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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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진출
간단하게 새로운 장비의 시연을 참관한 형진은 유아가 머물고 있는 궁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그냥 앉아 있지 않고.”
“그럴 수야 없죠.”
어쩐지 조금 더 몸매가 풍성해진 느낌. 가만히 배를 어루만져 보니 이전과는 달리 조금 부풀어 오른 느낌이다.
“그러지 말아요.”
“부끄러워?”
“조금요.”
“후후.”
형진은 여전히 귀여운 자신의 신부에게 살짝 입을 맞춰 주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불편하고 그런 건 없고?”
“네. 다만…”
“다만?”
“이번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사실 언데드 상대라면 유아가 지닌 성광은 거의 절멸 병기 수준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형진으로서도 그녀가 지닌 이러한 강력한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당장은 산모와 아기의 안전이 최우선. 게다가 그녀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한 언데드는 왕성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다. 뭐든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라고나 할까.
“그런 소리 하지 마. 당신은 그저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만 생각해.”
“네.”
그렇게 잠시 유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 형진은, 또 다른 산모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다가 아란과 마주쳤다. 여전히 그녀는 메이드복 차림을 한 채 시녀장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일은 할 만 해?”
사실 아란이 시녀장을 맡고 있는 건 온전히 그녀의 고집 때문이라서 형진은 조금 불만 섞인 느낌으로 그렇게 물었다. 식구들이야 아란과 그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데다 지부장급의 집행자라는 신분 때문에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지만, 간혹 왕성에 방문하는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그녀를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라고 하긴 뭐하지만 형진은 형식상으로라도 그녀에게 작위를 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위 시녀들 가운데는 실제로 기사 수준의 작위를 가지고 활동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이들 가운데 왕성에서 오래 근무한 이들은 시녀장이나 시종장이라 해도 남작이나 자작 같은 작위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사실 형진의 입장에서는 아란이 자신의 왕비 대우를 받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본인이 극구 사양하는 상황이니 차선책이라도 찾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네. 모두 친절하신 분들이라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란의 아이들인 니샤와 니야는 요즘 프리츠의 아이들과 주로 노는 모양이다. 기왕이면 꼬마 공주들과 더 친하게 지내줬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역시 또래의 친구와 노는 쪽이 더 즐거운 모양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한두 살 차이도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 무작정 형진의 뜻을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잠시 얘기를 나누며 왕성 안의 정원을 거닐던 형진은 하엘이 머물고 있는 궁 앞에 도착했다.
“그럼 전 이만…”
“같이 들어가 보지 않고.”
“괜찮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도 있고 해서.”
할 일이 있는 것 치고는 꽤 느긋하게 산책을 한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형진은 아란이 나름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사실 하엘과의 일은 좀 급작스럽게 진행된 면도 있었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미엘과 함께 언데드의 영역에서 함께 활동해야 하니 좀 더 관계를 진전시킬 필요도 있었다. 어찌 보면 다른 마눌들과는 달리 순서가 영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느낌이긴 하지만, 파괴의 재생의 일이 그만큼 급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궁 안으로 들어서니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우… 어떡해. 언니. 어떻게 하면 좋지?”
“뭐가.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
“우씨!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냐고.”
“간단하지 않으면. 계약하겠냐고 물으니까 하겠다고 아우성치며 대답하던 건 어디의 누구?”
“으악! 그, 그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건… 그러니까… 본심이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해서 내가 뭔 소리를 지껄였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서…”
“기억이 안 나는 것 치고는 반응이 너무 격렬한데.”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아, 아무튼 난 모르는 일이야. 기억 안 난다고.”
“기억이 안 났으면 싶은 건 아니고?”
“으아! 언니! 정말 그러기야!”
미엘과 하엘의 그런 만담 같은 대화에 형진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잠시 모르는 척 둘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아무래도 이대로는 끝이 안 날 것 같아서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이내 와장창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뭔가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충 안쪽의 상황이 짐작이 되었지만, 형진은 모르는 척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어요.”
