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3
00013 [세 번째 역] 스렌타인 주간지 =========================================================================
호칭에는 친근함이 배어 있다. 벤디트의 표정이 구겨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이름으로 불리는 건 불쾌했지만 리건은 벤디트를 불쾌할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참작해 상냥히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영애.”
“리건, 당신도 근사하세요. 오빠, 이 분과 단 둘이 이야기 할 수 있게 해줘.”
잉그리드와 벤디트 사이의 기류가 묘했다. 벤디트는 잉그리드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죽어도 안 된다 고집을 부릴 줄 알았던 벤디트는 의외로 동생의 요청을 승낙했다. 응접실 안에 하녀를 동석하게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녀가 그를 노려보든, 벤디트가 그를 노려보든 리건의 목적은 변함이 없었다.
벤디트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간단히 용건만 하고 조용히 돌아가주시기를 바라죠.”
응접실 문이 닫혔다. 리건이 표정을 지웠다. 그는 반갑다는 양 눈을 반짝이는 잉그리드를 향해 싸늘히 쏘아붙였다.
“장난은 이제 됐고…… 너 내게 할 말 있지 않나?”
“저는 에스펜서 공께 들을 이야기가 있다 생각하는데, 우리 통했네요.”
리건은 예의상으로 웃어줄 생각도 없었다. 품 안에서 다 구겨진 주간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우드슨.”
“……”
“그 날 네 마차를 가지러 갔다던 보초병의 이름이더군.”
“찾으셨나요?”
“부정도 않아?”
리건은 헛웃음 비슷하게 실소했다.
리건이 파르네세 공작저를 찾아오게 된 발단은 이러했다.
잉그리드와 그가 사랑의 밀회를 했다 떠들어대는 기사 속에는 목격자의 인터뷰가 있었다.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정원의 으슥한 곳으로 사라졌다. 뭐 그런 내용.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나 스렌타인사 주간지 편집장은 말을 왜곡할지언정 근거 없는 거짓기사는 싣지 않는다. 허위사실이 실린다 해도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했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손목을 쥐고 밤사교회장을 끌고 나왔다. 하도 당돌하기에 무례하게 가까이 다가가기도 했다. 정원의 탁트인 분수대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사실을 왜곡한 목격자의 인터뷰만 읽으면 그와 잉그리드가 정말로 밀회를 즐긴 것처럼 보인다. 그걸 빌미라 한다면 빌미를 준 자신에게도 조금의 책임은 있다. 잉그리드 파르네세가 사교회장 안에서 떠든 이야기가 기사화되지 않은 것이 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장작이 있어야 불이 붙는다. 장작은 나무를 해오는 사람이 제공해주는 것이다. 리건이 살핀 것은 거의 대부분의 일이 비밀리에 묻히는 밤사교회장에서의 일을 단순히 떠벌린 게 아니라, 스렌타인사에 제공한 놈이었다.
그 밖의 소문은 파르네세가에서 수습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목격자가 누구인지 정도만 알아볼 셈이었다. 밤사교회의 일을 내다 파는 놈은 사교회에 있을 자격이 없다. 리건은 사르테스 백작에게 부탁을 했다. 사르테스 백은 뒷조사에 도가 튼 사람이고, 솜씨 좋은 탐정들을 여럿 알았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아 조사 결과가 나왔다.
목격자는 다름 아닌 마차를 두고 실랑이를 했던 때 있었던 보초병이었다. 로만뷔트 밤사교회의 경비병은 귀족들의 사생활을 유출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사교회의 가장 어둔 일면을 지키는 가디언이 그들이었다.
보초병을 찾아내기 위해 로만뷔트 밤사교회 회장에게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그런데 밤사교회 회장이 말하기를, 해당 보초병은 근무를 그만두었단다.
