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05
‘어째서 나는…….’
신이 될 수 없는가?
***
‘마족의 동선이 바뀌지 않아.’
지휘통제실로 속속들이 도착하는 정보를 토대로, 이루키는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리안이 나타샤를 꺾었을 때는 쾌재를 불렀고, 에이미가 돌아왔을 때는 눈물이 났다.
“하지만.”
전체의 상황으로 봤을 때 꽃밭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내 분석대로라면 이미 마족들은 바슈카 쪽으로 방향을 돌렸어야 정상이야. 결국 누군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건데…….’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럴 리가 없어. 메이레이의 신의 주파수는 완벽한 능력이야. 가능한 경우라면…….’
손유정이 심연의 절벽을 파괴한 사건.
‘본래 원소 폭탄은 그곳에 떨어졌어야 했지. 그 사건으로 성전의 의도를 유추했다?’
이루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게 되나? 지옥의 군대는 원소 폭탄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데.’
현존하는 어떤 무기도 지옥의 군대를 일시에 소멸시킬 위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막연하게 바슈카에서 뭔가 큰 게 터질 것 같다는 예상만으로 피해를 감수하며 꽃밭을 뚫는다고?’
사실이라면 발칸이라는 인물은 둘 중의 하나였다.
‘극단적인 피해망상을 앓고 있는 자거나, 말 그대로 상상력의 괴물이거나.’
아마도 둘 다.
만약 사실이라면, 지옥의 군대가 자의로 바슈카로 향할 확률은 0퍼센트에 가까웠다.
원소 폭탄을 터트릴 기회조차 없다.
‘진다.’
이루키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패배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
“생화가 꺾였습니다!”
굳이 보고 따위 하지 않아도, 거대한 구조물이 넘어가는 게 똑똑히 보였다.
‘얼마 버티지 못하겠군.’
에이미의 합류로 루피스트가 예상한 시간보다 15분을 더 버틸 수 있었다.
짧은 시간.
하지만 그 시간 동안에 생화가 소멸시킨 마족들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꽃밭에서 마족이 얼마나 죽어 나가든, 결국 인간에게는 무한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바슈카로 유인해야 한다. 원소 폭탄이 아니면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생화가 꺾였습니다!”
누군가의 보고가 들어오고, 화족의 족장 프로테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흐윽!”
생화의 화족들이 마족에게 붙잡혀 당하는 고통이 소세계창유를 통해 흘러들었다.
‘왜?’
프로테아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왜 우리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지?’
인간이라면 차라리 혀라도 깨물고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도 못해!”
스트레스에 말라 갈지언정, 식물에게는 자살을 할 기능이 주어지지 않았다.
“프로테아!”
전방에서 에녹스가 뒤를 살피며 달려왔다.
“소세계창유를 풀어! 방어선을 400미터 뒤로 밀고, 다시 응전한다!”
“숲의 주인이시여!”
온갖 감정이 뒤섞인 일갈에, 에녹스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피눈물을 확인했다.
“가자, 프로테아.”
에녹스가 그녀의 어깨를 아플 정도로 움켜쥐었다.
“무슨 심정인지 알아. 하지만 인간을 믿어라.”
“왜 그래야 하죠?”
프로테아는 고개를 저었다.
“신이니 이데아니, 관심 없어요.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 아무도 괴롭히지 않고, 숲에서 햇살을 받으며 조용하게 살고 싶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실패한 종족인 거야.”
“…….”
프로테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에녹스가 똑바로 눈을 맞췄다.
“프로테아, 싸우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우리와 인간은 그 지점에서 갈라진 거야.”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단지 강해서가 아니야. 우리보다 훨씬 긴 핍박의 역사, 한순간도 싸움을 멈추지 않은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녹스의 손이 전장을 가리켰다.
“자, 봐. 인간들이 싸우는 모습을. 저게 용맹하다고 생각해? 천만에. 다들 겁에 질려 있어.”
프로테아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괴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연합군을 눈에 담았다.
“그래도 인간은 싸운다. 투쟁의 역사를 거친 선조들의 피가 말해 주고 있는 거야. 행복은 남이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고. 겁에 질려 있느니 차라리 싸우는 게 더 낫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야.”
“그것이 인간…….”
멍하니 연합군을 바라보는 프로테아의 어깨를 에녹스가 붙잡아 돌렸다.
“인간을 믿어라. 신이라서가 아니야. 저들은 세계와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인간이 해내지 못하면, 이 세계의 어떤 종족도 해낼 수 없어.”
에녹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프로테아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화족을 위해 싸울게요.”
연합군 쪽에 빈틈이 생기면서 대대 규모의 마족들이 들이닥쳤다.
“저기 있다! 엘프를 잡아! 저건 내 거야!”
“어서 가! 방어선을 구축해!”
프로테아의 등을 떠민 에녹스가 검을 뽑아 들고 마족들에게 돌진하는 순간.
“응?”
발을 내디딘 마족들이 어느새 땅에 새겨진 마법진 속으로 빨려 들었다.
푸드득! 푸드득!
그리고 전혀 동떨어진 마법진에서 완전히 즙이 되어 분출되기 시작했다.
마법 회로의 입력과 출력이 계속 변하면서, 사방에서 마족들의 살점이 뿜어졌다.
“뭐야?”
뒤를 살피는 루피스트의 발밑에서 게이트 마법진이 빠르게 새겨졌다.
“후우, 지금 도착했습니다.”
함정을 설치하느라 지친 단테를 필두로 3사단의 병력이 지면 위로 떠올랐다.
상황을 파악한 루피스트가 마법진을 살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한 순환 궤도?”
