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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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침공
보호와 균형이 아름과 새름이라는 새로운 추종자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을 때, 형진은 오랜 만에 그리칸에 가서 기젤의 옷가게를 방문하고 있었다.
“오랜 만이십니다. 얼굴 본지가 꽤 된 것 같군요.”
“하하, 그런가요.”
기젤의 말에 형진은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그리칸 지부 소속인데 요즘은 저택을 비워두고 섬에 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크흠. 기왕 이렇게 말이 나왔으니 그 저택 그냥 제가 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안 쓴다고 다시 돌려 드리기도 뭐하니까요. 이래저래 손 댄 곳도 많고.”
“그렇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야 저로서는 다행입니다만.”
기젤의 말 없는 압박에 형진은 지금까지 빌려 쓰고 있던 저택의 값을 치르고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그러고 보니 그리칸에 막 왔을 때는 그런 집을 통째로 빌려준다는 것에 놀랐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그 정도 저택은 바로 사버릴 수 있게 되었다. 상전벽해? 괄목상대?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다.
기젤 쪽에서도 사실 저택의 소유권을 지니고 있어봐야 별 의미가 없는 일이라 결국 거래는 현재 시세의 절반 수준으로 정해졌다.
일단 저택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자, 형진은 기젤을 방문한 진짜 목적을 꺼냈다.
“실은, 공포와 죽음께 보고 드리고 의견을 들을 안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뭔가 미리 언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예전 같았으면 일단 기젤이 내용을 전해 듣고 그것을 공포와 죽음께 전했을 텐데.
형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기젤은 가만히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채 몇 초 지나지 않아 형진에게 이렇게 답했다.
“허가가 내려 왔습니다. 잠시 손을 내주시겠습니까?”
“손이요?”
“네. 낙인이 새겨진 쪽으로.”
“…”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젤의 말에 따라 손을 내민다. 그러자 기젤은 자신의 낙인을 그에게 겹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축하합니다! 팩션 계급이 ‘상급 성도’에서 ‘조정자’로 승급했습니다!] [축하합니다! 팩션 계급의 상승으로 낙인의 효과가 대폭 추가됩니다!] [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공헌에 흡족해 하시며 축하선물을 내리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에게 ‘거짓된 천국의 총괄 지부장’ 직위를 내리셨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지부장을 거치지 않고 공포와 죽음께 직접 보고를 올리는 것이 가능합니다.[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에게 ‘스킬 마스터’ 직위를 내리셨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스킬 마스터를 통하지 않고 스킬에 관련된 업무를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 어어어?”
예상치 못한 메시지의 연속에 형진은 당황해 버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승급이야 그렇다 쳐도, 총괄 지부장이라니? 스킬 마스터라니?
“일단 상자부터 받으시지요.”
“네? 아… 네…”
기젤의 말에 따라 시선을 위로 치켜드니 이전에 보았던 황금 상자의 몇 배는 될 법한 큼지막한 황금 상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꿀꺽.
뭔가… 열어보기도 전에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느낌이랄까. 도대체 뭐가 들었기에 저렇게 커다란 상자를 내려 보낸 건지.
[감사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행동에 매우 흡족해 하시며 엄청난 보상을 내리셨습니다.] [보상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이겔 기념 금화 10000개, 반트 동화 10000개, 가스트 주화 10000개.강화석 100개.
최고급 권한 명령서 3장.
인벤토리 100칸.
무게 +10000
팩션 공헌도 10000000.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훌륭한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
뜨악.
뭔가 영이 하나 가득이다. 진짜 쏠 때는 무지막지하게 쏘는 신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0이 하나 가득 들어 있는 그 모습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다른 건 그렇다 쳐도 공헌도 천만이라니. 금화로 치면 일억 금화다. 금화 하나가 대충 한 돈 정도 되는 느낌이니까… 그러면 이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는 걸까.
