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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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현신
“푸하…”
요안나는 잠시 뒤에야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키스를 멈추었다. 단지 숨을 토해내는 것 뿐인데, 목소리 끝에 하트가 붙어 나오는 듯한 그런 야릇한 느낌.
“다시… 안 올 줄 알았어요.”
“왜?”
“나… 그러는 거… 들켜 버렸으니까.”
“…”
나름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못 된 장난을 하다가 딱 걸려버렸으니,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크게 당황했던 모양이다.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겠지?”
형진의 말에 요안나는 당황한 시선을 던진다.
“벌… 주실 거에요?”
“일단 식사를 가져와봐.”
“네? 식사요?”
“왜? 싫어?”
“아뇨. 안 싫어요. 금방 준비해 올게요.”
요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우왕좌왕하더니 얼른 방을 뛰쳐나갔다. 형진은 그런 요안나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 방을 나갔다.
침실 밖으로 나가자 널따란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족히 열 명은 둘러앉아도 될 것 같은 넓이에 단이 져 있는 구조다. 하얀색의 가죽으로 된 소파 맞은편에는 제법 커다란 벽난로가 놓여져 있는데, 난방 그 자체보다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설비로 보인다.
거실 밖은 테라스와 연결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테라스와는 다르다. 아기자기한 일본풍의 정원과 더불어 마치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작은 풀장이 연못처럼 꾸며져 있다.
“흠…”
전세기 운운할 때도 그런가보다 하긴 했지만, 세인트루이스 시가지 안에 이 정도 펜트하우스를 꾸며놓고 살 정도라면 역시 꽤 능력은 있는 여자인 모양이다.
와장창!
“아차!”
그때 주방 쪽에서 냄비가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슬쩍 주방쪽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아일랜드 키친 형태로 마련된 조리대 위에 내용물을 알 수 없는 꾸러미들이 잔뜩 쌓여 있고 그 안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요안나의 모습이 보인다.
“이게 다 식재료인건가?”
“그, 그게… 당신이 깨어날 걸 기념해서 그냥 막 주문을 하다 보니…”
“…”
이것저것 무작정 주문을 해놓고도 막상 식재료가 도착하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요안나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모습을 보아하니 요리 실력도 대충 감이 잡힌다. 그러고 보니 토스트와 샐러드를 내오면서도 오랜만에 요리를 했다는 식으로 중얼거렸었다.
“일단 그 칼부터 내려놓고, 앞에 앉아. 내가 할테니까.”
“네? 하지만… 요리는 제가…”
“말 들어.”
“네.”
요안나는 칼을 들고 조리대 앞쪽에 앉았다가, 이내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일어나 조리대 위에 슬며시 내려 놓는다.
형진은 일단 사온 식재료를 구분해서 정리한 다음 냉장고에 넣는 일부터 했다. 요안나는 조리대 앞에 앉은 채 그런 모습을 지켜보더니 문득 이렇게 말했다.
“몸… 괜찮아진 건가요?”
“응. 내 아내 중 하나가 희망과 생명의 신녀거든.”
“…”
태연하기까지 한 형진의 대답에 요안나는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아내… 있어요?”
“응. 셋이나. 왜? 실망이야?”
“조금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부인이 셋이나 된다는 말에 요안나는 다시 당황했지만 그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도 일곱이나 돼.”
“네? 하지만… 저쪽으로 넘어간지 아직 일년도 안 됐잖아요.”
“저쪽엔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아…”
요안나는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고개를 숙였다. 물론 몰래 그의 육체를 탐한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우선권 같은 걸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이가 일곱이나 되다니. 이래서야 끼어들기도 난감하다.
그렇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요안나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며, 형진은 몇 가지 식재료를 꺼내 다듬기 시작했다.
“공포와 죽음께서 말씀 안 해주시던가?”
“뭘요?”
“내가 얼마나 변태 같은 놈인지.”
“그런 말… 없으셨는데요. 단지…”
“단지?”
“성심껏 보살피면, 그 노력을 무시하지는 않을 사람이라고만.”
“…”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형진은 피식 웃으며 재료 손질을 마치고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바게트 빵을 큼지막하게 썰어 준비한다. 그리고 두툼한 쇠고기를 팬 위에 올려 스테이크로 만들고 데미글라스 소스를 뿌려 준비된 빵 위에 얹는다. 여기에 반숙된 계란 프라이와 아보카도, 물냉이, 그뤼에르 치즈를 얹으면 끝.
순식간에 전문 식당에서 내놓은 것 같은 그럴 듯한 브런치가 만들어지자 요안나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진… 요리사였어요?”
“일단은.”
“…”
눈앞에 놓여진 비프 샌드위치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감탄하거나 군침을 삼키는 식의 반응은 꽤 봐왔어도, 자신의 요리를 눈앞에 두고 실망하는 모습은 또 처음이라 형진은 조금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왜? 요리사라니까 실망스러워?”
“네?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진이 이렇게 요리를 잘 하면… 제가 음식을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훗.”
형진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설마 요리로 이쁨 받는 새 신부 같은 걸 동경한 건가.
“실없는 소리 말고 어서 먹어. 식기 전에.”
“네.”
요안나는 그렇게 말하고서도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눈앞에 놓여진 비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우으으음!”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바르르 떠는 모습이 은근히 귀엽다. 외모는 브로드웨이 정상급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생각하는 거나 반응은 의외로 소녀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몇 살이야?”
“풉!”