단테가 힘든 미소를 지었다.
“대군에는 치명적이죠.”
원리는 이렇다.
공간 이동 마법진 2개를 연결시킨 다음, 그 공간 사이에 칼날을 끼운다.
트랩은 그것으로 충분.
“물리적 함정과 달리 적재량은 무한. 이거라면 끝없이 마족을 죽일 수 있죠.”
루피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정 영역을 지키는 데도 용이할 테고. 머리를 썼군. 하지만 내구력은 다른 문제겠지?”
“네. 제 실력으로는 30분 정도가 한계입니다.”
“30분?”
루피스트가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로 그때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연합군은 유사 이래 최고의 전투를 펼쳤지만,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체력이 바닥났어.’
반면에 이제 막 전장에 합류한 마족들은 힘이 넘쳤다.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건…….’
가르시아나 에이미, 리안 정도.
‘저 3명이 해치운 숫자가 마족 피해의 25퍼센트에 달한다. 가히 인류가 배출한…….’
위험한 생각이 스쳤다.
“잠깐.”
단테가 물었다.
“왜 그러시죠?”
“이상하지 않아?”
“네?”
“너는 지금 합류했으니 모르겠군. 아군의 장수들은 분명 최강의 실력자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루피스트의 시선이 지옥의 군대로 향했다.
“적들이 보유한 최강의 실력자, 군단장은 1명도 나타나지 않는 거지?”
“…….”
단테의 눈꺼풀이 깜박거렸다.
거핀이 남긴 것(3)
***
발칸이 중얼거렸다.
“지옥의 군대에 정예는 없어.”
하비츠가 토르미아의 수도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군단장의 부대를 세계 각지로 보내고, 남은 95퍼센트의 병력만으로 바슈카를 치기로.
파이몬이 눈을 흘겼다.
“그래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 네가 아끼던 친구 3명도 반병신이 되어서 돌아왔고 말이야.”
발칸에게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특히나 나타샤가 마하의 기사에게 패했단 얘기를 들었을 때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파이몬이 재차 말했다.
“이제 그만 바슈카로 들어가지? 어차피 생화는 움직이지 못해. 그냥 무시해도 된다고. 괴롭힐 인간도 별로 안 남았는데 애꿎은 마족만 죽어 나가잖아.”
“언제부터 네가 병사들을 신경 썼지? 그리고 바슈카에 들어가면 지금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
“그것도 네 망상이지. 무엇보다 사탄께서 원하고 계신다. 지금 당장 바슈카로 동선을 틀어.”
발칸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비츠는 돌아오지 않아.’
오랫동안 하비츠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비츠의 율법은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미래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즉, 하비츠가 전장을 이탈하는 게 그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기회다.’
발칸의 눈이 빛났다.
‘바슈카에는 가지 않아. 아니, 가도 먼 훗날의 일이다. 지금은 꽃밭을 뚫고 중부 대륙으로 진입한다.’
설령 왕의 명에 불복한 죄로 감옥에 가더라도 최선의 전쟁을 치르는 게 군사의 임무.
“일단은 진격한다.”
발칸의 지시를 들은 파이몬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쳇, 인간 따위가.’
사탄이 아끼는 자만 아니었어도 당장 말에서 끌어내려 곤죽을 냈을 터였다.
‘응?’
그때 한 마리의 마족이 상공에서 날아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초음파를 쏘았다.
“파이몬 님, 사탄 님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현재 카샨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발칸에게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듣고 있던 파이몬의 눈 밑이 씰룩했다.
“후후.”
마족의 보고를 모두 들은 그녀의 입가에는 어느새 서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전쟁이 가장 치열한 지역은 토르미아지만, 세계 각지에서도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많은 왕국이 멸망한 가운데, 상아탑 4성급 이하의 별들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중에서도 시스템감찰부의 별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인류 구호 활동이었다.
“어딜 가도 전쟁이네요.”
토르미아를 치는 지옥의 군대 본진 외에도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마족이 있었다.
우선 72군단장 중에서 60명 이상이 소멸했기 때문에 발생한 탈주 마족이었다.
마족은 분명 사탄을 따르지만, 또한 사탄의 혼돈에서 태어난 자들이기에 복종의 방식은 제각각이다.
특히나 강한 마족들은 군단장을 자처하며 일부 도시를 점령, 그곳의 인간을 잔혹하게 부렸다.
“바야흐로 세기말의 시대지.”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를 산발로 퍼트린 노인이 절벽 아래를 살피며 말했다.
“싸우는 자들이 주목받는 세계지만, 이런 일도 가치가 있지. 그러니까, 싸우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말이야.”
시스템감찰부 3성급 주민 아놀드 람파.
112세의 나이로 세계정세에 해박하고, 가끔 몽인 루버와 차를 마시는 것 외에는 특별한 활동이 없다.
그럼에도 시스템감찰부 오대성 프리드에 이어 2인자인 이유는 텔레버드라는 정보 마법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전송 반경은 가히 행성의 반구를 장악할 정도.
세계 최고의 이탈형 스피릿 존을 가진 그가 아니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송력이었다.
“쭈쭈, 착하지.”
람파가 검지를 구부리자 푸른빛의 종달새가 태어나 날개를 흔들었다.
“아모레 언덕에서 적 발견. 예상 평균 무력 수치 A등급. 베키드 마을 쪽으로 서행 중.”
정보를 기록하고 검지를 들자, 텔레버드가 날아오르더니 곧 직선의 섬광으로 뻗어 나갔다.
람파의 곁을 따르는 20대의 청년이 말했다.
“이번에도 A급.”
동방 출신의 백면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