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04
오메가 단위로 가이아인의 특정 시대를 기록한 거핀이 마지막 999년을 채웠다.
‘최후의 가이아인 맥클라인 거핀. 광자계 이탈.’
어차피 이름은 말소되겠지만, 이것으로 가이아인의 역사는 종료되었다.
‘미래는…….’
잠시 생각에 잠겼던 거핀이 중얼거렸다.
“무한을 넘어.”
누군가에게 보내는 문장이 다시 기록되고, 그것으로 화면이 꺼졌다.
“끝난 거야?”
미로가 물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에는 이스타스로 연결되는 차원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럼 이제 헥사를 줘. 카즈라의 왕자와 바꿔치기를 한 상태에서 당신이 초기화를 시키면, 헥사의 원인은 영원히 제거되지. 그럼 앙케 라도 손대지 못해.”
“그렇겠지.”
인류의 미래가 걸린 일이었기에, 거핀도 주저하지 않고 아이를 내밀었다.
다만, 손이 조금 떨리는 듯했다.
“……아이는 무사할 거야. 욜가 언니를 설득시킬 수는 없겠지만, 나도 사정 봐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 부탁한다.”
헥사를 건네받으려던 미로가 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시선을 들었다.
“아버지로서, 마지막으로 남길 말 없어?”
생이별.
여지를 남길수록 괴롭다는 건 알고 있지만, 미로도 이렇게는 못 갈 것 같았다.
“남길 말이라.”
앞으로 혼자서 세상과 싸워야 하는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이라면…….
“만약 네가.”
거핀이 아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 자신을 지킬 수 없을 만큼 강한 악과 싸워야 한다면, 악의 방법론을 따라도 좋다.”
시로네의 내면에 새겨져 있는 베히모스의 봉마진이 잠시 붉게 빛났다.
“만약 네가, 가족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면, 선악의 중립에 서라.”
가족을 지키는 것만큼 위대한 일은 없단다.
“아빠는 그러지 못했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 거핀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시로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만약 네가, 가족을 지키고, 더 많은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면, 선을 수호해라.”
그것이 옳음이다.
“그리고 만약…… 네가 세상 전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면…….”
거핀이 헥사를 높게 들어 올렸다.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 다오.”
하나에서 태어난 존재에 하찮은 것은 없단다.
“아우. 아아.”
거핀의 얼굴을 높은 곳에서 보는 게 기분 좋은지, 아이가 방긋 웃었다.
마치 눈물을 들이켜듯 고개를 끝까지 쳐든 거핀이 천천히 팔을 내렸다.
어느새 경건해진 미로가 고이 아이를 받아 들고 차원의 문으로 들어가 몸을 돌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지?”
“이스타스의 시간은 공간과 연계해야 돼. 사건이 분화되면 시간의 상대성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여기서의 1초가 이스타스 안에서는 수십 년이 될 수도 있어.”
시간의 폐곡선이었다.
“걱정 마, 반드시 성공할 테니까. 만약 시간 내에 되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냥 시간을 닫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어차피 날 원망하게 될 거야.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너는 인류의 희생양일 뿐이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거핀이 말을 이었다.
“너에게 미안하고, 미움을 받을 각오는 하고 있어. 다만 헥사만은 반드시 지켜 줘.”
고개를 끄덕인 미로가 이스타스의 내부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욜가.”
다음 순간,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복도를 걸어서 나오는 미로가 보였다.
시간의 폐곡선에서는 공간이 곧 시간이기에, 거핀의 시점에서 72번 창고는 동일 시간대였다.
‘세계의 시간 안에 독립적인 시간을 만들고, 내가 광자계를 이탈하게 되면…….’
이스타스의 다른 창고에서는 이미 미로가 거핀 말소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폐곡선 안에서는 미래지만 전체 시간에서는 사실 과거인, 이스타스의 신비였다.
‘카즈라의 왕자는…… 없다.’
이토록 살기등등한 미로는 처음이었으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아마도 비극적인 일이 있었겠지만, 거핀 또한 묻지 않고 차원의 문을 닫았다.
이것으로 미로는 이스타스를 빠져나가는 사건을 시간의 폐곡선에 남기게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거핀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막을 수 없을 거다, 앙케 라.”
혼자가 아니니까.
이카엘의 눈물이 헥사를 통해 빠져나오면서, 거대한 아타락시아가 펼쳐졌다.
“크으으으!”
증폭.
거핀의 육체 자체가 미라클 스트림이 되어 무한대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 세계에 울티마는 없지만…….’
남겨 두고 간다.
‘하나의 희망을.’
그의 몸이 점차 빛으로 퍼져 가는 가운데, 거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재밌었다.”
점멸하듯 육체가 사라지고.
‘뚫는다.’
광자계의 경계선, 시공간의 개념조차 없는 미지의 층을 통과하는 그때.
‘저건?’
