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11
00611 139. 암투 =========================
“으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희망과 생명은 정신을 차렸다. 살짝 벌어진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잠시 눈을 찌푸리던 그녀는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후다닥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널찍한 침대에는 오직 그녀 혼자만이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얼른 몸을 살폈지만, 어느 틈엔가 제대로 잠옷도 입고 있는 상태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자신이 꿈이라도 꾼 건가 싶은 마음에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던 희망과 생명은 이내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너…”
“깼어?”
방으로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공포와 죽음이었다. 아바타 상태도 아니고, 그냥 본신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신이라 해도 외부의 위협에 노출되면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본신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칫 잘못해서 파편이라도 떨구면 꼼짝없이 엘리시온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포와 죽음은 본신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신이기도 하다. 같은 신들조차도 그녀의 본신을 본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일어났으면,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그는 지금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니까.”
“…”
공포와 죽음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는 옷가지들을 정리하며 그렇게 말했다.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한 느낌이 전혀 없다. 마치 숙련된 메이드, 아니 이 경우엔 가정주부 같다고 해야 하나.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있으면 안 돼?”
“…”
“사용인들 전부 휴가 보냈다며. 설마 네가 이 넓은 집의 일을 다 할 거야?”
“그야…”
둘만의 달콤한 생활을 기대하며 전부 휴가를 보내긴 했지만, 공포와 죽음의 말대로 그녀는 집안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희망과 생명은 어쩐지 좀 억울했다. 이를테면 지금은 그녀와 형진만의 신혼 기간. 이런 시간을 누군가에게 방해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신혼을 방해 받은 건 마찬가지라고.”
“뭐? 하지만…”
제랄딘은 형진과 맺어진지가 꽤 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신혼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지.
희망과 생명의 의문어린 시선에 공포와 죽음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본신을 드러낸 건 얼마 되지 않았거든.”
“아바타 따로 본신 따로 라는 거야?”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내 경우엔 벌써 세 번째 신혼이 되는 건가.”
“뭐야 그게!”
장난 하냐고 소리를 빽 지르려다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잠깐만. 세 번째라고? 제랄딘에 본신… 하나가 비는데?”
희망과 생명의 말에 공포와 죽음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사실은 아란도 나였어.”
“뭐?”
희망과 생명은 순간 머리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란.
형진이 타나토스로 넘어가 처음으로 만났던 여인. 비록 과거를 지니긴 했지만, 눈웃음이 매력적인 그런 여인.
“맙소사.”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게다가 이젠 본신까지. 이래서야 사실상의 본처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맺어진 자신과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라고 해야 하나.
“이건 우리 둘 외에는 너한테 처음으로 알려주는 거니까, 당분간은 입을 다물어 줬으면 해. 언젠가는 털어놔야겠지만, 그건 우리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끙…”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에 희망과 생명은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란 때는 일주일간 두문불출하면서 단 둘이 지냈다고 그랬다. 모습을 보아하니 둘이서 엘리시온에서 지냈던 것이 아닐까 싶긴 한데. 그렇다면 도대체 저 둘은 다른 사람들 몰래 얼마나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다는 얘기인가.
“우으으…”
보통 로맨스 소설이나 순정 만화를 보면 역경을 딛고 원하는 상대와 결혼이든 뭐든 맺어지는 순간이 결말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맺어지는 그 순간까지는 연애지만. 그 이후는 엄연히 생활의 영역이니까.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희망과 생명은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분명 어제 그와 맺어지고 정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것이 잉태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생명을 다루는 여신인만큼, 원한다면 바로 잉태로 이어지도록 자신의 몸을 조절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신혼을 좀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제는 그런 일을 떠올릴 경황조차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만.
그러고 보면 유아와 그가 관계를 가질 때는 하룻밤 동안 숫자를 세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수없이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는 했다. 그런데 자신은 고작 한 번의 관계조차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욕망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그가 이런 자신을 보고 정나미가 떨어졌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맺어지기만 하면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제랄딘에 이어 아란까지 공포와 죽음의 아바타였다니.
형진 주위에 신이 몇인가. 자신을 비롯해서 꼬맹이 여신 3총사에, 비와 낭만, 그리고 허세와 망상까지. 게다가 직접적으로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뢰와 헌신의 추종자도 곁에 머물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은 일인지.
“여우같은 계집애.”
어쩐지 크게 손해를 본 것 같은 기분을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 희망과 생명은, 욕조에 얼굴을 담근 채 괜히 거품을 부글부글 뿜어냈다. 볼을 잔뜩 부풀린 모습이 어쩐지 배가 통통하게 불어난 복어 같다.
“응? 잠깐만.”
그렇게 괜히 애꿎은 물에 대고 심통을 부리던 희망과 생명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어차피 자신은 처음부터 속일 만 한 건덕지가 없었다. 본신은 이미 유아의 몸 안에 봉인이 되어 버린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건 바꿔 말하자면, 나중에 본신이 해방되면 자신도 공포와 죽음처럼 몇 번에 걸쳐 신혼 생활을 만끽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렇다. 공포와 죽음이 했던 일, 자신이라고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혹시라도 권태기가 올 것 같으면, 그때마다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어 내어 다시 신혼을 즐기면 되는 거다.
“나… 너무 똑똑한 거 아니야?”
스스로에게 감탄해 버렸다. 이런 놀라운 계획이라니.
공포와 죽음의 등장 때문에 잠시 침울해졌던 분위기는 단숨에 일신되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비장의 무기를 옷 안에 감추고 다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더구나 그녀는 여배우. 적절한 캐릭터를 뽑아내 연기하는 건 일도 아니다. 최소한 자신이 마음먹고 나서면 공포와 죽음보다는 더 잘할 자신이 있다.
