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81
00681 154. 침입 =========================
“전부요?”
보호와 균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물었다. 말이 쉽지, 하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원을 전부 다른 곳으로 대피시킬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타나토스가 지구에 비해 인구가 적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수억 명은 가뿐하게 넘어가는 수준이니까. 이 정도 인원이 단순히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노력과 물자가 필요한데, 아예 새로운 세계로 대피해서 정착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 노력과 물자는 수십 수백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분명히 필요한 일이야. 우선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대피 계획부터 세우는 편이 좋겠어.”
다행히 형진은 여러 세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타나토스의 인원들을 전부 한 세계에 몰아넣을 수는 없더라도, 국가별로 여러 세계에 나누어 정착시키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단기간에 그 정도 인원을 탈출 시킬 방법. 현재 타나토스의 각지에 희망과 생명의 신존이 존재하고, 그곳에 있는 황혼의 성물을 이용한다 치더라도 이것은 상당한 시간을 소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리 대피 훈련을 해두지 않으면 정작 필요한 시점에서 큰 혼란이 일어나 제대로 대피가 이루어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전 인근에 위치하지 않은 마을들은 설령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신전까지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할 수 없군.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신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을마다 성소 정도는 세우는 수밖에.”
“전부?”
“그래. 전부.”
“불가능해. 아무리 내 추종자가 많아도 모든 마을에 다 배치할 정도는 아니라고.”
마을마다 사제를 한두 명씩 배치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다,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에게 덧씌워진 호구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고립된 마을에 배치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굳이 전부 배치할 필요는 없어.”
“뭐? 그럼…”
“성소만 배치해 두는 거야. 물론 대피 훈련 정도는 다른 추종자들이 가서 연습을 시켜야겠지.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들 정도라면 아주 말을 잘 듣지 않을까.”
“하하…”
확실히 사제가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설명하는 것보다, 수호자가 가서 한 마디 딱 던지는 것이 더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아무리 거칠고 험한 자들이라 해도 설마 수호자들 앞에서 훼방을 놓는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타나토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세 명의 대신과, 최근 들어 교세를 넓혀 가고 있는 보호와 균형 같은 신들까지 모두 모여 의견을 하나로 모으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위협에 대비해 모든 인원을 피신시키는 계획이 성립되었다.
물론 이 모든 사안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 것은 아니다. 희망과 생명 신전의 최고 사제, 공포와 죽음을 따르는 집행자들 중에서도 지부장급, 그리고 그에 준하는 위치의 수호자들 정도가 그 내용을 전달받고 준비를 시작했을 뿐이다.
“너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길드성 한켠에 모여서 스킬을 연습한다든가, 카트린이 가져온 간식을 맛있게 까먹으며 수다를 떠는 것 외에 별다른 존재감을 지니지 못했던 왕족 나부랭이들이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퍼져 나가게 되면, 아마도 큰 혼란이 벌어질 터. 그러니 너희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각자가 속한 국가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추종자들이 방문해서 군주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겠지만, 너희들이 그 다리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무슨 일인지 알겠나.”
“네. 반드시 주어진 역할을 완수하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동안 크루그가 훈련시킨 것이 허사는 아니었던지, 예상치 못한 상황을 전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족 나부랭이들은 제법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좋아. 기대하겠다.”
그렇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타나토스 전역을 꼼꼼하게 살펴 문제의 침입자를 파악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조치를 취해 놓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형진은 대략의 조치를 하달하는 일이 끝나자 곧바로 왕성의 식구들을 불러 모아 상황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곳도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오귀스트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식구들은 살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식구들을 불러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상치 못한 내용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왕성 라이언하트를 안전한 장소로 옮길 생각입니다.”
“네?”
보통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행위를 천도라고 한다. 그리고 천도란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부지를 선정하고, 왕궁을 새로 짓고, 그 주위에 성벽을 두르는 거대한 토목 공사를 병행하기 마련이다.
“혹시 천도를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혹시나 싶어 할이 그렇게 물었지만, 역시나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문자 그대로, 왕성 라이언하트를 그대로 떼어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보통 생각하는 일반적인 천도도 큰일이지만, 현재의 왕성을 그대로 뚝 떼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니… 이건 그야말로 상상초월이다.
“차라리 그냥 적당한 곳에 왕성을 새로 짓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다른 나라 같았으면 이것만으로도 거품을 물고 통촉해 주십시오를 연발할 일이겠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이게 상식적인 수순이다.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뀌는 건 아이들에게 그리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왕성을 새로 지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그거야… 그렇지만.”
뭔가 형진의 말이 더 상식적인 것처럼 들린다. 어째서일까. 왕성을 들어 옮기는 것에 비하면 새로 짓는 쪽이 차라리 나은 것이 당연한 일일텐데.
“어디로 옮기실 생각이신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유아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사실상 이미 결정된 사항임을 인정하는 모양새다.
“은염랑들이 이주한 행성 가운데, 아직 지적 생명체가 태어나지 않은 곳이 있어. 그곳에서 지금 왕성이 위치한 곳과 가장 기후대가 비슷한 곳으로 옮기려고 해.”
생물학자들이 들으면 난리를 칠만한 내용이다. 자칫하면, 왕성 주위에 서식하고 있는 생물들로 인해 해당 행성의 생태계가 엄청난 교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성에 사는 인물들 가운데는 그런 식의 식견을 가진 이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가족들의 안전 대신 영문 모를 행성의 생태계를 걱정할 사람도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형진은 새로 왕성이 옮겨갈 행성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바다… 군요.”
