜 복잡하게 얽힌 톱니바퀴의 연산을 해체했다.
‘그럴 수가?’
이퀄리브리엄은 이성 계수와 감정 계수를 동시에 연산하는 최강의 군중 제어기.
그런 개인화된 코드를 1초도 걸리지 않아 해체했다는 것은, 설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 순간 학습했음을 뜻했다.
‘직관은 아니다. 확률적 알고리즘인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무작위로 난수를 반복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
세인이 아무리 서번트라도 연산 속도에서는 바벨의 능력이 까마득히 초월한다고 봐야 했다.
“물러서.”
세인이 짧게 말했다.
“아, 아빠가……!”
“어서!”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이러고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죽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카냐는 아직 지킬 게 남아 있었고,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고 레나에게 달려갔다.
“레나! 이쪽으로 와!”
반쯤 넋이 나간 레나를 힘으로 들쳐 업고 도망치는 동안에도 바벨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녀의 시각 렌즈는 오직 세인에게 집중된 채로 일거수일투족을 분석하고 있었다.
-대상 : 인간. 정확도 99.8퍼센트.
-타입 : 프로그래머.
-결과 : 최고 레벨 위험 요소. 우선순위 알고리즘 적용. 제1순위 제거 대상.
바벨의 몸이 세인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연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개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인지하며 노려보았다.
“비상! 전원 전투준비!”
격납고로 달려가는 크루드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
클론 배양실.
레이시스가 보낸 측근 2명은 물이 담긴 통을 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일화의 술에 필요한 재료가 갖추어졌으니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이제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레이시스가 제안한 방법은 산성독왕 무우사의 사체를 물에 담그는 것.
거기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산성 가스를 들이마시면 어떤 생물체든 폐가 녹아 10초 안에 즉사할 것이다.
일을 치르고 나오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있지만 막상 시작하자니 숨이 가쁜 기분이었다.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끝장이야. 빨리 처리하자고.”
“쩝, 근데 조금 찝찝하네. 아무리 클론이라도.”
“헛소리하고 있네. 그새 정이라도 들었냐? 어차피 가축이야. 빨리 처리하자고.”
철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빠져나왔다.
배양실이라고 해 봤자 그저 넓은 평수의 방일 뿐이었고 클론들은 찾아올 죽음을 모른 채 제 할 일에만 몰두 중이었다.
중앙에 물통을 놓은 남자는 무우사의 사체를 꺼냈다. 풍 하고 고깃덩어리가 빠지자 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가자, 빨리.”
옷깃으로 코와 입을 가린 두 사람이 출구를 향해 뛰었다. 물통에서 모락모락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이카사의 도움으로 철창에서 빠져나온 시로네와 플루는 사령부의 지하 복도를 내달렸다.
모두가 일화의 술에 집중하고 있기에 돌아다니는 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정보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구속되어 있는 덕분이기도 했다.
“대원들은 제거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아카마이야. 봉마진에 걸린 마족 꼴이 되는 거라고.”
“레이시스가 눈치채기 전에는 괜찮을 거예요. 최대한 빨리 가죠. 가라스는 어디 있죠?”
“유전학 연구실에 안내 맵이 걸려 있는 걸 봤어. 일단 거기로 가자.”
플루는 기억을 더듬어 유전학 연구실로 들어갔다.
플루가 벽에 걸린 맵을 해독하는 동안 시로네는 연구실 책상에 놓인 서류를 들었다.
울티마 시스템을 장착한 덕분에 문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호가 단일 코드로 변환되어 전해져 왔다.
클론의 정보가 담긴 실험 보고서였다.
자신의 복제 또한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기에 시로네는 주의 깊게 살폈으나 결국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짓을…… 인간을 뭐로 아는 거야?”
시로네, 플루, 가라스의 삼각 메커니즘을 통해서 클론을 대량생산하는 추악한 과정이 적혀 있었다.
한두 장을 빠르게 넘기던 손길이 다시 움찔 멈췄다.
울티마 시스템으로 천천히 읽어 가던 눈동자가 충격에 흔들렸다.
“저기, 선배님. 혹시 이 파일 읽어 보셨어요? 클론 배양 연구 자료.”
플루는 머리가 아픈 듯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거대한 맵을 살피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선배님.”
“……아니. 필요한 것만 조사했어. 이거, 드론의 해독 속도가 너무 느리네.”
시로네는 긴 탄식을 내뱉었다.
서류에서 본 내용을 전하고 싶지만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그래도 말을 해야 할 텐데.’
“찾았다. 모르모트 격리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이야.”
플루는 급하게 실험실을 나섰다.
언제 레이시스가 도주를 알아차릴지 모르니 시간은 아무리 아껴 써도 부족했다.
시로네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는 법이니까.
플루를 따라 도착한 곳은 천장까지 솟은 철문 앞이었다.
큐브릭에서 피닉스를 꺼낸 그녀가 화염 마법을 시전하자 잠금장치가 벌겋게 달구어지더니 쇳물로 녹아내렸다.
양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당기자 굉굉한 소리를 내며 기상천외한 광경이 그들을 반겼다.
“세상에…….”
마치 대홍수 신화에서 나오는 방주처럼 온갖 생물들이 14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에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격리실의 끝으로 걸어가자 유일하게 철창이 아닌 유리 벽으로 막혀 있는 관이 보였다.
높이 2미터짜리 유리관 속에 사람의 몸통 크기만 한 검은 생물체가 구물거리고 있었다.
번식의 왕 가라스.
수많은 생물체가 모여 있는 이곳에서도 특별히 격리시킬 정도라면 그 위험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거미의 것으로 보이는 8개의 다리가 유리 벽을 붙잡고 있고 몸통의 밑면에는 입술처럼 생긴 기관이 시종 뻐끔거리며 무언가를 내뱉을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눈은 물컹한 머리 위에 딱 하나 달려 있었는데, 눈꺼풀이 완전히 열려 있어 놀란 것처럼도 보였다.
“이게…… 가라스인가요?”
“가라스는 특별한 형태가 없어. 지금 이 모습도 무한한 세대를 이어져 내려온 어떤 개체일 뿐이지.”
가라스의 물컹한 머리가 반으로 접히고 눈이 전방을 향했다.
위아래에 달린 눈꺼풀로 눈동자의 점막을 닦아 내는 놈과 시선을 마주친 시로네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욕망이 하나이기에 목적도 하나.
가라스보다 강한 생물체는 있어도 가라스보다 강한 종은 없는 이유였다.
가라스는 플루에게 시선을 돌려 뛰어난 두뇌로 종의 특성을 살폈다.
무언가를 파악한 놈의 눈꺼풀이 마치 웃는 듯 반쯤 감기는 형태로 좁혀 들자 플루는 울컥했다.
창고에서 봤던 광경이 떠오르면서 왼쪽 관자놀이가 톡톡 튀었다. 끔찍한 두통이었다.
“키아아아아아!”
그 순간 가라스가 모든 다리를 창처럼 빳빳하게 펴면서 괴성을 질렀다.
“이런……!”
튀어나올 것 같은 박력에 시로네와 플루는 황급히 상체를 젖혔다.
축축하게 등이 젖은 것을 느끼고 나서야 여태까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어떡하죠, 선배님? 진짜 풀어요?”
아카마이를 무력화시키고 일화의 술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가라스의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