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48
두 사람 모두 합격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마음만은 닿아 있을 것이다.
“응.”
그녀의 작은 목소리에 세상이 눈을 감는 듯했고, 시로네는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에이……미.”
음이 소거되고, 에이미가 살며시 턱을 들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지고 두 사람의 역사에서 기념비가 세워지기 직전.
‘잠깐, 나 조금 전에…….’
에이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시로네, 잠깐만. 일단 타임.”
“어? 응?”
에이미에게 완전히 몸을 기울이고 있던 시로네가 황급히 물러서며 얼굴을 붉혔다.
“왜, 왜 그래?”
“그게…… 지금 당장은 곤란할 것 같은데. 사실은…….”
에이미가 시선으로 화장실을 가리키자 시로네도 뒤늦게 깨달았다.
“아, 그랬지.”
여자의 입장에서 구토 후 첫 키스라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기억으로 남을 터였다.
민망한 분위기에 시로네가 두 무릎을 탁탁 내리쳤다.
“흠흠, 할 수 없지.”
실망한 기색은 숨길 수 없었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에이미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정말로 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진짜야. 그러니까…….”
“알고 있어. 나도 괜찮아.”
시로네가 웃으며 달래자 에이미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더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지금 가서…… 양치하고 올까?”
귀엽게 물어 오는 에이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시로네는 폭소를 참지 못하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
내일 자신이 탈락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30명 중에 아무도 없었다.
졸업반의 순위가 어떻게 정해졌든 이변은 일어나는 법이고, 모두들 합격을 위한 비장의 한 수는 준비해 둔 상태였다.
“전략적 동맹?”
졸업반 건물의 뒤편 정원에 바인더와 수아비, 루만이 모여 은밀한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너희들은 유틸 계열이잖아. 내 제안이 나쁘지 않을 텐데.”
회담을 주최한 바인더가 뿔테 안경을 만지며 말했다.
클래스 투에 겨우 턱걸이를 했지만 고급반 이론 성적 100점에 이어 졸업반 전지 구현 평가에서도 어려움 없이 만점을 받은 탁월한 이론가였다.
“알다시피 나는 모든 계열의 기본 마법에서 만점을 받았어. 다만 특별한 장점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
냉정하게 분석한 말에 수아비와 루만도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너희들이 도와준다면 내 밸런스는 최고의 무기가 될 수도 있어. 수아비의 버프가 오직 나에게만 집중되고, 루만의 군중 제어 능력으로 상황을 만들어 준다면 졸업반 어느 누구하고도 맞붙을 수 있다는 얘기야.”
엘크라스 바인더(졸업반 최종 순위 20위).
전공 : 마법 분석학의 전지 계열.
특이 사항 : 협회에서 지정한 36종의 규정 마법 마스터.
“흐음, 일리가 있네.”
수아비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루만은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렇게 되면 결국 너만 이득을 보는 거잖아. 높은 경쟁으로 들어가면 결국 팀은 깨지게 되어 있어.”
1년 동안 폭식해서 체중이 더욱 불어난 루만이었지만 여전히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어쩌면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해. 만약 우리 세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탈락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내가 가장 먼저 시험을 포기하겠어.”
이번만큼은 루만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흐음, 유틸을 독점하는 대신 리스크도 함께 지겠다는 거로군. 하지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증명할 방법은 없지. 원한다면 이면 계약서를 작성해도 좋지만, 그것 또한 100퍼센트 신뢰는 줄 수 없을 거야.”
“바로 그거야. 만약 네가 뒤통수를 치면?”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그때는 평생 비겁자로 낙인이 찍히겠지. 어쨌거나 너희들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야. 지금 계약은 서로의 단점이 완벽하게 보완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먼저 탈락을 자처하면서까지 유틸을 제공해 달라고 할 사람은 졸업반에서 바인더가 유일할 터였다.
“나는 할게.”
수아비가 먼저 손을 들었다.
“졸업 시험 여섯 종목에서 대인 전투력이 영향을 미치는 종목은 네 종목. 유틸리티인 내 입장에서는 바인더와 손을 잡아 손해 볼 건 없지. 우리는 남은 두 종목에서 강하니까.”
“거기에 내가 더해지면 완벽해지겠군.”
바인더와 수아비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루만 또한 몰아주기를 하는 게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킬 터였다.
“좋아. 셋이서 팀을 짜서 하자. 하지만 조건이 있어. 바인더 다음에 탈락할 사람은 수아비야. 그게 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협상 포기할래.”