시기상으로 인터뷰 직후였다. 웬 귀족의 후원으로 형편이 나아졌다는 것을 이유로 댔다고 한다. 후원 귀족은 ‘클레이든’,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가? 듣도 보도 못한 새끼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금 더 파고들었다. 몇 다리 건너건너 살펴보니 답이 나왔다.
스렌타인사에 기사와 인터뷰 내용을 기고한 사람의 배후에는 파르네세 가문과 밀접한 자가 엮여있었다. 파르네세가가 있다는 말이다.
파르네세 공작과 그 후계자가 동시에 풍이라도 맞지 않은 이상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에드원 파르네세는 가능성이 있지만 여동생을 끔찍이 아낀다 알려져 있으니 논외.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요양 중이라 알려져 있는데다 가문에 순종적인 성정이라 알려져 있으니 논외.
딱 한 명밖에 남지 않는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간에. 눈앞의 이 계집이 직접 제 이름을 건 가십거리를 주간지에 실리도록 종용했다는 말이다. 스렌타인사의 편집장이 파르네세 공작의 눈밖에 날 그 기사를 기고한 이유는 알만 하고.
하지만 이쯤 되면 제 뒤로 따라붙는 욕들이 억울하지 않겠나? 잉그리드가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하길 바라고 저지른 짓들이 전부 ‘리건 에스펜서의 방만한 행실 때문’으로 남을 텐데.
“너무 싱겁게 인정해버리니까 재미가 없군. 지금 아가씨가 누굴 건드렸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리건, 당신을 모르는 사람이 수도에 있나요?”
“알아?”
자리에서 일어선 리건이 테이블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정말, 제대로 안다고?”
잉그리드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응접실 입구에 서있던 하녀가 당황해 다가오려 했다. 잉그리드가 막았다.
“괜찮아, 엘자. 리건님은 좋은 분이야. 염려 마.”
“…..아, 아가씨.”
“엘자, 가만히 있어. 끼어들지 말고.”
살다살다 이렇게 저 혼자만의 세상에 사는 여자는 또 처음이다. 이제는 엘뷔니 디어가 머리에 꽃을 달고 뛰어다니는 꽃사슴이라 해도 믿을 지경. 테이블을 짚고 있던 팔에 힘이 빠졌다. 리건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회의감이 짙어졌다.
“너무 그렇게 우울한 얼굴 하지 마세요.”
“너, 내가 오늘 왜 귀찮게 네 낯짝을 보러 온 건지는 아나?”
“제게 훈화를 주시려고요.”
꼭 그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여상한 대꾸다. 리건은 새삼 이 계집이 파르네세 공작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이쯤 되면 이 기사를 터뜨린 것이 단순히 엮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불러들이기 위한 구실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이 계집의 속은 정말로 모르겠다.
“지난번에도 했던 말이지만 결혼 상대가 내정되었으면 입 닫고 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그러면 너도 좋고 네 부모도 좋고 나도 좋고. 일석삼조잖나? 일 시끄럽게 만들면 결국 너도 손해라는 거 모르나?”
빙그레 웃은 잉그리드가 날카로운 한 마디를 던졌다.
“공께서 혼인하실 때마다 사교계가 얼마나 떠들썩했는지 잊으셨나 봐요.”
“……”
“첫 번째 부인이신 서튼 후작 영애와 혼인을 거부하신다며 약혼식 장에서 도망치시다 붙잡히셨고, 혼인식에는 대리 신랑을 세우셨다가 초야가 지난 후에 발각되셨지요. 서튼 후작 영애가 울고불고 사건을 없던 일로 해서 혼인식만 두 번, 반 년 만에 이혼. 직후 두 번째 부인이신 에일 백작가의 에스트라 에일 양과 혼담이 오가셨죠. 국왕 폐하께서 친권하신 혼인을 거부하시겠다고 남부 오옐의 어떤 평민 여자를 데려와 에스펜서 공작부인 삼으시겠다고 하셨단 이야기를 들었어요. 리건 님의 생모이신 르제나 부인께서 쓰러지실 뻔하셨다던데……. 아, 안부가 늦었네요. 부인의 건강은 괜찮으세요?”