“앞으로 필요한 것이 많을 테니 아끼지 말고 팍팍 쓰라고 하셨습니다. 아, 이제는 진님이 저보다 상급자이신가요. 하하. 축하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필요한 것이 많을 테니 아끼지 말고 팍팍 쓰라니. 도대체 뭘 시키려고 이러는 건가.
형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목록을 살피다가 문득 생소한 것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최고급 권한 명령서 3장이라는 물품이 바로 그것이다.
“…”
뭔가 이름만으로도 풍기는 포스가 엄청난지라 형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열어 보았다.
아이템정보
명칭 : 최고급 권한 명령서
등급 : 신성
사용제한 : 조정자.
설명 : 공포와 죽음을 대신해 최고급 권한의 명령을 발동할 수 있는 명령서.
효과 : 최고급 권한 명령 발동.
“…”
이를테면, 이건 백지 수표나 다른 없는 명령서였다. 자신이 필요할 경우 공포와 죽음의 이름 아래 최고급 권한을 임의로 발동할 수 있는 명령서. 구체적으로 어떤 명령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제한된 대리자로서의 권한에 가까운 효과를 지닌 셈이다.
형진은 이제 새로 추가된 낙인의 기능을 살폈다.
[조정자에게 부여된 낙인의 권한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른 신에 의한 천벌에 대해 완전한 면역을 부여합니다. 조정자는 임명권자인 공포와 죽음 외의 그 누구도 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공포와 죽음께서 조정자의 행위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조정자는 정해진 권역에서 새로운 신도에게 공포와 죽음의 이름을 퍼뜨리고 추종자를 선별하여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됩니다. 단, 이렇게 임명된 추종자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조정자에게 부여됩니다
-조정자는 정해진 권역에서 그 신실함이 입증된 추종자를 지부장으로 임명할 수 있습니다. 단, 이렇게 임명된 지부장은 공포와 죽음께서 재가를 내리셔야 비로소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임명된 지부장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조정자에게 부여됩니다.
-조정자는 새로운 권역에서 교단을 구성하는데 있어 필요한 사항을 공포와 죽음께 직접 보고하거나 건의할 수 있습니다.
-조정자는 자신이 임명한 추종자에 대한 처벌권을 가집니다. 단, 이 경우 공포와 죽음의 재가를 필요로 합니다.
“헐…”
형진은 조정자에게 부여된 권한을 확인하는 순간 공포와 죽음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그렇다. 공포와 죽음께서는 앞서 보호와 균형의 추종자를 모집했던 것처럼 엘리시온에서 본격적으로 공포와 죽음의 이름을 퍼뜨리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 새로 들어온 성도가 총괄 지부장의 자리에 이렇게 빨리 오른 것은 진님이 아마 처음일 겁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었다. 총괄 지부장이라고는 해도 막상 데리고 있는 집행자는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쭉정이 지부장인 것이다.
엘리시온에 교단을 설립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휘하에 집행자들을 끌어들이는 일까지 전부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만 한다. 괜히 돈이며 공헌도며 권한을 마치 폭탄 드랍하듯이 뿌려댄 것이 아니라고나 할까.
[쭉정이 아니거든?] “응?”형진은 문득 누군가가 귀에다 대고 속삭인 듯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게 누군가 갑자기 귀에 대고 속삭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환청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기젤이 씩 웃으며 이렇게 한 마디를 건넨다.
“공포와 죽음이십니다.”
“네?”
“가끔 그렇게 뜬금없이 말을 건네실 때가 있습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항상 지켜보고 계시다는 의미니까.”
“…”
항상 지켜보고 있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방금의 그 목소리가 바로 공포와 죽음이시라고?
“이상하십니까?”
“저기… 그게… 저는 영락없이 공포와 죽음께서 남신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물론 그 목소리가 딱히 여자의 것처럼 느껴졌다는 건 아니다. 정확히는 마치 헬륨 가스를 들이마신 것처럼 본래의 목소리를 알 수 없도록 변조된 듯한 느낌이랄까.
