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04
00604 137. 확대 =========================
결행을 다짐한 것은 어리석은 불나방만이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오늘도 어김없이 애꿎은 화장실 벽을 들이받으며 내구도를 시험하고 있던 희망과 생명은 주먹을 불끈 쥐고 그렇게 외쳤다.
모처럼 아름다운 해변에서 즐기는 여름휴가. 헐벗은 남녀가 하루 종일 함께 지내다 보면 뭔 일이 나도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과 생명은 초조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어째서인지 좀처럼 그럴 듯한 기회가 생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쌍둥이 자매와 꼬맹이 여신들이 왁자지껄 노는 동안 열심히 요리나 기타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형진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밤에 뭔가 므흣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던 기대는 두 명이나 되는 형진의 부인에게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버렸다. 뭔가 상황은 그럴 듯한데, 실질적으로는 알맹이가 전혀 없는 그런 상태라고나 할까.
물론 이것은 희망과 생명의 잘못도 있었다. 자신 정도의 미인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면 형진 같은 변태가 가만히 놔두겠는가 싶었다. 변태면 변태답게 좀 들이대고 그런 면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럼 몇 번 튕기다가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으면 못 이긴 척 받아들여 줄 텐데, 이 망할 변태는 여신들의 수영복 입은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이상의 뭔가를 하려고 들지를 않는다.
“이대로는… 안 돼.”
이렇게 멀거니 쳐다만 봐서는 될 일도 안 된다. 천년만년 이 해안에서 휴가를 즐길 것도 아니고, 파괴와 재생이라는 강대한 적의 존재에 대적하기 위한 준비가 점차 현실화되어 가는 시점이란 것도 고려해야 한다. 자칫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또다시 언제 지금 같은 상황이 만들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소 조급한 결정이긴 하지만, 희망과 생명은 좀 모양이 빠지더라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자존심이고 뭐고를 찾으니까 일이 진척이 안 되는 거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일직선으로 돌진할 뿐이다.
“그래. 방법은 그것뿐이야.”
사실 이건 꽤나 위험천만한 계획이다. 살짝 공주병 기질마저 있는 희망과 생명이다 보니, 설마 자신이 먼저 다가서는데 거부할 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물론 무려 헐리웃의 여신이 먼저 다가서는데 그걸 거부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기는 해도, 엄연히 세상에는 만의 하나라는 가능성이라든가 예외라는 것이 있음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
어쨌든, 시간은 흘러 마침내 해가 지고 어둠이 세상에 내려 앉기 시작하자 결행을 다짐한 자들의 움직임은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있다가…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네?”
언제나처럼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식기를 형진에게 돌려주면서 희망과 생명은 그렇게 슬쩍 말을 던지고는 얼른 도망치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형진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 그녀의 행동은 사랑에 빠져 고백을 준비하는 여성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부모의 원수에게 결투장을 내미는 무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
“글쎄요.”
요즘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고는 있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살짝 형진을 향해 풍기던 핑크빛 무드 같은 것도 어쩐지 좀 변질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원래부터 좀 툴툴거리는 면이 있었지만 요새 들어서는 화난 듯한 표정 밖에는 보여주지 않으니 당사자인 형진으로서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요안나는 어렴풋이 혹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형진에게 조언할 정도의 확신은 없었고, 내막을 대략이나마 알고 있는 공포와 죽음은 굳이 그걸 말해줄 이유가 없었다.
모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이고 알콩달콩 신혼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데 원래부터 함께 했던 이라면 몰라도 다른 이가 끼어드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형진이 스스로 원해서 그녀를 취한다면야 상황은 좀 다르다. 공포와 죽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를 생각이지만, 앞서서 희망과 생명을 취하도록 도울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특히 더.
다시 시간이 지나 점점 밤이 깊어가기 시작했다. 희망과 생명은 자신의 방에서 거울을 살피며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우… 진정하자. 진정.”