“……”
“물론 저는 리건, 당신께서 무얼 하든 판단하지 않을 거예요. 모욕으로 듣지 말아주세요.”
이렇게 앙큼한 공격까지 해올 줄이야. 리건은 말을 잃었다. 아무리 서자라도 국왕이 아끼는 친자였다. 추문은 보통 뒤에서 흐른다. 대놓고 앞에서 지껄이는 게 아니라.
리건은 그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이 어린 아가씨가 꽤 상세한 내막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평민 여자를 데려온 건 유명하지만, ‘남부 오옐’에서 데려온 여자라는 디테일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호사가들은 ‘오옐’보다는 ‘평민’에 집중해 떠들기 바빴으니까.
“……의외로 가십을 좋아하나보지? 정숙한 아가씨답지 못하게.”
“둘째 오빠 덕에 제 귀는 이미 정숙함을 잃었네요. 즐겁게도.”
이 이상 이 여자의 뻔뻔함에 놀랄 수가 있을까.
“그래서 또 이런 짓을 할 건가?”
“아니요.”
“처음으로 네 입에서 내 귀에 반가운 소리가 나오는군.”
“자주 하면 효과가 없죠.”
누구야? 누가 이걸 보고 사슴이라고 했어!
흰사슴처럼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속 알맹이는 전혀 다른 생물이었다. 리건이 그악스럽게 잉그리드의 뒷머리채를 끌어 당겼다. 리건과 잉그리드의 얼굴이 손가락 두 마디 간격의 거리만 남겨두고 좁혀졌다. 잉그리드는 조금 어깨를 움츠렸을 뿐, 여전히 반듯하게 목을 세운 채였다. 하녀 엘자가 이번에야말로 다가오려 했지만 잉그리드는 이 상황에서도 하녀들에게 정숙을 요구했다.
리건의 입매가 흉악하게 비틀렸다.
“이봐, 진짜 어디까지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건지 모르겠는데 좋게 말해주니 내가 만만하게 느껴지나보지?”
“…….”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만한 얘기들, 이 자리에서 날이 새도록 읊어줄 수도 있는데?”
“들어보고 싶네요. 에스펜서 공의 개인적인 이야기.”
“내가 여자한테는 손 올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들었나?”
“가장 먼저 확인했는걸요.”
리건이 낮게 웃었다.
“그랬겠지, 내가 그래, 그런 쓸데없는 고상함을 가지고 있긴 한데 말이야. 가끔 정말 이렇게 좆같은 상황이 오면 꼭 그래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거든. 그리고 점점 네가 여자로 보이지 않기 시작했고 말이야.”
“곤란하네요.”
리건의 손끝이 잉그리드의 부드러운 턱과 귓가를 훑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느리게 그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탐스럽게 붉은 입술이 벌어져 의표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예전에……. 공을 뵌 적 있어요.”
“본 적이야 있겠지. 수도에서 한두 번 얼굴 스치지 않은 귀족들이 몇이나 된다고.”
“엘디스님과 함께 계셨어요.”
표정을 지운 리건이 손을 떨어뜨렸다. 엘디스 데인 카일레흐, 죽은 2왕자였다. 잉그리드가 희미하게 웃었다.
“공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실 거예요. 엘디스님과 공께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가시는 것을 제 눈이 함부로 좇았을 뿐인지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 때 리건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부터 쭉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
“모두가 행복하면 안 되느냐 이야기 하셨죠. 지금도 마찬가지이신가요?”
몇 년 전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2왕자 엘디스가 죽은 지도 어언 5년이었다. 그때의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은 닳고 닳은 정신 나간 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누그러지는 것은 죽은 형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물 끼얹은 듯 속이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글쎄.”
