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98
00698 158. 불청객 =========================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에 빠져 있던 레나리스는 한참 후에야 예쁜 요정 하나가 건네준 시원한 주스를 마시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가,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그럼 쉬세요.”
“네.”
정신 사나운 다른 요정들과는 어쩐지 다른 분위기. 혹시 보호와 균형처럼 여신인데 요정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내 다른 요정들과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방금 전의 그 요정은 여신들보다도 더 희귀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세상에 오직 하나 남은, 엄청난 고대 문명을 이룩한 움리드라는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릴이기 때문이다.
“괜찮아?”
희망과 생명과 한참이나 투닥거리던 형진이 돌아와 그렇게 묻는다. 하지만 레나리스는 흠칫하며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네? 아… 괘, 괜찮아요.”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신이라니. 그런 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상에서 인간들과 어울려 지내고 있었다니. 물론 진이라는 남자는 그냥 인간들 사이에 세워놔도 뭔가 눈에 확 띄는 그런 독보적인 존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설마 신일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괜찮다니 다행이군.”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느닷없이 네 새로운 부모가 사실은 신이었어라고 말하면 누구든 레나리스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 맞다. 이걸 주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하는 레나리스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던 형진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이건…”
“음, 내 딸이 된 증표라고나 할까. 선물이다. 받아둬.”
“감사합니다.”
형진은 레나리스의 오른손 중지에 방금 꺼낸 반지를 끼워 주었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반지를 가운데 손가락에 끼는 것을 성공을 기원하는 행위라고 믿었지. 비록 너는 어린 나이에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것만이 인생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건 앞으로 네가 진정 바라는 일이 성취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감사… 합니다.”
레나리스는 왕녀였다. 물론 이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를 때의 의미이고, 자국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황녀로 불리는 그런 신분이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위치였다고는 하지만, 국왕의 딸인 그녀가 왕비들을 제외하면 나라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 가운데 하나였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 그래서 반지니 귀걸이니 목걸이니 하는 장신구 정도는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마음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선물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형진이 선물한 반지는, 세공 장인인 그의 솜씨가 그대로 녹아 있어서 가늘고 얇으면서도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런 훌륭한 장신구였다. 물품 자체로도 상당히 귀한 느낌이 전해진다고나 할까. 정말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선물이다.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어쩐지 이제야 좀 혼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다. 신이니 인간이니 하는 차이를 넘어서 정말로 이 사람의 딸이 된 것이구나 라는 느낌이랄까.
딴에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감사의 뜻을 전했지만, 형진은 씩 웃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해.”
“네?”
“그건 그냥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모셔두라고 건네준 선물이 아니거든.”
“그럼…”
“자, 일어나봐. 어서.”
“…”
레나리스는 형진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서 일어났다.
“자, 우선 첫 번째 사용법. 손바닥을 얼굴로 향한 상태로 반지에 입을 맞춰봐.”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걸까. 레나리스는 어쩐지 생일날 선물을 열어보는 듯한 기분으로 형진의 말을 따랐다.
“앗!”
그러자, 순간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오른다. 마치 호버 보드를 탄 것처럼.
“이건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3세대 호버 보드야. 평소에는 장신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기능을 발동하면 이런 식으로 호버 보드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거지.”
“와아…”
“필요하다면 원하는 형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2세대 호버 보드와 동일해. 사용자에 대한 보호 기능은 1세대 호버 보드에도 포함되어 있는 기능이고. 하긴 2세대 호버 보드는 아직 추종자들에게만 지급된 물건이라 본 적이 없겠지만.”
“그, 그렇군요.”
호버 보드에 대해서는 레나리스도 얼핏 알고 있었다. 아직 왕족 나부랭이들에게는 지급되지 않았지만, 길드성을 나가서 영화관 같은 곳을 갈 때면 그것을 타고 날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탓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2세대 호버 보드와 별 차이가 없어. 이것이 3세대로 불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지.”
“그게 뭔데요?”
눈을 반짝이며 묻자, 형진은 장난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그 기능을 발동시키고 싶으면, 반지의 앞면에 입을 맞추면 돼. 자, 한 번 해볼래?”
“네!”
레나리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손등 방향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손을 든 채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와아!”
허공에 빛이 아로새겨지기 시작한다. 수많은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지며, 마치 보이지 않는 펜이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느낌. 놀라운 것은 그러한 빛의 연출과 함께 그려진 무언가가 그대로 실체가 되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건!”
그것은 반짝이는 상아빛의 형상에 황금빛 테두리를 씌운 아름다운 형상의 마차였다. 마차의 앞쪽에는 아름다운 네 마리의 백마가 매여져 있었는데, 사실 이 말들은 실체가 아닌 허상에 불과했다. 마차만 덩그러니 있어서는 그림이 안 되니 나름대로 공을 들여 구현해 놓은 환상인 셈이다.
“3세대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는 그 안에 탈 것을 담아 놓았다는 점이지. 굳이 어딘가에 마차를 세워둔다거나 할 필요 없이, 필요할 때 즉시 불러서 탈 수 있기 때문에 꽤 편할 거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것도 하늘을 날 수 있지.”
“저, 정말요?”
“물론. 난 거짓말을 아주 싫어한단다.”
사기는 가끔 치지만.
본래 이 마차는 앙그릴을 순방중인 카트린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요안나가 좋아하는 스포츠카 스타일로 만들어 볼까 싶었지만,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리는 쭉쭉빵빵한 미녀라면 몰라도 카트린 같은 귀여운 숙녀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컨셉을 바꾸었고, 지금처럼 동화에나 나올 법한 모습의 마차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지금 레나리스에게 주어진 이 마차는 3세대 비행형 퍼스널 모빌리티 중에서는 두 번째 작품이 되는 셈이다.