이기적인 말이었으나 루만의 군중 제어 능력은 전세를 순식간에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했다.
“좋아. 내가 두 번째로 할게. 하지만 분명히 해 둘 것은, 우리 셋이 모두 합격한다는 전제하에 시도하는 전략이야.”
“걱정하지 마. 졸업반에 군중 제어는 나밖에 없으니까. 15명 대 15명이든 1명 대 29명이든, 원하는 대로 상황을 통제해 주겠어.”
포드란 루만(졸업반 최종 순위 16위).
전공 : 트랩 마법의 군중 제어 계열.
특이 사항 : 폭식. 탁월한 형세 판단 능력.
“좋아. 그럼 이대로 달리는 거야. 내일 합격자에 반드시 우리 3명의 이름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자고.”
석양이 질 무렵 졸업반 30명 전원이 필살의 준비를 끝마쳤다.
***
졸업 시험 날의 아침이 밝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방에서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고, 졸업 시험이 치러지는 대형 콜로세움 앞은 벌써부터 각지에서 몰려든 스카우트 일행과 고급반 학생들, 졸업 시험 참가자의 부모들이 도착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스카우트분들은 먼저 입장하여 지정석에 자리해 주십시오!”
담당자가 서쪽 문을 개방하자 레드 라인 산하 65개국에서 파견한 287명의 스카우트인단이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모인 학부형들의 대부분이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이었으나 자식의 미래를 분석할 스카우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부모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스카우트들도 오직 정면만을 향하거나 미리 받은 학생들 프로필들을 검토하며 모습을 감췄다.
“세월이 무상하군. 그 말썽쟁이가 벌써 졸업 시험이라니.”
휘황찬란한 마차에서 이루키를 쏙 빼닮은 남자가 내렸다.
용뢰의 수장인 메르코다인 알비노의 등장에 학부형들 모두가 시선을 고정시켰다.
“알비노 씨다.”
왕국의 두뇌인 그가 친히 참관한다는 것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알비노 씨가 왔다는 것은…… 혹시?”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이루키가 무슨 사고를 그리 많이 쳤다고.”
이루키의 엄마가 내리자 알비노와는 다른 의미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성, 왕국 최고의 여배우인 마젤란 아르가네스였다.
인간은 신을 닮았으나 아르가네스는 신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미모에 있어서는 토르미아 왕국을 대표하는 여자였고 이미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여신이다.”
귀족의 체면마저 잊고 무심코 내뱉은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아르가네스를 직접 볼 줄이야…….”
학부모에게도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결전의 날 (3)
“재수 없어.”
모두가 아르가네스에게 넋이 팔린 그때, 오직 한 여성만이 불쾌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네이드의 어머니 테리아였다.
“남편 잘 만나서 호의호식하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웃고 있어?”
못난 남편 볼룸이 아내를 말렸다.
“그만해. 다른 귀족들 듣겠어.”
“왜요? 쪽팔린 줄은 아나 보죠? 어휴,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꼴로 사는 거야? 저 여자는 아주 돈으로 떡칠을 하며 사는데.”
볼룸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은 자중해요. 네이드가 시험을 보는 날이잖소.”
“자식이라도 잘났으면 이런 꼴로 살지는 않을 텐데. 학교 등록금은 또 얼마나 비싼지. 오늘 합격 못 하면 어디 공장에라도 취직시켜서…….”
“그만해!”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볼룸이 소리치자 주위의 귀족들이 돌아보았으나, 악밖에 남지 않은 테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뭘 잘한 게 있다고 큰소리예요? 여기에서 당신보다 돈 못 버는 남자가 있을 것 같아요? 큰소리치려거든 땡전 한 푼이라도 벌어다 놓고 하라고요!”
볼룸은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떤 소리를 해도 테리아에게서 좋은 말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어머, 저쪽에서 부부가 싸우나 봐요.”
에이미의 엄마인 이시스가 남편 샤코라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예민할 수도 있지. 자식이 시험을 치르는 날이잖소. 그냥 모른 체해요.”
이시스는 남편의 목소리에서 긴장을 느꼈다.
“당신 괜찮아요? 얼굴이 굳어 있는데. 에이미가 떨어질 것 같아서 불안한 거예요?”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지. 자기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그냥 걱정이 될 뿐이야. 지금 가장 힘든 건 에이미일 테니까.”
카르미스의 홍안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재능이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자 딸에게 괜한 부담을 씌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샤코라 씨.”
이루키의 아버지 알비노가 아르가네스와 함께 다가왔다.