“그러게요.”
형진이 소개한 곳은 표면의 대부분이 물로 뒤덮인 바다 행성이다. 물론 행성 표면이 완전히 물로 뒤덮인 진정한 의미의 바다 행성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육지의 양이 표면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명칭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
“먼저 넘어와 살고 있는 은염랑들의 얘기도 있고, 직접 관측해 보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기후 변화도 그리 심하지 않고 이 부근이라면 폭풍이나 해일 같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아.”
“와…”
폭풍 같은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시각각 나타났다 사라지는 구름의 기기묘묘한 모습은 보는 이를 절로 감탄하게 만든다.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이 있고, 온화한 기후로 수증기마저 많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당연히 태풍 같은 것도 빈번하게 생기겠지만, 그런 현상들이 주로 발생하는 곳은 지금 있는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장소인 것 모양이다.
사실 현재 왕성 라이언하트가 있는 곳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식으로 육지와 동떨어진 외딴 섬이다. 겉모습만 봐서는 구름이 훨씬 다채롭게 변화하는 하늘 모습 외에 다른 점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왕성 라이언하트가 새로운 행성의 에덴동산이 될지, 아니면 갈라파고스 제도처럼 완전히 동떨어진 생태계로 전락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설령 그런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먼 미래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럼… 언제 옮기는 건가요?”
“바로.”
“바로?”
성이 위치한 섬을 옮기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내부에 충격을 주지 않고 얼마나 안전하게 섬 전체를 들어 올리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강력한 황혼의 결계가 구축된 시점에서 사실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결계가 펼쳐진 지역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거대한 지형을 통째로 떼어내는 데는 엄청난 힘이 소모되겠지만, 형진은 이미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신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혹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왕성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을 길드성으로 피난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이주 작업이 시작되었다.
섬을 들어 올리는 것은 부양선이나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 같은 것을 날게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다. 일단 부피는 물론이고 무게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양이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가볍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했다.
“힘 내.”
“화이팅!”
“…”
오디션에서 좋지 않게 떨어진 이후로 뱀과 깃털은 사실 좀 왕따 비슷한 일을 당했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다른 신들도 그녀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신이 된 이후로 이 정도의 힘을 운용해 본 적이 없는 터라 그녀 자신도 긴장하고 있었다.
“시작합니다.”
“네.”
형진이 건네준 공헌도를 사용해 이미 황혼의 결계로 공간을 분리하는 일을 마친 섬을 가볍게 만든다. 깃털처럼 가볍게.
옆에서는 보호와 균형이 섬의 구조물이나 지형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 만이 아니라 여러 신들이 한데 힘을 합쳐서 이번 일을 돕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섬 자체를 가볍게 만들어 마치 풍선처럼 떠오르게 만드는 뱀과 깃털의 역할이다.
“윽…”
난생 처음. 게다가 투자된 공헌도를 생각하면 실패해서는 안 될 일이다. 뱀과 깃털은 이를 악물었고, 마침내 그 힘이 최대한으로 발휘되자, 마치 아이스크림을 떠낸 것처럼 섬 전체가 둥실 떠오른다.
“됐다!”
“좋습니다. 이대로 공간을 넘습니다. 집중하십시오!”
“네!”
일단 섬을 띄우는 일이 성공하자, 그 다음은 쉬웠다. 이미 형진은 티폰을 몇 번이나 이동시킨 전력이 있었고, 그에 비한다면 왕성 라이언하트는 그리 크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다.
거대한 지형을 그대로 뚝 떼어낸 상태로 공간을 넘는 것은 실로 장엄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일이었고,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탄성을 터트리기 바빴다.
마침내 섬은 공간을 넘어 아직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표면의 대부분이 바다로 뒤덮인 행성에 도착했다.
“그대로… 그대로 천천히 내려놓습니다.”
뱀과 깃털은 정신을 집중하며 천천히 힘을 줄여나갔고, 섬은 조심스럽게 바다 위에 내려앉았다.
형진은 본래 있었던 행성의 해수면과 섬 안쪽의 해수면 높이가 일치하자, 이빨과 말뚝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입니다.”
“넵!”
기다렸다는 듯이 이빨과 말뚝이 힘을 발휘하자, 곧바로 해저로부터 말뚝이 솟아올라 섬을 받치기 시작한다. 계속 떠있게 할 수도 있지만, 문제가 생길 경우 그대로 섬 전체가 가라앉을 수도 있는 일. 그런 위험을 그대로 둘 형진이 아니다.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말뚝들은 섬을 받치는 것도 모자라, 주위를 방파제와 같은 느낌으로 에워싸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계단식으로 바깥쪽을 향해 경사면도 만들었다. 말뚝 가운데 일부가 부서지거나 하더라도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형진은 그 외에도 섬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을 꼼꼼하게 살핀 뒤, 그것이 모두 끝나자 비로소 섬의 이전을 완전히 끝냈음을 선언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큰 도움을 주셨으니 인센티브와 휴가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와아아!”
인센티브야 그렇다 쳐도 휴가라는 말을 듣자 연습생 신분을 지닌 신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허세와 망상의 잔소리와 구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나쁜 어른이가 되어 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