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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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침묵
쩌저저저적!
거대한 고목나무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티폰의 몸은 핵으로부터 하얗게 탈색되어 가기 시작한다. 끈질기게 재생하며 브레스를 막아냈던 무지막지한 두께의 껍질들은 순식간에 말라가며 하얗게 결정화하기 시작했고, 세차게 깜빡이며 검은 빛을 쏘아내 하던 눈동자 역시 그대로 멈추어 선 채 메두사의 시선을 받은 것처럼 암석화 되기 시작한다.
티폰은 그렇게 죽으며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놈의 주위를 폭풍처럼 멤돌던 암석 파편들은 가해지던 힘일 잃는 순간 구심점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파편에 섞어 있던 반쯤 부서진 언데드들도 마찬가지. 형진의 일격에 티폰이 죽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미엘과 하엘은 그렇게 사방으로 흩어지는 언데드들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진! 언데드들이!”
“저거… 그냥 놔두면 안 되지 않아요?”
“아차!”
형진은 급히 티폰의 내부로부터 빠져 나왔지만 행성 규모의 천체 주위를 돌고 있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걸 막아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규모라면 황혼의 결계를 써서 어떻게든 흩어지는 걸 막아내겠지만, 그가 활용할 수 있는 황혼의 힘으로는 행성 하나를 통째로 감싸는 건 처음부터 무리였다.
곧바로 형진과 미엘, 그리고 하엘은 동분서주 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언데드들을 처리하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결국 어떻게든 흩어진 언데드들을 찾아내 파괴하는 일을 마치고 나자 그대로 하루가 꼬박 지나버리고 말았다.
“후우… 지쳤어요.”
“나도.”
분신이며 아바타까지 모조리 동원해서야 겨우 뒤처리를 마쳤을 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에 절여진 다음이었다. 형진은 일단 미엘과 하엘을 돌려보낸 뒤, 추가로 보충한 위성들을 티폰의 거대한 사체 주위에 배치했다. 다른 언데드들과는 달리 인스턴트 킬에 의해 죽고 나서도 사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뭔가 불안했던 탓이다.
혹시 몰라서 티폰의 핵과 껍질의 잔해 일부를 채취한 뒤에야 비로소 형진은 거짓된 천국으로 귀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잠시만요!”
형진이 귀환하자 이제나 저제나 하며 기다리던 여신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의 몸을 정화하기 시작한다. 언데드의 영역에서 좋지 않은 기운이나 물질이 묻어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그렇게 법석을 떨며 여신들이 정화를 하고 나서야 겨우 입고 있던 슈트를 벗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여기 블랙박스.”
“감사합니다.”
형진이 건네주는 블랙박스를 받아든 프리츠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난뒤 급히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블랙박스에 담긴 자료들을 분석한 다음 필요한 부분을 추출해 미리 수배해둔 연구소에 배포하기 위해서다.
“고생하셨어요.”
요안나가 다가와 시원한 음료를 건네자 형진은 먼저 귀환시킨 미엘과 하엘에 대한 일을 물었다.
“둘은 어때?”
“신들께서 확인했는데 딱히 문제는 없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늘 하루 정도는 아이들과 접촉을 피하도록 해두었습니다.”
“그래.”
특히나 하엘의 아이들은 한참 정기를 받아들여서 성장하는 시기라 자칫 나쁜 기운을 받아들이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정기를 공급하는 것은 형진의 본신이지만, 혹시라도 탈이 생길 수 있으니 안전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접근을 금하는 것이 옳다.
잠시 긴 의자에 거의 눕듯이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제 봤을 때와는 또다른 느낌의 검은 색 드레스를 입은 희망과 생명이 조금 거만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겨 회장님이나 앉을 법한 커다란 의자를 꺼낸 희망과 생명은 형진의 앞에 마주 앉으며 말했다.
“들었어. 말도 안 되는 놈이랑 마주쳤다고?”
“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녀석이더군요. 그런 놈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저쪽에서의 일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제단을 살피던 허세와 망상이 아유무를 떼어놓고는 허겁지겁 달려와 그들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이것저것 정화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던 꼬맹이 여신들도 어기영차 소리를 내며 형진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는다.
“너희들은… 도대체가…”
희망과 생명이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자, 보호와 균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왜? 뭔가 문제라도? 아, 감사합니다!”
당연하다는 형진의 어깨 한쪽에 자리 잡은 채 요안나가 건네는 주스를 받아드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에 희망과 생명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다. 말을 말자.”
피식 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허세와 망상이 급히 형진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떤 놈이었지? 설명 좀 해봐.”
“음… 정확한 크기는 일단 프리츠가 블랙박스를 분석하면 밝혀지겠습니다만, 일단 간단히 말하자면 행성 규모의 언데드였습니다.”
그러자 꼬맹이 여신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래도 행성이 뭔가 싶은 기색이었지만, 다행히 지구에서 인간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제법 되는 희망과 생명이나 허세와 망상은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뭐? 그게 말이 돼?”
“맙소사. 그런 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네.”
형진이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두 신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런 그를 바라만 보았다. 행성 규모의 언데드가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걸 때려 잡고 왔다는 사실도 쉽게 믿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기… 행성이 뭐에요?”
“그건 말이죠…”
보호와 균형에게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행성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동안 희망과 생명, 그리고 허세와 망상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형진은 요안나에게 음료수를 한 잔 더 청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여신께서 건네주신 성물이 아니었다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응? 그걸 썼다고?”
“네. 규모가 워낙 큰데다 재생력까지 막강해서 애를 먹었는데, 성물을 써서 간신히 틈을 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 여신님의 덕분입니다.”
희망과 생명은 갑자기 안절부절 하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답했다.
