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96
상체를 활처럼 젖히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세우더니 시로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너에게는…… 남겨진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남겨진 질문?”
시로네가 되물었으나 남자는 대답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두 눈의 동공이 정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하더니 비로소 본래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안 돼! 살려 줘! 으아아아아!”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눈동자에 시신경이 파괴되면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인간 트랩인가?”
땅이 흔들리면서 트랩의 강선이 핑핑 사납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브로마크! 거기서 나와!”
대원들이 소리쳤으나 이미 브로마크는 강선에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젠장! 이거 뭐야?”
구출할 시간조차 없이 함정이 발동되었다.
“공간이 접힌다.”
마치 미닫이문처럼 골목이 닫히고, 바닥에 쓰러진 브로마크가 손을 내밀었다.
“크아아악!”
벽과 벽이 연결되면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긴이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생존 전문가라더니…….”
황당한 상황을 음미할 새도 없이 다른 대원들이 주위를 살폈다.
라둠의 구조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고 벽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내장 찌꺼기 같은 섬유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어느새 일어서 있는 시체들은 죽은 듯 미동이 없었고, 새롭게 생긴 골목의 좌우에 괴물과 결합되어 있는 나신의 여성이 동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입구도 사라졌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오감의 현실화.”
루피스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샤이닝 마법이 사라진 이후에도 볼 수 있는 이유는 해가 떠 있기 때문.
하지만 그들의 세상처럼 찬란한 태양이 아닌, 곧 죽어 갈 듯 붉은색 노을로 이글거리는 태양이었다.
“갇혀 버린 거야.”
“갇혔다는 게 무슨 뜻이죠?”
루피스트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뇌를 뽑아서 통에 담군 상태라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설마?”
“그래. 정확히 그렇게 되어 버린 거야. 아마도 이것이 구울들이 보고 있었던 풍경. 트랩으로 삼은 남자의 뇌파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지옥을 구현시킨 것이지.”
“빌어먹을!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비공인 5급의 방어 계열 마법사 레모가 소리쳤다.
“누가 설명이나 듣자고 당신을 따라온 건 줄 알아!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것 아냐!”
“침착해. 생각하는 중이니까.”
“헛소리 지껄이지 마! 처음부터 느낌이 안 좋았어! 당신, 마법협회 협회장이지?”
루피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날 여기서 내보내 줘! 안 그러면 고소……! 커억!”
레모의 눈이 말리더니 핏물을 쏟아 내며 쓰러졌다.
“이런 제길!”
카르긴이 황급히 달려가 회복 마법을 시도했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어떻게 된 거지?”
루피스트의 시선을 받은 제인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안 죽였어요. 죽일 생각이었지만.”
“허상의 고통 속에서 발버둥 쳐라.”
메이레이가 나섰다.
“라 에너미의 말이에요.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는다고도 했죠. 이 또한 신탁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녀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죽음을 깨닫는 순간, 정말로 죽는 겁니다.”
라둠으로 (3)
“레모!”
요르딕이 쓰러진 레모에게 달려가 몸을 흔들었다.
전쟁마차 길드원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치른 그가 고작 공포에 져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실버링, 블러드로즈의 길드원들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상황이었다.
“일어나! 이게 무슨 쪽팔린 짓이야! 빨리 눈을 떠!”
분을 참지 못한 요르딕이 갑자기 흠칫하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마치 중력이 사라진 듯, 레모의 시체가 몸을 일으키며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무언가가 심하게 뒤틀려 있는 세계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요르딕이 시로네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얘기는 없었잖아!”
“누구나 죽을 수 있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용병대에 들어온 거 아닌가?”
루피스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죽을 수 있다고? 지금 이 상황이 그냥 죽은 걸로 보여? 아니, 도대체 시체가 왜 서 있는 거야?”
“흥분하지 마세요. 죽습니다.”
시로네의 일침에 요르딕이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사망자가 나온 상황이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협회장님, 제대로 설명해 주시죠. 납득시키지 못한 상태로 임무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시로네의 말에 루피스트가 가면을 벗었다. 정체를 감출 의미가 사라지는 시점이었다.
