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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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아니면, 전부?
예전에 크루그가 그런 말을 했었다. 미엘은 라야바르트에서 가장 강한 네 명의 집행자 가운데 하나라고. 또한 라야의 총괄지부장 탁스 두겐도 이런 말을 했다. 전직이 아닌 현직 구현자가 등장해도 미엘이 본신을 드러내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정확히 얼마나 강한 건지 실감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미엘이라는 존재가 지닌 진정한 강함이 어떤 것인지.
하긴 당연한 일인지도. 단지 그녀의 힘을 빌린 것에 불과한 제랄딘조차도 그렇게 강한데, 당사자야 오죽하겠나. 제랄딘을 이기고 조금은 강해졌다 생각했는데, 역시 아직 멀었던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등으로부터 뛰어내리는데, 갑자기 흑요호의 꼬리 하나가 형진의 목을 휙하고 감아온다.
목을 조른다든가 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냥 부드러운 목도리를 조심스럽게 감아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게 뭔가 하고 목에 감긴 무언가로 손을 가져가려는데, 문득 뒤에서 짤막한 비명소리들이 이어진다.
“꺅!”
“언니! 갑자기 그러면!”
“어이쿠!”
뭔가 하고 돌아보니 어느 틈엔가 거대했던 미엘의 본신은 사라지고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사람들이 바닥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형진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미안, 미안. 고의는 아니야. 괜찮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털빛의 여우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 진님. 저에요.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까 이렇게 있게 해주세요. 괜찮겠죠?”
“상관은… 없습니다만.”
그 거대했던 몸집이 어느 틈엔가 다시 작고 앙증맞은 여우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 물론 풍성한 느낌의 꼬리들은 그대로였고, 단지 몸의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아졌을 뿐이다.
이쯤 되면 뭐가 뭔지 원.
형진은 일단 미엘에 대한 일은 잠시 치워놓고 코어를 마무리 짓기 위해 움직였다.
코어는 마치 옥좌와도 같은 형상의 바위 위에 얹어진 채 요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형태는 원추형의 작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 고작 이 작은 물건 하나가 지금껏 그들이 탐사하고 있었던 던전의 핵이라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코어 주위를 감돌고 있는 힘이 보이죠? 그걸 깨뜨리면 돼요.”
“알겠습니다.”
미엘의 충고에 따라 형진은 품에서 단검을 꺼낸 뒤 눈앞에 드러나는 약점을 찔렀다. 그러자 인스턴트 킬이 터지면서 목걸이를 감싸고 있던 힘이 깨지고, 동시에 짤막한 비명 같은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들이 있는 장소로부터 파동 하나가 주위로 퍼져 나간다.
“잘 했어요. 이제 저 목걸이를 챙기면 이 던전에서의 일은 모두 끝나는 셈이에요.”
“별로 달라진 것이 느껴지지 않는데요.”
“겉으로는 그렇지만 더 이상 리스폰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동굴이 더 이상 성장하지도 않을 것에요. 경험 많은 자들은 방금의 파동을 느끼고 던전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깨닫겠지만, 다른 자들은 리스폰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아차릴 거에요.”
“아하.”
아이템정보
명칭 : 영겁의 눈동자
등급 : 진귀
착용제한 : 높은 수준의 정신력을 지닌 자.
설명 : 무한한 시간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 정신력이 높을수록 위력이 증가한다.
효과 : 마법 방어 증가, 저주 교란, 마법 방해 결계 발동 가능.
강화시 효과 : 마법 방어 증가.
“오, 진귀급이군요.”
“네?”
“세상에.”
“진귀급이 뭐에요?”
집행자라 해도 아이템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서 났는지 형진이 이것저것 아이템을 보여줘서 눈이 높아지긴 했어도 진귀급은 쉽게 볼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다. 실제로 형진도 진귀급은 심연의 눈가리개 하나 밖에 없을 정도다.
“앞서의 마법 방어 결계는 코어의 고유 능력이었나 보군요.”
“그러네요.”
사람들은 형진이 건넨 목걸이를 잠시 돌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서로를 돌아보더니 눈빛으로 형진의 동의를 구했다. 물론 그로서도 이견은 없었다. 이 중에서 정신력이 가장 높은 인물이며, 또한 코어를 처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한 미엘이야말로 이 물건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이건 미엘님이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요?”
“네. 미엘님이 없었다면 이렇게 쉽게 코어를 공략하진 못했을 테고, 이 물건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것도 미엘님일테니까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받을 수밖에 없겠네요.”
형진이 목걸이를 건네자, 미엘은 여전히 그에게 목도리처럼 몸을 감은 채로 그것을 받아들이더니, 이내 꼬리를 써서 그것을 형진의 목에 걸어주었다.
“미엘님, 이건…”
예상치 못한 미엘의 행동에 형진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제 물건이니 제 마음대로 사용했을 뿐이에요. 문제가 있나요?”
“…”
일순 말문이 막힌다. 확실히 이미 그녀에게 건넨 물건이니 어떻게 쓰든 그녀의 마음대로다.
“못 말려.”
그 모습을 본 제랄딘,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유아 앞이라 대놓고 말하지는 못해도, 미엘의 사정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벌써부터 자기 남자를 챙기기 시작하는 모습에 어이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미엘은 제랄딘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내 쾌활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요. 진님에게 할 얘기도 있고 하니.”