서양인들은 의외로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이는 면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혹시 생각보다 훨씬 어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막상 묻고 보니 반응이 뭔가 격렬하다.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음… 열아홉?”
“…”
열아홉이면 열아홉이지 거기에 물음표가 붙어 나오는 이유는 또 뭔지. 확실히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더 이상 물어봐야 좋을 것 없겠다는 생각에 형진은 그냥 모른 척 하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공포와 죽음의 신녀라고 했지?”
“네.”
“그럼 뭔가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형진의 말에 요안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렇게 답했다.
“음… 신의 눈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세계의 일을 신께서 알아보실 수 있도록 눈이 되어 드리는 거죠.”
“그건 능력이라고 보긴 좀 그렇지 않나?”
그렇게 되묻고 나서야 요안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굳이 능력이라고 따진다면,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거랑… 필요할 때 신께서 제 몸에 임하실 수 있다는 거랑… 죽음의 지배를 지상에 임하게 할 수 있다는 정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죽음의 지배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죽음의 지배? 그게 뭐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정 범위 내에서 죽음을 지배하는 권능이에요. 어떤 형태의 억울한 죽음도 임하지 않도록 막아줄 수도 있고, 반대로 죽음의 축복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에게 완전한 죽음을 선사할 수도 있죠.”
같은 신녀라서 그런지 어떻게 보면 유아의 능력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유아가 지닌 기적의 성광은 아무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것을 온전하게 되돌릴 수 있고, 또한 언데드를 단숨에 날려 버릴 수 있도 있다. 물론 방금 요안나가 말한 죽음의 지배는 이루어내는 결과 자체는 비슷해 보여도 그 작용 원리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형식의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따로 신녀로서 뭔가 특별한 일은 하고 있지 않은 건가?”
그러자 요안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답했다.
“최근까지 가장 중요한 임무라면… 역시 당신의 몸을 돌보는 것이었어요.”
“그런가.”
적어도 공포와 죽음께서 신녀를 전담으로 붙여줄 정도로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본신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은 건 좀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확실하게 보호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조금은 그런 실망스러움도 윤색되는 느낌이다.
요안나는 형진이 만들어준 비프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나자, 얼른 접시를 치우고는 세면실로 가서 이를 닦았다. 그리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옷 몇 벌을 형진에게로 가지고 왔다.
“입어 봐요.”
“이걸?”
“네. 제가 임의로 사이즈를 재서 사오긴 했는데,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
“난 그냥 이옷으로도 편한데.”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괜찮지만, 이곳에서는 역시 눈에 띌 거에요. 그러니 어서 입어 봐요.”
“…”
자신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한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직접 요리를 해서 먹이겠다는 야망이 좌절되자 다른 걸 찾으려는 모양이다.
형진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요안나는 이내 조심스럽게 그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딱히 그 손길을 마다하는 느낌이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녀의 손은 점점 더 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기분이 참 묘하다. 물론 저쪽 세계에서도 메이드 차림의 마눌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적은 꽤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흥분한 표정과 시선을 감추지 않은 채 자신의 옷을 탐욕스럽게 벗기는 손길은 접해본 적이 없는 탓이다.
잘 하면 코피라도 쏟을 듯한 기세다.
하지만 형진이 그렇게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요안나는 그의 옷을 벗기고는 자신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히기 시작했다.
형진으로서는 그냥 말쑥한 정장 같은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 요안나가 그에게 입히고 있는 옷들은 좀 볼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거품을 물고 넘어갔을 만한 고가의 명품들이었다. 미국의 유명 디자이너에게 직접 주문을 넣어 만든 완전 수제품이니 한국에서 완전 흙수저의 삶을 살았던 형진으로서는 알아볼 방법조차 없었다.
옷을 입히는 일이 끝나자, 요안나는 다시 시계를 하나 꺼내서 그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그녀가 꺼낸 시계는 파텍 필립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이것도 형진이 만약 가격을 들었다면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를 질렀을 법한 고가품이다.
그런 식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끝내자, 요안나는 그제서야 마음에 드는지 배시시 웃었다. 이제까지 여자들한테 옷을 사준 적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꾸밈을 받아본 적은 없는 터라 형진은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음… 좋아요. 근데… 머리가 좀 마음에 안 드네요.”
“머리?”
유아가 가끔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지저분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손질만 한 느낌이다.
“잠시만요. 저도 옷 입고 나올 테니까 이참에 가서 머리도 하고 와요.”
“하지만…”
“금방이면 돼요. 잠깐만요.”
뭐라 말하기도 전에, 요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허겁지겁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형진은 난처해 하면서도 어쩐지 처음 겪어 보는 이런 상황이 신선해서 그냥 허허거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요안나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방을 나왔다. 여자의 외출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익히 알고 있는 형진으로서도, 그녀의 행동은 예상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재빨랐다. 어찌나 급하게 서둘렀는지, 숨까지 헐떡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형진이 못 참고 어딘가로 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움직였던 모양이다.
“가요. 제가 잘 아는 곳이 있어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형진이 그렇게 잠시 사양하는 기색을 보이자, 요안나는 얼핏 완강하게 보일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물론 형진은 꾸미지 않아도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지만, 첫 인상이란 건 뭘 하든 간에 중요한 법이에요. 같은 값이면 자신을 어느 정도 꾸민 사람이 더 호감을 받게 마련이라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여기서 요안나가 말하는 어느 정도라는 말의 기준이 진짜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형진은 아직까지도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이런 경우엔 그냥 차라리 모르고 넘어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