이카엘을 쏙 빼닮은 금발의 사내아이가 자신을 향해 질주하는 게 보였다.
“……짜식.”
거핀은 전부 이해했다.
“멋진 놈이 되었구나.”
봐, 날 닮았다니까.
거핀이 남긴 것(2)
***
천국의 군대를 이끌고 슈라의 뒤를 쫓으며, 이카엘은 오래전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때…….’
거핀은 말소되었다.
앙케 라가 자신의 존엄을 파괴하면서까지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일 것이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사건은…… 우주의 모든 존재에게 충격이었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거핀이 말소된 순간, 이카엘은 가슴 정중앙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헉!”
이대로 영원의 시간이 흘러도 모를 만큼 거대한 박탈감이 밀려들었다.
“아…….”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뺨을 타고 빛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거핀.”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일 뿐, 그녀의 마음속은 온통 거핀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떠나 버렸구나.”
마음이 통째로 뜯어져 나가는 기분이었고, 남은 공허함은 우주를 담아도 부족했다.
“그가 나에게 왔었어.”
이카엘은 몸을 웅크리며 오열했다.
“이어져 있었어!”
되짚을 수 있는 추억 따위는 없지만, 시리도록 아픈 마음이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이것만이 진실일 것이다.
“사랑했는데.”
빛의 눈물이 바닥을 전부 적시고도 그녀의 울음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알고 싶다.’
마음이 쏘아 올린 수많은 장면들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
앙케 라에게 쳐들어가기로 결심한 그녀가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
하지만 그녀의 손은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아니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앙케 라에게 가면 또 다른 비극이 벌어질 것 같았다.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질 게 없는 것 같은데도 그런 마음이 계속 드는 것이다.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일까.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기분이 든다.’
두 번의 실패는 하지 않을 것이기에, 이카엘은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들었다.
“거핀, 걱정하지 마세요. 이어 나가겠습니다.”
거핀 말소는 이카엘의 마음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19년 뒤, 이카엘은 그 음각의 형태를 증폭시켜 비로소 완벽한 기억을 되찾는다.
한편, 거핀 말소로 인해 충격을 받은 존재는 비단 이카엘만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핀을 아는 모든 자들은 가슴이 터지는 충격파를 느꼈다.
그 충격은 순수한 정신체일수록 강했고, 심지어 대천사는 위화감을 느낄 정도였다.
‘뭐지? 이 세계에, 뭔가 균열이 일어났다.’
물론 그 균열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의 화신인 앙케 라였다.
“키이이이!”
아라보트의 성소에서 앙케 라의 촉수가 사상 최고의 속도로 움직였다.
‘특정 코드가 광자계를 이탈했다.’
이는 명백한 오류다.
코드의 실체는 몰라도, 앙케 라가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존재가 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찾는다.’
말소 코드를 파악하는 일은 우주에서 지푸라기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지만.
“키이이이이!”
앙케 라는 오버드라이브를 걸었다.
‘시스템이 파괴되더라도 찾아야 하는 사안이다.’
우주가 흔들리고, 시스템의 과부하로 세계가 폭발하기 직전으로 치달았다.
‘찾았다.’
인간이었다.
‘맥클라인 거핀.’
이 오류를 어떻게 복구시켜야 할까?
아카식 레코드를 전부 검색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복구한다! 복구한다! 복구한다!’
그럼에도 앙케 라는 오직 거핀 말소에 대한 문제만을 끝없이 파고들었다.
‘오류 발견! 복구! 오류 발견! 복구! 오류 발견!’
이제는 거핀이 오류인지 앙케 라가 오류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카식 레코드는 끝없이 가열되었고, 급기야 우주가 산산조각 흩어지려는 그때.
“커어어어어!”
앙케 라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초기화? 어째서?’
우주가 꺼짐 상태로 향하고 있었다.
“키엑! 키엑! 키엑!”
리셋을 막아 내기 위해 수단을 총동원했으나, 어떤 지시도 부정당했다.
‘이건 마치…….’
앙케 라는 우주보다 단단한 물리력을 느꼈다.
‘이데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기계라도 스위치를 끄는 한 번의 손짓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세상 바깥에서 작용하는 힘.’
그 가볍고 단순한 힘 하나가, 앙케 라의 모든 지시를 파괴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앙케 라는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의미를 상실했다.
“아니야! 내가 우주다! 내가 전체야! 나 이외의 누구도 여기를 초기화시킬 수 없어!”
수치심.
여태까지의 정보로 이해했던 감정이 아닌,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되어 버린 것.
감정이었고, 그가 느낀 최초의 마음이었다.
“키이이이!”
눈 밑에서 기름처럼 검은 물을 떨어뜨리며, 앙케 라가 분노의 일갈을 내질렀다.
“거피이이이이이……!”
세계가 꺼졌다.
무한의 끝과 끝에서부터 섬광이 좁혀져 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