“…”
이제껏 본신을 감추고 있었던 이유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라고 형진은 단순히 생각을 해버렸다. 하지만 왜 자신만 콕 집어서 그렇게 말을 했는지까지는 미처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곧바로 유아가 연 타운 포탈을 타고 그들은 그리칸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자, 미엘은 진과 단 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다며 시간을 내달라고 말했다.
“아니다. 유아님도 오세요. 어차피 유아님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니.”
“그럼… 실례할게요.”
유아는 자신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미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이 단순히 형진과 자신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라고만 이해했다.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단지, 좀 더 문제가 복잡해졌을 뿐이다.
형진의 방에 들어갈 때까지도 미엘은 그의 목에 목도리처럼 자신의 몸을 감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은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좀 불편하실지도 모르지만 일단 이대로 제 얘기를 들어주시길 바래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미엘은 자신의 종족이 어떤 존재이며, 또한 자신이 왜 지금껏 본신을 숨겨 왔는지를 설명했다. 유아는 옆에 앉아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마침내 어째서 지금껏 본신을 숨겨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기 시작하자 점차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껏 발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본신을 숨겨왔는데, 이제 그것을 드러냈고 다시 이렇게 형진에게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유아가 아무리 맹해도 그 정도도 추측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자, 잠깐만요. 그럼…”
“맞아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긴 했지만, 이제 저는 마음을 정했어요.”
“…”
당황스러운 건 형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당황스러움은 유아의 그것과는 조금 내용이 달랐다.
“저도 잠깐만요. 아까 보여주셨던 모습이라든가, 지금의 모습을 감안하면… 저와 맺어지는 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식으로 유아가 눈을 흘겼지만, 형진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반려가 동물이라니.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아, 그건 걱정하실 것 없어요.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저희 종족은 일반적인 생명체와는 아무래도 본질 자체가 다르거든요.”
“어떻게 말입니까.”
“아이를 갖는 방법부터가 달라요.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미엘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가능한한 두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이어갔다.
요컨대, 흑요호라는 존재는 일반적인 생물체처럼 서로의 유전자를 받아들여 자손을 번식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일반적인 생물체와 구분이 되는 것처럼 번식 방법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이다.
흑요호는 배우자가 될 대상을 찾게 되면 그 상대와 접촉한 상태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기를 흡수한다. 흑요호라는 존재가 강대한 힘을 가진 만큼, 그 후손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정기가 필요한데, 인간이든 다른 생명체이든 간에 그 막대한 양의 정기를 단숨에 충족시킬 수단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를 죽일 각오로 빨아들여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차분히 시간을 들여 조금씩 보충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일단 배우자가 정해지면 거의 상대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정기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자손을 완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일반적인 생물체처럼 임신이나 출산의 과정은 없지만, 일단 잉태의 과정이 시작되면 흑요호는 배우자와 떨어지지 않은 채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한다.
미엘이 잉태를 기피해왔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말이 쉽지. 한 남자에게 거의 종속되다시피 한 상태로 그 오랜 시간을 지내야만 한다. 물론 흑요호의 일생으로 놓고 보면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견해일 뿐, 흑요호라고 해도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가 다른 것이 아닌 이상 그토록 긴 시간을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종속된 것처럼 보낸다는 것 자체가 미엘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그것도 이제는 옛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형진은 미엘의 설명을 듣는 순간 마치 거머리나 기생충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물론 미엘이 들었으면 펄쩍 뛰었을 얘기다.
“그럼… 아까처럼 정기적으로 피를 빨면 되는 겁니까?”
그 말에 미엘은 유아를 힐끗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실 피를 빠는 건 그리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에요.”
“그럼…”
“여러 가지가 있어요. 그냥 이렇게 달라붙어 있기만 해도 미약하나마 정기를 흡수할 수 있고, 아니면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도 가능하죠. 피를 흡수하는 것은 이런 방법들 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임시방편에 가까울 뿐 완벽한 방법은 아니에요.”
“그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후딱 해치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핑이라든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할 수 있으리란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엘이 대답했다.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진님의 정을 직접 받아내는 것이겠지요.”
“네? 하지만…”
지금 상태로도 거대한 흑요호의 모습으로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내려던 형진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몸을 휘감듯 안고 있는 여성의 모습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생긴 것은 분명… 미엘이 맞다. 작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던 미엘이 여러 방면으로 아주 바람직하게 자란 그런 모습이랄까.
얼이 빠진 것은 형진만이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아 미엘이 작고 검은 여우의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아 역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육감적인 여인의 알몸에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서, 설마… 그 모습으로 말입니까?”
“네. 하지만 만약 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미엘의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이변이 일어났다. 형진을 휘감고 있던 두툼하고 커다란 꼬리들이 모두 제각각 여성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전까지 보아왔던 앙증맞은 소녀 모습의 미엘부터 시작해서, 마치 순차적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재현한 듯이 각 나이대의 모습을 갖춘 또 다른 미엘들이 어느 틈엔가 형진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었다.
꿀꺽.
형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미엘은 열 개의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렇게 굳어버린 형진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아니, 그보다는 먹음직스럽다는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앞서 약간의 피를 흡수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가슴 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잠재우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든지 원하시는 연령대의 원하시는 모습으로 맞추어 드릴 수 있어요. 아니면…”
미엘은 붉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이렇게 말을 맺었다.
“전부를 원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