국왕의 총애가 있은들 리건의 왕실 생활이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왕자와 왕녀들이 그를 처음부터 받아들여준 것도 아니었다. 결국은 서자다. 하지만 엘디스는 그에게 있어 ‘형’이었다. ‘왕자’가 아니라. 그는 리건을 친동생만큼이나 상냥하게 보살폈다. 리건과 동갑인 4왕자 케인이 그걸 보고 질투심에 리건을 괴롭혔을 만큼.
냉정한 편인 1왕자조차도 엘디스의 한결같은 선함은 당해내지 못하겠다며 두손두발 다 들었다. 모두가 사랑했다. 하지만 세상은 공평하다고 열일곱에 작은 병세를 제때 잡지 못해 목숨을 잃었다. 엘디스의 죽음에 누구보다 슬퍼했던 리건을 지켜본 왕자와 왕녀들은 그를 인정해주었다. 오래 전 일이다.
“언짢아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이미 늦었어.”
“죄송해요.”
잉그리드가 그림 같은 미소로 대신 답했다.
그 엘디스가 눈앞의 아가씨의 이런 웃음에 반해 한참을 따라다녔다. 잉그리드를 보고 있자면 자신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리건은 지금보다는 더 뾰족한 아이였다. 주위에서 어여쁘다, 사랑스럽다 해주는 추앙해 받들어주니 늘 헤실헤실 쪼개고 다니는 것일 테고, 얼굴이 예쁘장한 계집애라면 웃는 게 예뻐 보이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무시했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것들이 자꾸 떠오르기 시작해 속이 쓰라려왔다. 그 때의 슬픔인지 지금의 울분인지.
“리건, 왜 당신이냐 물으셨죠.”
“……”
“여러 이유가 있었어요. 빈 에스펜서 공작부인의 자리, 혼기가 차신 젊은 공작 각하, 두 번의 결혼 실패.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당신을 택한 이유는 당신이라면 제 아버지와 오빠들이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니까요.”
리건은 마지막 말에서 묘하게 걸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납득이야 가는 말이었다. 파르네세 부자가 제 여동생을 왕비로 삼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각오를 다졌는지는 모르지만 잉그리드가 결혼상대자로 택한 것이 지위 낮고 하찮은 남자였다면 좋지 않은 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남자한테 마음 줄 만한 계집도 아닌 것 같지만.’
조건 따지는 여자치고 지고지순한 여자를 본 적이 없다.
“당신도 실패 없는 세 번째 결혼, 나쁘지 않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저는 무언가를 기대했다 실망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거든요.”
“무언가를 기대한다?”
“이를테면 사랑 같은.”
“…….”
“저는 당신에게 그런 걸 바라지 않고, 당신은 제가 바라지 않는 걸 굳이 안겨주실 분도 아닐 거라 생각해요. 저는 불행하지 않는 데에 만족할 거예요.”
뒷목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게 고작 18살짜리 계집이 하는 말인가? 보통 계집들은 사랑받는 데에 목마른 기린이었다. 목을 쭉 빼고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해줄까 두리번댄다. 대부분은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하게 되지만 가끔 비슷한 급의 영랑과 눈이 맞아 혼인을 하게 되기도 한다. 후자는 사교계 거의 모든 철부지 아가씨들의 꿈이었다.
붉은 장미의 의식이 낭만적이라 일컬어지는 건 가끔 기적적으로 그런 철부지 아가씨들의 꿈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 사랑에 질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젠체 떠드는 건 좀 웃기다고 생각 안 해? 해보기나 했나?”
“저도 사랑의 기억쯤은 있어요. 정확히는 두 번이에요. 첫 번째는 너무 많이 받아서 그걸 잃어버렸을 때 좌절했죠. 두 번째는…… 너무 많이 줘버려서.”
“…….”
“그래서 잃어버렸을 때 저도 함께 잃을 뻔했죠. 제 나이에 그 정도 경험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잉그리드는 리건과 눈이 마주치자 부러 눈웃음 쳐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