제인 또한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냈다.
협회장과 비서실장이라는 사실이 눈으로 확인된 것만으로도 대원들의 공포감이 조금은 줄어들 터였다.
“일종의 인간 트랩이다. 또한 내 생각에, 이건 오직 너를 잡기 위한 트랩이야.”
루피스트가 시로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라 에너미는 오감의 기억을 통해 인간의 과거를 지배하지만 너에게는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아. 그래서 한 단계를 더 추가한 거다. 특정인의 과거를 지배하여 지금의 미래를 만들고, 그로 하여금 너의 과거를 지배하게 만든 거지.”
제인이 덧붙였다.
“통속의 뇌는 정신 마법이 아니에요. 간단히 말해서 여태까지 느꼈던 오감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대원들은 시시각각 변화가 심해지는 풍경을 심각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섬유질로 변한 건물들이 심장처럼 박동하자 틈새에서 핏물이 쭉쭉 새어 나왔다.
시체들은 까치발로 서 있고, 크고 작은 악마의 동상 앞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해골들이 굴러다녔다.
“그러니까 뭐야, 처음부터 이랬다는 건가? 오감이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란 말이야?”
어떤 광인의 상상이 구현된 것이 아닌, 오감의 변화에 따른 실제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소름이 돋았다.
“오감이 전부다.”
루피스트가 근육의 벽에 손바닥을 대자 섬유질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튀어나와 팔을 삼키려 들었다.
실제의 온기와 박동을 느낀 그가 팔이 붙잡히기 전에 거두어들이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감각이 진짜 세계를 느끼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 수많은 작품 속에 등장했던 지옥의 모습과 유사한 이유도 육감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헛소리!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이상한 괴담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건 도움이 안 돼!”
“외면하지 말라는 얘기야. 특정 신호가 뇌에 직접 꽂히는 방식이라면 레모의 죽음도 설명이 가능하다. 앞으로는 감정을 억제하고 신중하게 생각해라. 이성을 잃는 순간 지옥이 너희들을 집어삼킬 테니까.”
대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키는 것과 달리 메이레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귀를 막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이미 오감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청각 또한 통속의 뇌의 트랩에 지배당하고 있는 탓이었다.
“네메시스를 빼라. 지금은 방해만 될 뿐이야.”
핵심 멤버들이 큐브릭의 슬롯을 열자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가 마술처럼 사라졌다.
시로네가 지시를 내렸다.
“우선은 생존, 그다음이 탈출이에요. 주변을 수색한 다음 안전지대를 확보하죠. 그곳에서 여기를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라둠의 구조가 달라졌기에 이곳 또한 더 이상 초입이 아니었다.
전열을 정비한 용병대가 이동을 시작했다.
끔찍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오감의 기억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어쩌다가 끌려와 가지고.”
붉은 태양을 산란시키는 유리 벽 같은 대기의 경계선 때문에 더욱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 구울이다.”
3명의 구울이 벽에 달라붙어 근육을 뜯어먹고 있었는데, 뇌의 신경이 마비된 탓에 배가 터진 채로 창자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차라리 미쳐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구울들이 고개를 돌렸다.
“먹을 거……. 먹을 거…….”
신선한 인육의 냄새를 맡은 그들이 채 한 걸음을 걷기도 전에 모퉁이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살려 줘!”
이어서 수많은 구울들이 하나같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악마! 악마가 나타났다! 커억!”
선두에서 소리친 구울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뒤집어 까며 사망했다.
“대장! 어떡할 거야?”
검사들이 무기를 빼 들며 소리치자 시로네가 선두에 나서서 포톤 캐논을 연사했다.
스피릿 존을 통해서 구현된 포톤 캐논은 전과 다름없는 깨끗한 섬광으로 뻗어 나가 구울들을 강타했다.
‘됐어. 스피릿 존은 왜곡되지 않는다.’
구울들이 순식간에 정리되었으나, 안도의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골목 저편에서 쿵쿵 땅이 울렸다.
“뭐, 뭐야?”
2미터 정도의 거구에 검은 보자기를 얼굴에 쓰고 팔꿈치 아래로는 식칼 형태의 칼날을 달고 있는 자들이었다.
