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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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현신
그럴 리가.
아무리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도 이런 미인이라면 당연히 기억에 남았어야 한다. 술에 취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황이라 상대의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도,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는 이 여자는 정말 이전까지 만난 기억이 전혀 없다.
“잠시만요. 흐응…”
하지만 여자는 형진이 그렇게 황당해 하는 시선을 던지거나 말거나, 작은 탄성과 함께 그에게서 몸을 떼어내더니, 옆에 놓여져 있던 수건에 미지근한 물을 묻혀서 땀과 타액에 젖은 그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기 시작했다.
형진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탓인지 그의 몸은 좀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온 몸에 무거운 추를 주렁주렁 달아 놓은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낑낑거리며 손을 조금 들어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을 정도다.
“가만히 있어요.”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음… 당신이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당신의 몸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보살핀 사람?”
“…”
“아무리 신께서 명하신 일이라도, 이런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 그렇게 강간범 보듯 하지 말아줄래요?”
형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자기가 한 일이 뭔지는 아는 모양이군.”
하지만 쏘아붙이는 듯한 그의 말에도 여자는 배시시 웃을 뿐이다.
“우후후후… 귀여워라.”
“뭐가?”
“나, 사실 이렇게 당신과 다시 대화하게 될 날을 기대했거든요.”
“…”
뭔가 이상한 여자다.
하지만 형진이 그런 시선을 보내건 말건, 여자는 계속해서 그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주더니 그 일을 마치자 조심스럽게 시트를 덮어 주고는 대야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기다려요. 잠시 몸을 좀 씻은 다음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
“…”
형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여자는 콧노래를 부르며 방을 나갔다. 잠시 그 씰룩이는 엉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가만히 시선을 돌려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자신은 여기 있다는 듯이 그의 손등에 희미하게 공포와 죽음의 문양이 떠오른다.
“음…”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형진의 몸에서 뭉클거리는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다행히 공포와 죽음에게 전해 받았던 힘들은 물론이고, 미엘과의 계약으로 얻은 힘 역시 무사한 상태였다.
몸으로부터 꼬리가 형상화되어 나타나자, 형진은 그것의 힘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깜박하고 마트를 안 들러서 당장은 이 정도밖에… 꺄악!”
몸에 가운을 걸친 모습으로 접시에 토스트와 샐러드를 담아 내오던 여자는 갑자기 자신에게 달려드는 검은 촉수에 의해 꼼짝없이 결박당하고 말았다.
“다시 묻지, 넌 누구냐.”
하지만 여자는 오히려 흥분된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다짜고짜 촉수 플레이라니.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아흑!”
“누구냐고!”
“아파요. 조금만 살살…”
“…”
“후.. 알았어요. 성격도 참 급하지. 전 공포와 죽음님을 섬기는 신녀에요. 이곳의 사람들은 마녀라고도 하죠. 이름은 요안나. 됐나요?”
신녀라. 이를테면 유아 같은 존재인가.
“좋아. 요안나. 방금 전의 그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요안나는 배시시 웃더니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몇 개월 동안 당신을 보살피다 보니… 남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당신의 원기왕성한 몸을 보는 순간 뜨거워진 제 몸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죠. 그리고… 남자의 몸은 그런 걸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잖아요. 당신을 보살피는 건 신께서 내려주신 임무였으니까요.”
“…”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요. 저, 분명히 당신이 처음이었으니까.”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긴 이 여자가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자신의 몸은 이미 죽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건 다 거짓이라도 그건 분명한 사실.
형진은 그제서야 주위를 다시 돌아보았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 오고 있다. 그렇게 밝아오는 하늘 아래 보이는 것은 마천루가 즐비하게 늘어선 어딘가의 도시 한 복판. 그리고 창문 너머로는 정원과 수영장이 살짝 드러나 있다. 아무래도 거대한 도시 속에 자리 잡은 펜트하우스가 아닐까 싶은 느낌.
“여긴 어디지?”
“샌프란시스코에요.”
“미국? 하지만 난…”
“사람 하나 정도 빼오는 건 저에겐 아무 일도 아니랍니다. 아, 물론 당신의 신분도 이미 만들어 뒀어요. 불법 체류자로 끌려갈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그나저나… 슬슬 좀 아파오거든요? 그만 내려 주시면 안 되나요? 이대로 절 범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
형진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그녀의 말대로 풀어주었다. 요안나는 다시 바닥에 내려서자 붉어진 손목을 가만히 문지르더니 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되어버린 토스트와 샐러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 직접 요리해 본 건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을 치운 그녀는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네요. 다시 움직이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 상태로는 바깥에 나다니긴 힘들겠지만요.”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래도 식재료를 주문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요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방을 빠져 나갔다. 형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창가에 놓여진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니, 천천히 태양이 떠오름과 동시에 서서히 창문이 어두워지며 빛을 차단하기 시작한다. 홀린 듯이 창밖으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요안나가 다가와 그에게 가운을 입혀 주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손길. 지난 몇 달간 그의 몸을 돌봤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공포와 죽음의 신녀라고 했나?”
“네.”
“그럼 이 세계에도 공포와 죽음의 신도들이 존재하는 건가?”
“아뇨. 저뿐이에요.”
“어째서?”
“제가 신녀가 된 것 자체가 최근의 일이에요. 그 전에도 마녀라고 불리긴 했지만 신과의 교감을 통해 신녀가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마녀? 그건 뭐지?”