너무 과하지 않도록 살짝 화장도 했고, 몸도 몇 번이나 깨끗이 씻은 뒤 어렴풋한 정도로 향수까지 뿌렸다. 어차피 스스로 먼저 다가서기로 한 마당이긴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와의 밤을 준비하는 것 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형진의 눈길이 유독 오래 머물던 하얀색 비키니에, 얇은 린넨 셔츠를 걸쳤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입었던 그 복장이다. 밤바람 때문에 좀 추울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좋은 핑계거리가 될 수 있다. 좀 상투적이고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춥다며 품 안으로 돌진하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쓰여 온 뇌살 방법 가운데 하나니까. 원래 고전적이고 상투적인 수단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만큼 효과가 있으니까 자주 쓰이는 것 아니겠는가.
“좋아. 준비 완료.”
거울을 보며 뭔가 빠뜨린 것은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희망과 생명은 마침내 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형진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다가가 가볍게 노크를 했다.
그러자 제랄딘이 문을 열고 나와 그녀를 맞이한다.
“여신님?”
엉뚱한 인물의 등장에 희망과 생명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진은?”
“씻고 있어요.”
씻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도, 어쩐지 진의 벗은 몸이 연상되어 버렸다. 희망과 생명은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지만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렇게 말했다.
“끝나면 밖에서 잠깐 좀 보자고 전해줘.”
“지금요?”
그때, 욕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망과 생명은 방금 전에 떠올렸던 일들이 생각나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 그래. 그럼 부탁해.”
제랄딘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희망과 생명은 후다닥 도망치듯 그 장소를 벗어나 버렸다.
“무슨 일이야?”
형진은 요안나와 함께 욕실에서 나오다가 얼핏 말소리를 듣고는 제랄딘에게 물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장작 좀 더 써도 되냐고 그러셔서 그러라고 했어요.”
“그래?”
뭔가 그런 얘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요안나가 정성스럽게 몸의 물기를 닦아주기 시작하자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이렇게 자신의 의도가 사전에 공포와 죽음에 의해 사전에 차단되어 버렸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희망과 생명은 후다닥 별장을 빠져 나왔다. 그러자 모닥불 주위에 여신들과 함께 둘러 앉아 무언가를 구워먹던 새름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걸었다.
“여신님? 어디 가세요?”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의외의 장애물과 마주친 희망과 생명은 또한번 당황해 버렸지만, 역시나 헐리웃의 여신이라 불리는 여배우답게 인생 연기 수준의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잠깐 바람 좀 쐬려고.”
“바람… 인가요?”
바닷바람, 그것도 밤에 불어오는 바람은 잠이 안 온다고 맞고 그럴 만한 것이 아니다. 그림은 그럴 듯 해 보일지도 몰라도, 찝찝한 소금기가 가득 묻어나기 때문에 피부에도 별로 안 좋다. 피부가 생명인 여배우로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라고나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름이었지만, 이내 여신이니까 뭔가 다른 대책이 있겠거니 하며 잘 다녀오시라는 말을 건넨다.
“휴우…”
모처럼의 결행인데 처음부터 들키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전부 머리에 꽃바구니가 들어찬 바보들뿐이라 다행이다.
“크흠.”
어쩐지 제랄딘이 자신의 의도를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여배우면 뭐하나. 정작 중요할 때는 자신을 다 드러내 보이는데. 이런 연기력으로 잘도 헐리웃의 여신 소리를 들었구나 싶어 자괴감마저 느껴진다.
그래도 일단 첫 번째 관문은 넘었다. 바람이 좀 쌀쌀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 어차피 잠시 뒤 그가 오면 추위 따위 금방 잊어버리게 될 테니까.
“꺄아…”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뺨을 감싸 쥐고 혼자 꺅꺅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늦게까지 먹이 사냥에 열중이던 갈매기들이 얼른 도망쳐 버린다.
한편, 오늘 밤을 결행의 시간으로 잡은 또 다른 집단 역시 그즈음부터 행동을 시작했다.
“출발.”