뭔가 묘하게 상황 인식이 어긋나 있는 느낌이긴 했지만, 어쨌든 희망과 생명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얼른 몸을 씻는 일을 마치고 물기를 닦아낸 다음 가운을 걸치고 나가 보니, 형진이 주방에서 그녀를 위한 아침 식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동안 후딱 만들어 놓으려고 했는데, 먼저 깨어 나셨더군요.”
“괜찮아. 아니, 괜찮아요.”
“네?”
희망과 생명의 입에서 나온 존댓말에 형진은 물론이고 공포와 죽음 마저도 조금 놀란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쩐지 그 시선을 보니 놀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희망과 생명은 얼른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 나도… 아니, 저도… 존대 정도는 할 줄 알거든? 아니, 알거든요?”
하지만 뭔가 스스로 말해 놓고도 어색하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존대를 듣는 것도 좀 이상하네요.”
“윽…”
“그럼 차라리 이렇게 하죠. 저도 말을 놓을 테니, 여신님께서도 그냥 평소대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
하긴 안하던 짓을 갑자기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하고, 차라리 그게 더 자연스럽긴 하다. 처음 만났을 때야 여신과 다른 신의 추종자라는 입장이 있어서 대화 방식이 그런 식으로 굳어 버리긴 했지만, 지금은 동등한 신이 아니던가.
“그럼… 그렇게.”
희망과 생명이 허락하자 진은 씩 웃었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는 편하게 말할게.”
“으, 응.”
단순히 반말을 들은 것 뿐인데 뭔가 기분이 묘하다. 살짝 기분이 나쁜 것 같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그만큼 친밀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정말이지, 이제는 자신의 심정조차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나저나… 이제는 서로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슬슬 봉인을 풀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곧바로 형진이 조금 민감한 문제를 꺼냈다. 바로 유아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는 희망과 생명의 본신을 해방하는 일을 꺼낸 것이다.
사실 신이 사람의 몸 안에 계속 봉인되어 있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당사자야 별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아무래도 갑갑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때문에 희망과 생명은 반색하며 얼른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해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본신이 해방되어 버리면, 모처럼 욕실 안에서 세웠던 계략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 무엇보다도, 본신으로서 맞이하는 신혼이라는 중대한 이벤트를 맞이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 잠깐!”
“응?”
“그건… 좀 나중으로 미뤄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째서?”
“그러니까…”
하지만 이유를 말하려니 뭔가 궁색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본심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잠시 궁리를 하던 희망과 생명은 문득 한 가지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지금 유아의 몸에서 나가면 자칫 그녀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생길 수도 있어서.”
“그래?”
“아, 아마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싶었던지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아는 지금 아이를 가진 상태. 어떻게 보면 말년 병장보다도 더 조심해야 하는 시기다. 최소한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신체나 정신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는 일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옳다. 흑요호처럼 기운만 넉넉하면 쑴풍쑴풍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출산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니 조심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조심해야만 한다.
“알았어. 그런 문제라면 어쩔 수 없겠지. 고마워. 미리 말해줘서.”
“아니,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 좀 찔리긴 하지만, 자신이 유아의 몸 안에 머물면 그만큼 그녀의 아이 역시 신의 힘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진다. 형진이 인간이었던 시절에 잉태되었기 때문에 태어나도 보통의 인간이겠지만, 신의 힘에 대한 친화력이 높으면 최소한 손해 볼 일은 없다. 비록 확률은 낮지만, 스스로 신위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그만큼 늘어나니까.
“그럼, 차린 건 없지만 슬슬 식사를 시작해 볼까. 모두 앉아봐.”
“응.”
형진이 가운데 앉자, 두 여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양옆에 자리를 잡는다. 한쪽은 생명, 또 한쪽은 죽음.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존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신격을 지닌 두 여신을 모두 손에 넣은 셈이다.
“으음!”
별로 대단한 메뉴도 아니다. 프렌치토스트를 베이스로 계란 프라이에 베이컨을 얹고 여기에 근처 농장에서 난 신선한 과일을 샐러드로 곁들인 정도. 하지만 그런 단순한 메뉴도 형진의 손을 거치니 그야말로 천상의 음식이 되어 버린다.
잠시 그렇게 맛있게 식사를 하던 희망과 생명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한 가지 요구를 더 꺼내 들었다.
“아, 맞다.”
“응?”
“앞으로는 엘피라고 불러줘.”
“갑자기 왜?”
“다른 사람 앞에서 신명을 막 부르기는 그렇잖아. 게다가 일일이 부르기도 까다롭고. 엘피스는 희망이라는 뜻이니까, 그냥 애칭 삼아서 엘피라고 불러줘.”
“과연. 나쁘지 않은데.”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식사를 하고 있던 공포와 죽음도 말했다.
“그럼 나도 앞으로 본신일 때는 딜리아라고 불러줘.”
“딜리아? 그건 무슨 뜻이야?”
“딜리아시스. 그리스어로 공포라는 뜻이야.”
“아하. 그렇군. 알았어.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
희망과 생명은 눈을 살짝 찌푸리고 공포와 죽음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자기 몫의 식사를 입으로 가져갈 뿐이다.
사실 굳이 희망과 생명이 지금의 자신을 엘피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한 것은 나중에 본신이 해방되었을 때를 위한 포석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공포와 죽음이 자신과 비슷한 애칭을 쓰게 된다면 이후에 본신이 해방되더라도 새롭게 신혼을 즐기기는 어려워진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다.
물론 형진은 자신을 둘러싸고 두 여신이 그런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채, 이내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하룻밤이 지나는 동안,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