“타볼래?”
“네!”
“자, 그럼 이리로.”
문을 열고는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굽히며 손을 내밀자, 레나리스는 까르르 웃으며 그 손을 잡고는 마차에 올랐다.
“와아…”
당연한 얘기지만 마차 안은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훨씬 더 넓은 공간을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좌석조차도 널찍한 테이블과 안락한 소파가 놓여진 커다란 응접실 같은 느낌인데, 뒤쪽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대로 한숨 푹 자도 될만한 침대와 느긋하게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이 달린 방이 나온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마법인가요?”
“마법도 있고, 권능도 있고.”
“세상에.”
마차 안에 마주 보고 앉자, 형진은 다시 간단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마차를 움직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야. 자동과 수동이 그것인데, 자동의 경우엔 원하는 목적지를 지도 상에서 입력하면 그곳으로 알아서 가는 기능이지. 다만 이 경우에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조금 느리기도 하고 먼 길을 돌아서 갈 수도 있어. 피곤해서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을 때 쓰면 좋아.”
“아하.”
“수동의 경우는 네가 직접 이 마차를 모는 거야. 자동 운전 상태에서 제약이 걸려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게 되지. 다만 이 경우엔 모든 것을 네가 판단해야 하니 마차를 몰 때 안전에 충분히 유의해야 해.”
“그렇군요.”
설명은 들었지만 아무래도 실감은 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마차가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다는 것부터도 잘 믿기지 않을 정도다.
형진은 그런 레나리스의 생각을 읽었는지 빙긋 웃음을 짓더니,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 앉으며 말했다.
“어차피 말로는 설명해도 이해하기 힘들겠지. 뭐든 직접 해보는 것이 빠른 법이니까, 한 번 마차를 움직여봐.”
“지금요? 제가?”
“지금. 네가.”
“…”
아직 어른도 되지 않은 레나리스에게 이런 커다란 마차의 운행을 맡기는 건 얼핏 위험한 일일 수도 있었다. 자동차나 비행기 면허는커녕, 자신의 세계에서 마차를 몰아본 적도 없는 소녀에게 느닷없이 그런 것을 맡기는 것이 무책임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형진은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혼자 사용하기 위험한 물건이라면 카트린이나 레나리스 같은 아이들에게 이런 걸 맡기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그럼… 해볼게요.”
“그래.”
마치 버릇처럼 크게 심호흡을 한 레나리스는 반지에 의식을 집중했고,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여러 가지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마차 주위의 모습들이야. 옆에 보이는 지도는 현재 마차가 위치한 곳 주변의 지형을 나타낸 것이지. 그 외 운행에 필요한 정보는 바로바로 시야에 드러나도록 되어 있어.”
“와아…”
“우선은 시동을 거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한쪽에 빨간 단추가 보이지? 그걸 눌러봐.”
“네.”
레나리스가 허공에 손을 뻗어 빨간 단추를 누르자, 마차에 매여져 있던 백마들이 푸르릉거리며 고개를 흔든다. 자동차라면 엔진 시동음을 연출했겠지만, 이건 마차니까 연출 방법도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잘 했어. 이제 눈앞에 손잡이 같은 것이 나타났을 거야. 능숙해지면 그런 것 없이 생각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직 연습 중이니까 그걸로 방향이나 높이를 조절해야 해.”
“어쩐지 진짜 마차와는 다르네요.”
“진짜 마차가 아니니까.”
“하긴, 그렇네요.”
형진과 대화를 나누며 레나리스는 손을 뻗은 뒤 가만히 핸들을 움직였다.
그러자, 정말로 그녀가 탄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좋아. 잘 했어. 이번에는 왕성을 한 바퀴 돌아 보도록 하자. 천천히 고도를 높이도록 해.”
“네!”
레나리스는 열정적인 학생이 되어 앞에 앉아 있는 형진의 말에 따랐다.
그러자 마차에 매여져 있던 말들의 등에서 갑자기 하얀 날개가 확 하고 펼쳐지며 깃털이 허공에 나부끼는 모습이 연출된다. 레나리스는 마치 마부석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와아아!”
“어때, 멋져?”
“네! 정말 대단해요!”
“허세와 망상께서 기뻐하시겠군. 이 마차의 연출은 그분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거든.”
“네? 허세와 망상이라면…”
“물론 네가 생각하는 그 신이 맞아. 지금은 나와 함께 일하고 계시지. 참고로 거짓된 천국도 사실 그 양반 작품이거든.”
“아…”
라야바르트의 왕녀에서 형진의 수양딸로 신분이 바뀌었을 뿐인데, 지금까지는 바로 코앞에서 보고도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진실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하지만 레나리스는 또한 알고 있었다. 단지 수양딸이 되었다고 이런 모든 것을 단숨에 알려주는 것은 아니리라. 지금까지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이 정도면 다 털어놓고 말해도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알려주는 것이리라. 즉,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은 형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신뢰인 셈이다.
신뢰에는 신뢰로 답하는 것이 도리. 레나리스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 깊게 다짐하며 천천히 마차를 움직여 갔다.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레나리스는 손을 움직였고, 그녀의 뜻에 따라 마차는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와아아…”
벌써 몇 번째 탄성을 터트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바다 위에 마치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왕성 라이언하트의 모습을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은 누구도 쉽게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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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혹시 오토맨 기억하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마차가 만들어지는 모습은 거기서 따왔습니다.
감사합니다.