“크흠. 그, 그래. 그럼 그건…”
“그게… 다시 찾아보려고는 했는데 브레스가 직격할 때 휩쓸렸는지 다시 찾을 수가 없더군요. 죄송합니다.”
“그랬… 구나. 크흠.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어째서인지 안도하는 여신. 하지만 뒤이은 형진의 말에 다시금 화들짝 놀라버린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다음 탐사 때도 부탁드렸으면 합니다. 일반적인 성물과는 차원이 다른 효과를 가지고 있더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그, 그게…”
참고로 여신이 건넨 성물은 단단히 밀봉된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여신의 신성력이 마치 체취처럼 진하게 풍겨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 성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희망과 생명은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어쩐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다.
“아, 알았어. 네가 꼭 필요하다면야.”
“감사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세와 망상이 질문을 던진다.
“그 정도의 존재라면 필시 보통은 아닐 텐데, 혹시 이름은 확인이 되었나?”
형진은 바로 답했다.
“네. 죽었을 때 ‘티폰’이라고 나오더군요.”
“티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문득 아유무가 요안나를 따라서 허세와 망상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주다가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외쳤다.
“나 그거 알아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막 엄청 센 괴물 아니에요?”
“그래? 지구의 신화라… 흥미롭군. 우연이라기엔 뭔가 기이한데.”
그러자 혼자서 괜히 어쩔줄 몰라하고 있던 희망과 생명이 얼른 말을 받았다.
“세상엔 의외로 우연이 별로 없는 법이지.”
“하긴.”
허세와 망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진이 물었다.
“그럼 두 분은 제가 상대한 그 놈이 지구의 신화와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질문을 던진 건 허세와 망상을 향해서였지만 대답을 한 건 희망과 생명이었다.
“아마도. 물론 실제로 그런 놈이 지구에 나타났었다면,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대화나 나누고 있진 못했겠지. 당연히 너처럼 무엄한 녀석도 태어나지 못했을 테고.”
허세와 망상 역시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의식에 관여했을 수는 있다는 얘기지.”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형진이 그렇게 되묻자, 어디에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가능하다.]다름 아닌 공포와 죽음의 목소리였다.
“쳇. 목소리 좀 안 듣고 지내나 했더니.”
희망과 생명은 대뜸 싫은 표정을 지었고, 허세와 망상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둘 다 공포와 죽음의 존재 때문에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좋은 얼굴로 반기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포와 죽음은 두 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쿨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상황을 확인하고 나서 바로 몇 가지를 확인해 봤는데, 녀석이 지구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유가 있겠군요.”[그래. 녀석은 지구를 먹이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다.] “먹이? 먹어치운다고요?”
[맞아.]
행성을 먹어치우는 괴물이라. 확실히 그 정도 규모가 되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법도 하다.
“근거는?”
불퉁거리는 느낌으로 희망과 생명이 짧게 묻자, 공포와 죽음이 바로 답했다.
[인간의 내면에 스며들어 있는 공포는 내 전문 영역이지. 그것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테고, 중요한 건 바로 앞서 타나토스에 일어났던 페스타 소동의 원인이야.] “지구에 침잠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사기 말씀이십니까?”[그래. 그것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나는 어째서 그런 막대한 양의 사기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채 그렇게 가라앉아 있기만 했는지가 조금 의문이었어. 다른 신들의 관여가 없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뭔가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 “아…”
듣고 있던 이들은 그제서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페스타 소동만이 아니라 뒤이어 파괴와 재생이라는 존재의 난동까지 뒤섞이다보니 미처 그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지구의 사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정도로 엄청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양의 사기가 필요해. 놈이 다음 사냥을 위해 차분히 지구의 인간들이 지닌 심층 의식을 조작해서 자신을 영접할 수 있도록 사기를 축적시켜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야.] “하긴… 그럴 법 하군요.”헤르타 지부에 모여드는 사기의 양과 그것으로 인해 등장하는 언데드의 규모를 생각해 봐도, 행성 규모의 존재인 티폰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사기가 필요하다는 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놈은 그런 식으로 어딘가의 행성에 존재하는 이성을 지닌 생명체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어 사기를 축적시켰다가, 자신을 불러들일 수준이 되면 한꺼번에 격발시켜 그곳으로 찾아간 뒤 모조리 먹어치우는 방법을 써왔던 것이리라.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생물체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놈이 신화적 존재라면 그 정도 시간의 흐름 정도는 그저 잠깐 눈을 감았다 뜨는 정도의 찰나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마치 인간의 하루와 하루살이의 하루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럼… 어쨌든 네가 다시 한 번 이 지구를 구한 셈이 되는건가.”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하하…”
희망과 생명의 말에 형진이 쓴웃음을 짓자, 허세와 망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지. 그런 놈이 하나뿐일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
문득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은 침묵에 잠겼다. 확실히 일리 있는 얘기다. 티폰이라는 존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지구라는 진수성찬에 서로 빨대를 꼽기 위해 모두 함께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식의 결말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다음 탐사 때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닌가요?”
꽃과 바람의 조심스러운 말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이번 탐사에서 티폰을 발견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다음 탐사에서도 볼 수 있겠죠.”
그러고 보면 타나토스에서와는 달리 지구와 연결된 거짓된 천국에서 페스타가 발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즉, 여러 마리의 티폰이 지구에 빨대를 꼽으려 드는 상황이라 통로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다음 탐사에서도 그런 녀석과 마주치게 된다는 결론이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그날의 일에 대한 간단한 정리를 마친 다음, 형진은 대부분의 아바타를 회수해 휴면 상태로 전환시켰다가,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서 엘리시온에 한 개체를 남겨 두었다. 바로 티폰이 떨어뜨린 룻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