그들을 이끄는 자의 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픽업트럭 두 대에 시동이 걸리고 헤드라이트가 켜진다. 이번 거사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열두 명. 모두 공화국에서 가려 뽑은 최고의 전사들이다.
두 대의 차량은 곧바로 가도를 달려 목표가 머물고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별장을 감시하고 있던 다른 나라의 세력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두 대의 트럭과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 챘다.
“보고 올리고 드론 띄워!”
“지급이다!”
하지만 그들이 달리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두 대의 트럭은 곧장 별장의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충돌한다!”
앞선 픽업트럭에 탑승한 자들은 격돌시의 충격에 대비해 몸을 움츠린 채 곧바로 뛰쳐 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응?”
분명 별장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철창으로 된 문을 향해 돌진했는데, 별다른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새카만 어둠이 그들의 주위를 가득 채워 버린다.
“부대장 동지. 이게 어이된…”
섬광탄이 터져서 시야가 제한된 상황이라면 몰라도, 이런 완전한 어둠이라니. 얼마나 놀랐던지 운전자의 입에서 바로 문화어 억양이 튀어 나와 버리고 말았다.
“정신 차리라. 미제 승냥이들의 간악한 술수일 뿐이니까. 야시경 착용하라. 날래!”
“네!”
부대원들은 급히 야시경을 착용했다. 현지에서 급히 조달하다보니 영 성능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야시경이다. 이 정도 어둠쯤은 간단하게…
“어?”
“이게… 어드러케…”
보이지 않는다. 야시경이고 나발이고 쓰나 안 쓰나 아무 차이가 없다.
“이 망할 뚱아이 아새키들이!”
뚱아이란 북한 사람들이 중국인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다. 이를테면 한국 사람이 중국인을 짱깨라고 부르는 것처럼.
“어캅니까?”
“뭘 어캐? 조명탄 던져!”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작전이고 나발이고 전부 물 건너 가버린다. 부대원들은 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지니고 있던 조명탄을 주위에 던졌다.
그들은 이내 주위가 환하게 밝아질 거라 생각했다. 야시경이야 고장이 났다 쳐도 조명탄은 얘기가 다르니까.
팟! 파츠츠츠츠!
곧바로 조명탄이 터지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진다. 하지만 부대원들의 예상과는 달리, 주위를 에워싼 어둠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 이게… 도대체…”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 어둠이 일반적인 종류의 것이 아님을 인지했다. 누가 말해 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바로 머리 속에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그것의 이름은, 다름 아닌 죽음의 천사.
“그게… 날조가 아니었단 말인가…”
부대장은 무기를 뽑아든 채 눈을 부릅뜨고는 손으로 더듬어 자신이 아직 차 안에 타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외쳤다.
“옆 사람의 어깨를 짚은 채 하차한다! 야간 행군 대형으로! 서둘러!”
무작정 차를 달리다가 어딘가로 굴러 떨어지거나 하면 그 순간 몰살이다. 코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의 행군이라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그렇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부대장은 그렇게 외치고는 급히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무기를 겨눈채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짚는다.
“낙오하면 끝장이다! 정신 차리고 간다! 알았나!”
하지만 어찌된 일일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알았냐고 묻지 않…”
부대장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뒤를 돌아본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붉게 빛나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떤 존재였으니까.
반사적으로 공격을 가하려 했지만, 미처 그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가기도 전에 부대장은 목덜미에 가해지는 묵직한 타격으로 인해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부대장을 일격에 침몰시킨 그 존재는, 이내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명하신대로, 모두 사로잡았습니다. 나의 신이여.”
그의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수고했다. 렐그낙.”
부대원들이 도달한 곳은 별장 안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 계산조차 되지 않는, 아직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별 한복판에 떨어졌다. 게다가 죽음의 천사와는 마주해보지도 못했다. 그들을 제압한 것은, 다름 아닌 렐그낙. 이전에 가장 오래된 자를 지키던, 최초의 노스페라투라고 칭해지던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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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