“응.”
들어가기가 무섭게 미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한다. 대충 그 표정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형진이 듣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렇게 대화를 유도했던 모양이다. 이 앙큼한 마눌 같으니.
미엘의 작은 몸을 끌어당겨 가볍게 포옹과 함께 키스를 하고 난 형진은 이내 시선을 돌려 한쪽에서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살짝 붉은 기가 도는 하얀 털빛의 흑요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바로 하엘이다.
원래 그녀의 털빛은 붉은 빛이 도는 검은 색이었지만, 일주일에 걸친 그와의 사투 끝에 이렇게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새로운 아이들도 처음부터 환수가 아닌 성수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정확한 건 역시 태어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몸은 괜찮아?”
“네, 뭐…”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그렇게 눈치를 살피는 하엘의 표정을 보니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뭐 저런 미친년이 다 있나 싶었는데.
“다행이군. 그럼 아이들은?”
“그게…”
하엘은 잠시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직은 아이들이라고 불릴 만한 형태가 아니긴 하다. 하지만 일단 아버지인 건 분명한 사실이니 일단 꼬리 쪽을 보여줘야 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그렇게 그에게 엉덩이를 들이밀 생각을 하니 여러모로 난감한 모양이다. 하긴 미엘도 아이들이 막 태어났을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꽤 부끄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슬슬 태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당신도 참. 아직 사흘 밖에 안 됐어요. 일주일은 걸려야 한다고요.”
“그런가.”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꼬마공주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들어온다.
“빠아다!”
“빠앗!”
“어이쿠, 우리 공주님들 오셨습니까.”
“꺄하하하하핫!”
형진이 너스레를 떨며 꼬마 공주들을 안아 볼을 부비적거리자 아이들은 간지러운지 대번에 웃음보를 터트린다.
잠시 그렇게 부녀 간의 인사를 마치자, 꼬마 공주들은 하엘의 주위에 모여들어 아직 완전히 태어나기 전인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그래봐야 아직은 작은 털뭉치 같은 느낌이지만.
“아직이에여?”
“응. 아직이란다. 동생들이 태어나려면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해.”
“동생!”
“동생이다!”
“아이, 기여어.”
“빨리 태어나쓰면 좋겠어여.”
자기들도 아직 아이들인 주제에 벌써부터 언니노릇을 하려고 드는 모습이 또 얼마나 귀여운지, 형진은 물론이고 갑작스런 그의 방문 때문에 몸이고 정신이고 바짝 굳어 있던 하엘조차 슬며시 미소를 짓고 만다.
워낙에 천방지축인 장난꾸러기 들이라 어떨까 싶었는데 의외로 벌써부터 언니 역할에 심취해 있는 모습이라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이 아이들을 누가 과연 아직 한 살도 안 된 아기들이라고 생각할까.
흐뭇한 표정으로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다.
“어, 어떡해!”
“빠아!”
“아기들! 아기들이!”
갑작스런 아이들의 말에 형진은 조건 반사처럼 얼른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퐁! 포포퐁! 퐁!
코르크 마개 빠지는 소리가 연속으로 터짐과 동시에 하얀 털뭉치들이 형진의 몸에 다닥다닥 달라붙는다.
“어?”
이런 상황, 언젠가도 겪어 본 것 같은데.
형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하얀 털뭉치들은 일제히 아기들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헛!”
“버, 벌써? 어떻게?”
하엘은 자기가 낳고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떻게 된 것이 산모보다 가까이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먼저 이상을 알아차리는 건지. 하기야 이번 경우에는 임신부터 출산까지 모든 것이 예상을 철저히 벗어나 버린 상황이긴 하다. 따로 출산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마저 붕괴되어 버리고 있으니 역시 하엘 본인이 가장 당황스럽지 않을까.
“아기다!”
“동생이 태어나쩌여!”
“동생! 동생!”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또한 당황스러운 탄생의 순간을 목격한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하늘을 마구 날아다니며 동생이라는 이름을 연호하니 그렇지 않아도 정신 없는 상황이 더욱 정신 없게 바뀌어 버린다.