배가 기괴할 정도로 불룩했고, 그냥 철심으로 박아서 봉합한 자국에서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우욱!”
보는 것만으로 구토를 유발시키는 외모였으나 시로네는 오직 크기와 체중의 비례만을 생각했다.
‘키는 고작 2미터 20센티미터 정도. 땅이 울릴 정도면 최소한 1톤이 넘는 중량이어야 할 텐데?’
메이레이가 말했다.
“갈로퍼예요. 이면 세계의 요리사죠.”
시로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알고 있었던 건가요?”
“아뇨. 저도 이곳은 처음이에요. 하지만 신탁을 통해서 들은 적이 있어요.”
시로네 용병대를 발견한 갈로퍼들도 서로를 돌아보며 모르는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저 녀석들, 우리를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요즘 들어 경계선이 자꾸 사라지는군.
-어차피 저쪽 놈들은 약해.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지.
‘온다!’
시로네가 느끼는 것과 동시에 갈로퍼들이 일제히 용병대 쪽을 돌아보며 달려들었다.
-요리 재료다!
구울들을 베어 버리며 다가오자 마치 감정이 동화된 듯 구조물들이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건 또 뭐야!”
수십 톤의 질량이 용병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칼날을 회피하면서 복부에 일격을 찔러 넣은 에텔라는 한순간에 그들의 강함을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단단한데?’
감각이 왜곡된 것인지 정말로 그들의 내구력이 생물의 한계를 넘어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투가 시작된 마당에는 의미가 없는 분석이었다.
“이야아압!”
앙칼진 기합을 내지르며 음양파동권의 연격을 퍼붓자 1톤이 넘어가는 몸체가 덜덜 흔들렸다.
“라트라 메 다카포르가(이 녀석들 강하다)!”
‘여기서 터트린다!’
에텔라의 쌍장이 복부를 강타하는 순간 강력한 파동이 갈로퍼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크아아아!”
피부가 울퉁불퉁 튀어나오는 것도 잠시, 퍽 하고 옆구리가 터지면서 썩은 내장들이 쏟아졌다.
“아우우우.”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에텔라가 황급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핵심 멤버들 쪽은 그나마 숨통이 트인 전황이었으나 후미 쪽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갈로퍼의 내구력이 상식을 무시하자 공포를 느낀 대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안 돼! 정신 차려!’
두려움에 잠식당하는 순간 죽는다.
이는 마치 정신적인 낭떠러지를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싸운다! 이길 수 있어!’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안면은 기괴하게 뒤틀리고, 결국 이성이 마비된 토토가 창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파고들었다.
“죽어라아아아아!”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일격이었지만 정확도는 떨어졌고, 가장 튼튼한 복부에 창이 박히자 철이 끊어졌다.
끊어진 창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갈로퍼가 팔을 힘껏 치켜들어 식칼을 내리그었다.
“으아아아!”
동시에 리안이 미끄러지듯 앞을 가로막으며 떨어지는 식칼을 대직도로 쳐올렸다.
“크윽!”
무지막지한 힘이 전해지면서 표정이 일그러졌으나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빨리 피해!”
돌아본 곳에는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토토가 흰자를 드러낸 채로 서 있었다.
“파툰가아르! 파툰가아르!”
목구멍 안쪽이 가래로 채워진 듯한 목소리로 외치자 주위의 세 마리가 동시에 대직도를 가격했다.
마치 바윗덩어리를 받아 낸 기분이었다.
‘밀어낸다!’
신적초월의 힘으로 대직도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무릎이 천천히 펴지기 시작했다.
“파툰가아르! 파툰가아르!”
힘에서 밀리자 당황한 갈로퍼들이 반대편 팔까지 동원해 식칼을 내리쳤다.
머릿속에 스파크가 터질 정도의 충격 앞에서도 리안은 굴하지 않고 두 다리로 땅을 박찼다.
‘벤다!’
신적초월의 의지가 마하의 힘으로 밀려들면서 갈로퍼 네 마리의 몸통이 동시에 가로로 쪼개졌다.
“푸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