형진에게 가운을 걸쳐주는 일을 끝내자, 요안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무릎에 앉아 몸을 기대왔다.
“이 세상에는 이전부터 마녀나 마법사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있었어요. 혹자는 그들을 가리켜 신이 남긴 파편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한 건 아무도 몰라요. 그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고, 대부분은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깨닫지 못한 채 죽어가죠.”
“파편이라…”
“참고로 당신도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에요.”
“나도?”
“당신의 그 능력. 바로 그게 증거죠.”
요안나가 직접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어도, 형진은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스턴트 킬임을 깨달았다.
“그럼 당신에게도 그런 힘이 존재하는 건가?”
“네. 물론 당신의 것과 같은 건 아니지만요. 사실 당신을 찾아내고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래서에요. 파편끼리는 서로 끌리게 마련이니까요. 물론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 한하지만.”
“…”
그런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형진도 요안나에게 알게 모르게 끌리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책임져야 할 부인이 셋이나 되는 몸으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웃긴 일이긴 해도, 요안나가 자신의 몸을 탐하고 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형진은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다. 사실 묻지 않아도 대충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 아버지의 재혼 이후로 붕 떠버린 상태라 취직해서 독립한 이후로는 연락도 거의 하지 않은 채 데면데면한 상태로 지내왔던 참이니까 이제는 거의 남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어떻게 보면 타나토스에서 그렇게 식구라는 것에 집착했던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가보실래요?”
“지금?”
“그럴 생각이 있으시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전세기도 있으니까.”
“전세기라…”
자신이 능력 있는 여자임을 어지간히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그럴 마음만 있다면 형진은 비행기 따위 타지 않아도 한국 정도는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는 걸.
공포와 죽음의 문양이 남아 있다면 인벤토리도 남아 있을 터. 그렇다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망상구현의 단장도 꺼내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몸이라면 한국에서 살았던 육체의 기억도 남아 있을 테니 그곳에 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형진은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황혼과 망각을 불렀다.
[진님? 부르셨어요?] [네. 잠시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요.] [뭔데요? 말씀하세요.] [제가 잠시 다른 곳에 나와 있어서 그런데, 잠시 여신님의 힘을 빌려 쓰고자 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리세요.]황혼과 망각은 곧바로 그가 원하는 대로 힘을 빌려 주었고, 형진은 임시로 황혼과 망각의 힘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잠시 다녀와야겠다.”
“네? 어딜…”
“집에. 이렇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는 아무래도 곤란해서.”
그러자 요안나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시… 돌아오실 거죠?”
“물론.”
“…”
요안나는 입술을 깨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눈을 꼭 감은 채 그에게 매달리듯 입술을 맞추었다.
“전… 이미 당신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요. 돌아오세요.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까.”
누가 보면 영영 못 돌아올 곳에 가는 줄 알겠다. 하기야 그녀 입장에서는 그만큼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알았어.”
형진은 흑요호의 힘을 불러내어 몸을 일으키고는 곧바로 황혼과 망각의 힘을 사용해 왕성 라이언하트로 돌아갔다.
순간 주위의 풍경이 물과 기름이 뒤섞인 것처럼 마구 헝클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새인가 그는 자신의 아틀리에에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형진은 곧바로 유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진?”
사제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아기옷을 짓고 있던 유아는 갑자기 형진이 기괴한 모습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서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설명은 나중에. 일단… 회복을 좀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회복이요? 어디 다친거에요? 잠시만요.”
유아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얼른 형진에게 다가와 연거푸 회복을 걸어 주었다. 과연 희망과 생명의 신녀. 그렇게 몇 번 회복을 받고 나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던 몸이 차츰 정상으로 돌아온다.
“음…”
하지만 역시 아바타 상태의 신체와는 근력 같은 면에서 아무래도 차이가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나름 관리가 잘 된 것 같긴 해도, 몇 개월 동안 꼼짝도 않고 굳어 있었던 몸과 쉴 새 없이 단련한 몸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고마워.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
흑요호의 힘을 거둬들이고 다시 지면에 서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내 몸이 맞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아바타 상태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알았어. 이제 되었으니까 그만 쉬어.”
“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의 유아에게 살짝 입을 맞추어 준 형진은, 다시 아틀리에로 돌아와 벗어 두었던 옷을 걸쳐 입은 뒤, 인벤토리에서 망상 구현의 단장을 꺼내서 그것을 사용했다. 그러자, 아까와는 달리 지구로 가는 문이 바로 열린다.
“진?”
요정의 문 너머에서 세상 다 산 것처럼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던 요안나는 눈앞에 요정의 문이 열리고 그 안쪽에서 형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요안나가 자신을 진이라고 부르는 걸 들으니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형진은 그녀의 모습을 잠시 지켜 보다가 문을 넘어가 다시 지구에 발을 디뎠다.
“진…”
요안나는 그가 자신의 앞에 서자 잠시 바르르 몸을 떠는가 싶더니, 이내 왈칵 눈물을 흩뿌리며 그대로 몸을 던져 형진의 품에 안겼다. 아마도 이대로 영영 그가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형진의 몸을 꽉 껴안더니, 이내 뱀처럼 팔로 목을 휘감으며 그에게 입을 맞춰왔다. 형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의 요구에 응했고, 둘은 잠시 동안 그렇게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