“어, 어쩌지?”
“잠시만요.”
같은 상황을 두 번째 겪는 것이지만, 형진도 그리 능숙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 자리에 미엘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자… 받으세요.”
“이건…”
미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형진에게 배내옷을 건넸다. 어차피 이렇게 달라붙은 상황에서는 첫 꼬리가 나올 때까지 떨어지지 않으니 아기들을 돌보는 것도 당분간은 형진의 몫이 되어 버린다.
형진이 조심스럽게 아기들을 안아서 옷을 입히기 시작하자, 하엘은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인간형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저, 저기… 도와드릴까요.”
뭔가 상황이 반대가 되어 버렸다. 보통은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가 이런 일들을 하게 마련인데, 정기가 워낙 왕성하다보니 오히려 하엘이 따돌림을 당하는 형국이 되어 버린다.
“그럴래? 그럼 차례대로 옷 좀 집어줘.”
“네.”
형진과 하엘이 그렇게 조심스럽게 아기들에게 옷을 입히는 동안 미엘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법석을 떨고 있는 꼬마 공주들을 진정시켰다. 역시 미엘. 다른 사람들이 다 정신없어 하는 와중에도 차분하게 상황을 조율하는 그녀의 모습에 형진은 살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일단 옷을 다 입히고 난 형진은 바로 식구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에엣! 벌써요?
“아니, 무슨 애를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맙소사.”
“오빠… 역시 인간을 넘어섰군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스스로가 생각해도 뭔가 난감하다. 유아는 이제 막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는 도중인데, 순식간에 아이가 열 셋으로 불어나 버렸다. 역시 조금 도가 지나친 느낌이랄까.
“형은… 아무래도 다산이라든가 그런 쪽의 신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과연.”
크루그의 말에 오귀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째서인지 하마란이 형진을 향해 기도드리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대충… 뭘 기원하는지 알 것 같지만 그냥 입을 다무는 편이 낫겠지.
“크흑… 부럽지 않아. 부럽지 않다고!”
“하하하.”
할이 그렇게 외치며 어디론가 달려가자 프리츠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 갔다. 나가기 전에 역시 보스라는 듯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는 모양새가 어쩐지 좀 묘한 기분을 일으킨다.
“야구팀은 물론이고 축구팀도 만들 수 있겠네요. 교체 선수까지 채워서. 맙소사.”
어이없어 하는 제랄딘에게 아란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제랄딘님도 얼른 낳으셔야죠.”
하지만 제랄딘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저는… 좀 미뤄둘까 하는 중이에요. 유학 문제도 있고.”
“아. 지구 쪽의 학교에 다닐 계획이라고 그러셨죠.”
“네. 아란님은 소식 없나요?”
아란은 갑작스런 반문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요? 어, 그게…”
“오호라. 뭔가 있군요?”
아란은 눈치를 살피더니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제랄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은… 기미가 있긴 한데.”
“정말요?”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확실한 건 좀 더 있어 봐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엘이 그랬던 것처럼 아란 역시 일주일을 통째로 들여서 초야를 보냈으니까. 오히려 결혼한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소식이 없는 제랄딘 쪽이 이상한 쪽이라고 해야 하나.
“축하해요. 언니.”
조금 마음이 쓰일 만도 한데, 제랄딘은 그냥 좋게 웃으며 그렇게 축하를 해주었다. 예전엔 다소 조급한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지만, 학교 문제도 있고 해서 이제는 이것도 운명이겠거니 하는 모양이다. 아란은 그런 제랄딘에게 조금 미안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마주 웃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다만… 폐하께는 확실해 지면 말씀드리고 싶으니까 비밀로 해주세요.”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그렇게 형진의 가족이 착실하게 늘어가는 와중에도 언데드 영역으로의 원정 준비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아기들이 태어난 지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때, 마침내 첫 번째 원정 준비가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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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