“사실 공포와 죽음께서 어떤 성별을 가지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편입니다. 그런데 진님께서는 어째서 남신이라고 생각하셨던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냥 착각이었나 보군요.”
이 세계로 오기 전에 포장마차에서 만났던 사람 좋게 생긴 인상의 남자가 사실은 공포와 죽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식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되돌려 생각해보니 정확히 어떤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지 영 애매하다. 그냥 선한 인상이었다는 것 외에는 달리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도 다시 생각해 보니 가물거릴 정도다. 오히려 어째서 영락없이 남자라고만 생각했던 걸까 싶다고나 할까.
“끙…”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다시 기억을 더듬는 일을 그만 두었다. 어째 헛수고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헛수고 맞아.] “…”들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들었다! 설마 자신의 생각마저 읽고 있는 것인가! 은밀한 부부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거야 그렇다 쳐도 마음속까지 읽고 있다니. 이건 엄연한 사생활 침해입니다! 불법 사찰입니다! 기타등등! 기타등등!
[헛소리 그만하고 대미궁으로 가라. 할 일이 있다.] “쳇.”헛소리인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을 할 건 또 뭐람.
형진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기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또 어딜 가라고 성화시군요.”
“하하. 부럽네요. 전 이곳 그리칸에서 꼼짝도 못하는데.”
“그런가요.”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저도 불러주십시오. 이곳에만 박혀 있으니 영 몸이 근질거려서.”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네, 살펴 가십시오.”
기젤이 실력을 선보인 것은 이전에 페스타가 발령되었을 때 정도지만, 허세와 망상까지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면 충분히 강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필요하다면 공포와 죽음께 부탁해서 차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형진은 공포와 죽음께서 명하신 대로 대미궁의 코어로 향했다. 그러자 곧바로 다시금 그 목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코어로 가서 낙인을 대어 보도록.] “네.”형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빛이 쏟아지는 코어의 중심부로 가서 낙인이 새겨진 손을 들어보였다. 그러자 또다시 그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난다.
[코어의 기능을 업데이트 합니다. 이 작업은 다소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작업 종료 때까지 현재 위치를 유지해 주십시오.]기능 업데이트라고? 코어에 직접?
형진도 코어에 손을 댈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코어 한두 개짜리라면 몰라도 이렇게 코어가 수십 수백개 연결된 복잡한 구조의 코어를 뜯어 고칠 엄두는 쉽게 내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엘리시온에 대한 접속 기능이 날아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공포와 죽음께서 직접 손을 대는 것이라면 다르다. 동등한 자격의 신이라면, 게다가 누구보다도 이런 류의 일에 익숙해 보이는 공포와 죽음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내가 누군데.] “…”그새 또 그걸 듣고 대답까지. 목소리는 여전히 변조되어 있지만 말투만으로도 어쩐지 으스대는 꼬맹이 같은 느낌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공포와 죽음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반응 안하십니까?”
그래서 그렇게 물어봤지만 역시나 묵묵부답. 이것은 의도적인 무시다.
“흐응…”
형진이 그렇게 콧소리를 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자 그제서야 대답이 돌아온다.
[무엄하구나. 그 웃음의 의미는 뭐냐?] “네? 제가 뭘요. 제가 언제 웃었습니까?”[…]
정말 신기하다. 분명히 뭔가 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닌데 마치 말줄임표가 소리로 표현되어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다니.
다시 그런 식으로 공포와 죽음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내 그의 눈앞에 다시 메시지가 나타난다.
[코어의 기능을 업데이트 하는 작업이 끝났습니다. 코어를 재시동해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재부팅이냐. 까짓거 그 정도야 못 기다려줄 것도 없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그때까지 신비한 빛이 쏟아지던 중심 코어 주변이 갑자기 캄캄한 어둠 속으로 잠겨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코어들이 하나씩 깨어나는가 싶더니, 이전과는 달리 아름다운 무지개빛이 뒤섞인 빛의 폭포가 다시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