“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샤코라가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자 알비노가 아르가네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사드리게. 이쪽은 카르미스 가문의 샤코라 씨, 안주인이신 이시스 씨.”
아르가네스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구부렸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아르가네스라고 합니다.”
“호호호! 당연히 알고 있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신데. 이따가 사인해 주세요!”
민망해진 샤코라가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아내가 워낙 성격이 쾌활해서.”
“어머, 아니에요. 저도 이시스 씨의 팬인걸요. 너무 일찍 은퇴하셔서 얼마나 슬펐는데요.”
알비노가 화제를 바꿨다.
“에이미 양은 어떻습니까? 준비는 잘된 것 같나요?”
“방학 중에 지켜본 바로는 목표했던 경지는 도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모르는 일이죠.”
“허허, 겸손이 과하시군요. 아무렴 카르미스인데요.”
“이루키 군은 어떤가요? 대단한 재능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놈은 글렀어요. 아마 혼자서 멍청한 짓은 다 하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질 겁니다. 탈락하면 실컷 놀려 주려고 수도에서 달려왔지요.”
아르가네스가 볼을 부풀렸다.
“우리 아들이 뭐가 어때서 그래요? 얼굴만 날 닮았어도 세계 최고의 남자일 텐데. 하여튼 메르코다인 유전자는 너무 강하다니까요.”
어느 누구도 이루키를 보고 아르가네스를 떠올리지는 못할 터였다.
“그나저나…….”
알비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시로네 군의 부모님도 도착했을까요?”
“아, 시로네를 아시는군요.”
“알다마다요. 이루키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시로네 얘기를 할 때뿐이니까요. 아들의 성적 취향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지요.”
“아, 그건 아닐 겁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딸이 시로네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여보, 확실하지도 않은 얘기를…….”
“호오, 그 얘기를 들으니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카르미스 가문의 막내 따님의 마음을 빼앗은 소년이 누군지.”
샤코라는 오젠트 가문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시로네는 평민이라 후원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기 여성분이 오젠트 가문의 삼녀 레이나 양입니다.”
네 사람이 레이나를 발견했으나 시로네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어휴! 진짜 왜 이렇게 늦어?”
시간을 확인한 레이나가 발을 동동 구르는 그때, 저 멀리서 오젠트 가문의 마차가 도착했다.
부집사 테무란이 문을 열어 주자 빈센트와 올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족들의 인파를 보고 얼굴이 창백해진 그들에게 레이나가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아버님. 다행히 늦지 않으셨네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와도 되는 자리인지…….”
“무슨 말씀이세요? 시로네가 졸업 시험을 치르는데 당연히 오셔야죠. 이제 곧 참가자들이 입장할 거예요.”
마차 안에서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벌써 도착했네.”
레이나가 도끼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야! 너는 부모님 모시러 간 지가 언젠데 지금 와? 하마터면 시로네도 못 보고 들어갈 뻔했잖아!”
“어쨌든 제시간에 왔으면 됐지. 하여튼 잔소리는…….”
대직도를 등에 장착한 리안이 내렸다.
푸른 머리에 칼날처럼 예리한 눈빛, 완벽하게 단련된 육체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시로네…….’
리안은 시로네의 미래를 결정지을 콜로세움의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해냈구나.’
기사 서약을 했을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 현실로 다가온 느낌은 짜릿했다.
“어? 저 청년이 차고 있는 대직도, 오젠트 가문 아닌가? 막내아들 리안이 온 모양이군.”
“마하의 검사로 불린다지. 검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주목받고 있는 모양이던데.”
귀족들이 리안을 알아보자 레이나는 삿대질을 하고 있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구부렸다.
“그래도 열심히 했나 보네, 너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처음 기사 수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는 정말로 남동생 하나 보내는구나 싶었다.
“평판 따위 신경 쓰지 않아. 시로네 졸업 시험이 아니었으면 집에 오지도 않았을 거야.”
“이게 아주! 오냐오냐해 줬더니 가족을 우습게 알아!”
레이나가 리안의 허벅지를 걷어찼으나 돌덩어리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아야! 너 바지 안에 갑옷 입었어?”
리안이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나는 언제 철들려고 그래? 성질 좀 죽여야지, 그래 가지고 누가 데려가겠어?”
발가락을 문지르는 레이나의 눈에 찔끔 눈물이 맺혔다.
‘이제 힘으로 누나를 이겨 먹으려고 그러네. 서럽다, 정말.’
막내의 귀를 잡아당기며 부려 먹던 좋은 시절은 다 지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